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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콜리어 신부와 소양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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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08 ㅣ No.1919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2) 콜리어 신부와 소양로 성당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시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신앙의 증거자”인 이분들 가운데에는 어쩌면 살아생전에 직접 뵌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원장 유흥식(라자로) 주교님의 바람대로 “특별히 이분들이 하늘에서 우리 교회와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가 되다

 

아일랜드 동부 해안가의 소박한 어촌 마을 클로거헤드(Clogherhead)에서 1913년에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6월 22일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은 콜리어(A. Collier)입니다. 이듬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그가 너무 어렸기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겠지만, 1918년 종전 후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북아일랜드와의 분쟁 등 전쟁 후유증으로 인한 사회 ·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메이누스(Maynooth)의 성 패트릭대학에 진학한 그는 선교에 뜻을 품고 나반(Navan)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938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아일랜드의 갤빈(E. Galvin) 신부가 1916년에 창설한 선교 단체입니다. 중국에서 사목하면서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갤빈 신부는 아일랜드로 돌아와 성 패트릭대학 교수 블로윅(J. Blowick) 신부와 함께 골롬반회를 창설하고, 중국을 시작으로 여러 선교 지역에 회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33년 10월 29일입니다. 제1진으로 도착한 선교사 10명은 목포 산정동(옛 ‘성 골롬반 병원 자리)에 본부를 마련하고 전라도와 제주도 서쪽의 선교를 맡았습니다. 그 후 1937년 4월 13일 대구 대목구에서 광주 지목구가 분리되면서 골롬반회가 사목권을 위임받았고, 1939년 4월 25일에는 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분리되면서 강원도 지역도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골롬반회 선교사가 된 콜리어 신부는 수품 이듬해인 1939년 신부 2명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2월 16일 서울에 도착한 뒤 18일에 춘천으로 왔습니다. 이어 강릉(현 임당동) 본당 보좌로 낯선 땅에서 사목을 시작하였고, 횡성 본당 보좌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아일랜드가 일본의 적성국가로 취급되면서 콜리어 신부도 적성 국가 출신이라 하여 체포되었습니다. 강릉과 춘천에 감금되었다가 1942년부터는 춘천에서 연금 생활을 계속하였지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에 광복이 찾아오자 연금에서 해제가 된 콜리어 신부는 횡성 본당 제4대 주임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첫 순교자가 되다

 

광복 이후 춘천 지역에 신자수가 늘어나자 춘천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은 1950년 1월 5일 춘천(현 죽림동) 본당에서 소양로(昭陽路) 본당을 분리·설립하고 콜리어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신설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된 콜리어 신부는 비록 신자수가 약 250명밖에 안 되고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한 한옥집 한 채뿐이었지만, 번듯한 본당으로 발전시켜 나갈 각오를 다졌던 것 같습니다. 곧바로 성당을 지을 계획으로 자재를 모으고 있었고, 성당 부지까지 점찍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의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지만 그의 꿈을 다 펼쳐 보이기도 전인, 반년도 채 안 된 6월 25일 주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 퀸란 몬시뇰을 찾아간 콜리어 신부는 오후 늦게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북한군의 서울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27일 새벽 북한군에 의해 춘천 일부가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몬시뇰과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콜리어 신부는 그의 복사 김경호(가브리엘)와 함께 춘천 성당으로 가기 위해 성당을 나섰습니다.

 

많은 북한군이 우체국 바깥에 주둔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콜리어 신부를 보자마자 달려와 정체를 밝히라고 하였습니다. 천주교 신부이고 한국에서 신앙 전파만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미국 사람인지도 물어봤는데, 자신은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장교가 다가와서 주머니를 뒤져 시계, 묵주, 돈과 소지품을 꺼내고 나서 한국에서 진짜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총살해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콜리어 신부는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브리엘도 같은 추궁에 자신은 신부님을 도와드리고 있을 뿐 어떤 정치적 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던 장교는 손을 등 뒤로 포박하게 한 다음 두 사람을 같이 묶도록 명령했습니다. 밧줄로 함께 묶이자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0분쯤 끌려가다가 소양강변에 이르자 장교는 또다시 