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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추억을 긷는 책, 분도 우화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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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4 ㅣ No.1301

[이 땅에 빛을] 추억을 긷는 책, 분도 우화 시리즈

 

 

1970년대 「꽃들에게 희망을」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어린 왕자」, 「갈매기의 꿈」과 함께 대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책이었다. 뛰어오르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꽃들에게 희망을」이나 「갈매기의 꿈」은 신선한 격려였다. 경제 성장 일변으로 내닫던 사회에서 우화는 참신했다. 시위에 참여할 수도 안할 수도 없던 날에 그 짧은 글들은 제3자적 충고를 던졌다. 게다가 앞의 두 책은 거의 5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시리즈로 계속 말을 걸고 있다. 이 책들은 대학가 일반서점 판매대에서, ‘하느님’이나 ‘교회’라는 말 한마디 없이 ‘인간으로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신앙을 직접 논하지 않고, 가치관의 변화를 초래하는 교회 출판의 길은 오랜 여정을 거쳐 왔다.

 

한국교회가 말씀에 접하고 신앙을 지켜온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동시에 천주교회는 한글 출판문화에 있어 큰 역할을 해냈다. 한문교리서나 라틴어는 일반인에게는 주문과 같을 뿐이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지도층은 바로 한글교리서를 쓰거나 한문교리서를 번역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글을 교회 공식어로 상용케 했다. 이어 베네딕도회에서는 라틴어 전례서들을 한글로 번역해냈다. 그리고 두 개 이상의 언어 사이에 있던 선교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한국어와 한국문화 연구에 몰두했다.

 

 

하느님 말씀을 여는 한글

 

1443년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 그럼에도 조선의 공식 문서는 한자로 쓰였다. 국가시험은 한문으로 치렀고, 정부의 포고문과 상점의 간판 등은 모두 한자였다. 이때 한문에 익숙했던 양반들이 책을 통해 천주교를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과 다른 계층을 염두에 두고, 곧바로 한글로 ‘말씀’을 읽도록 했다. 교리 교육이 행해지는 곳에는 한글 교육이 이루어졌다.

 

박해 시기 100년 가운데 약 60년이나 성직자 없이 지냈던 신자들에게 교리서는 움직이는 성당이었다. 필사본이지만 책은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모았고 교회 재건에 힘이 되었다. 성직자가 있을 때도, 사제 수는 너무 적고 신자들은 전국 산골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책에 의존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서적 발간에 힘썼고, 한글로 출간했다. 철종 임금 시절, 베르뇌 주교는 비밀리에 서울 두 곳에 인쇄소를 차리고 목판 인쇄를 했다. 주로 기도문과 교리문답, 신앙 증언이 편찬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울에서만 필사한 한문 신문이 있었는데, 그것도 읽고 바로 다음 사람에게 돌려주는 상황이었다. 이때 전 국민의 약 0.1%에 해당하는 신자들이 만든 서적의 양은 조정을 두렵게 했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모든 것을 잃었다.

 

활판 인쇄는 리델(Ridel, 1830-1884, 李福明) 주교가 재입국을 도모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사전, 성서주해와 교리문답을 펴냈다. 이 인쇄소는 곧 나가사키로 옮겨져 ‘성서활판소’라 불렸고,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서울 정동을 거쳐 명동성당 구역 내로 옮겨졌다. 이는 「경향잡지」가 발간되면서 ‘경항잡지사’로 개명했다. 박해 때의 목판본 책들과 사목지침서 등을 인쇄했다.

 

 

「미사경본」의 한글 번역, 전례를 이해하는 신자

 

1927년 대구와 서울교구에서 신문이 나올 무렵,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시대가 열렸다. 덕원 수도원은 1927년 인쇄소를 설립하고, 1930년 출판을 시작했다.(연길 수도원 인쇄소는 1939년 설립). 1933년 한국 다섯 교구가 간행물을 통일하기로 결정하고, 출판위원회를 출범할 때 로트(Roth, 1890-1950, 洪泰華) 신부가 원산 교구 출판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서울 교구는 기존 분야의 출판을 주도하는 반면, 덕원에서는 특화된 출판물을 발간했다. 즉, 수도생활과 전례를 중시하는 베네딕도회는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의 한글화’를 통해 한국인 수사들의 수도생활을 돕고, 또 성무일도 등의 기도생활을 본당으로 확산시켰다. 이로써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기도하며 전례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덕원에서는 1932년부터 여리 미사전례서 번역이 착수되어, 1936년 로트 신부의 「미사경본」으로 모아졌다. 이후 축일미사 ‧ 사순시기 등 다양한 전례, 노인 ‧ 소아 ‧ 수녀 등 세대와 역할에 맞춘 전례서, 기도서와 교리교재 등을 발간했다. 인쇄 사업이 성황이었음은 그 출판 부수에 나타난다. 「미사경본」 1만부를 비롯하여 「아해들의 고해성체 안내」 5천부 등 보통 천부 단위로 인쇄했는데, 그것도 쇄(刷)를 거듭했다. 조선대목구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 조선 지역공의회에서 출간한 「천주교 요리문답」은 3만부나 찍었다. 1940년 원산교구에는 신부 34명, 수녀 33명, 신자 11,004명과 예비신자 1,695명이 있었다. 덕원 수도원은 성직자 ‧ 수도자 60여 명이 사는 공동체였다. 그러니까 덕원 인쇄소에서 만든 책들은 한국교회 전체에서 소모되는 것이었다. 주로 새로 선교가 이루어지는 원산과 연길, 평양 교구에서 많이 이용되었으며, 구교우가 이미 신앙의 틀을 잡은 대구와 서울 교구는 수요가 적었다. 책값은 가능한 한 저렴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고유미사나 평일미사 책은 1부에 60전이었다(1936년). 1932년 일제는 빈민에게 노동을 시키고 1인당 하루 38전을 지급했다. 4년간의 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책값은 성인 노동 이틀 치에 해당했다.

 

이 간행물들은 로트 신부와 피셔(Fischer, 1902-1950, 裵) 수사의 노고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1948년 12월 포도주 제조를 빌미로 당가(재무) 신부를 체포한 북한 당국은 넉 달 후에 인쇄물을 꼬투리로 인쇄 책임자 피셔 수사를 체포했다. 한 달 후 수도원이 폐쇄되었다.

 

 

경제발전에 몰입한 사회, 일반서점에 도는 분도 책

 

조국 광복 이후 교회의 출판 활동이 재개되고, 폐간되었던 출판물들이 복간되었다. 「경향잡지」는 1957년부터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관할하고, 경향잡지사는 이듬해 ‘가톨릭출판사’로 재출발하여, 기존과 같은 책들과 한국전쟁 기록 등 역사서를 펴냈다. 이 무렵 왜관 수도원은 1960년 마오로 기숙사에 인쇄소를 차리고, 1962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문화공보부에 등록했다. 이미 1961년에 등록을 마친 성 바오로 딸 수도회에서도 이 해부터 인쇄를 시작했다. 이후 교회 출판사들이 연이어 설립되어 ‘가톨릭 신문 출판 협의회’가 출범했다.

 

분도출판사는 1960년대 신학 전문서적들을 발간했다. 1963년에는 로트 신부가 쓴 「미사경본」 개정판을 냈는데 3년간 30만부가 팔렸다. 이렇게 자리잡은 분도출판사는 70년대 대변혁을 시도했다. 그것은 수도원 전체의 의지이지만, 물꼬를 튼 이는 세바스티안 로틀러(Sebastian Rothler, 1935-2013, 林仁德) 신부와 비토 슈텐거(Vitus Stenger, 1908-2003) 수사였다. 비토 수사는 덕원 시절에도 제본을 담당했는데, 옥사에서 고초를 겪고 휴전 후 재입국했다. 그들 곁에는 편집장 김윤주나 정한교 등의 동반자가 있었다.

 

임인덕 신부를 영화, 미디어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1971년부터 22년간 출판사 책임자로 총 400여 권의 책을 냈다. 임 신부는 책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완성된 복음전파 수단으로써 책을 엄선하고 오래 계획했다. 그리고 스스로 ‘꽃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그는 「성난 70년대」,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등 출간 방향을 현실 참여 쪽으로 잡아갔다. 또한 그는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은 초대했다. 김지하, 이해인, 최민식, 권정생, 이철수 등도 책으로 발굴하고 소개했다. 아울러 성경번역, 교부신학, 신학서 소개로 신학 발전의 샘을 파고자 했다. ‘교부문헌총서’, ‘아시아신학총서’, ‘종교학총서’, ‘사목총서’, ‘신학텍스트총서’ 등은 학문의 기초를 제공했다. 총서는 출판사의 기획된 의도이며 독자를 선도해 나가는 작업이었다.

 

출판사의 의도는 당시 사회를 너무 앞질러 나간 것으로 읽히기도 했다. 분도출판사는 출판물 판매를 교회에 의지했고, 또 교회로부터 미사경본 등을 의뢰받아 출판하고 있었는데, 70년대 중반 교회와 거래가 끊겼다. 이때부터 사장 신부는 신념을 담은 책과 미디어들을 팔러 직접 나섰다. 각 본당 교중미사 후 판매대를 설치했다. 대학가 주변의 서점을 돌았다. 분도책들은 이렇게 일반서점, 대학가에서 환영받게 되었다. 「Time」의 기사도 먹으로 지워져 배포될 당시, 현실에 반감이 많던 대학생들에게 분도책들은 의노의 분출구였다. 소위 ‘운동권’들에게 읽혔다. 경제반전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분도책들은 일반서점에서 흥행하는 대기록이었다.

 

임 신부는 「해방신학」 사건 이후로 형사가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발간물에 자주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정작 임 신부는 한번도 자신은 민주화 투사라고 여긴 적이 없다. 그 흔하던 시국 성명을 발표한 적도 없다. 그는 다만 개인, 교회, 사회가 나아갈 길을 고집스럽게 모색했을 뿐이다. 인구의 90%가 비신자인 한국사회는 이제 ‘정신의 풍요’를 쌓을 때다. 분도우화 시리즈 등은 그 일면을 감당한다. 교회문화를 일구어 온 분도출판사가 지닌 소명이기도 하다. “진짜 좋은 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0년 가을(Vol. 51),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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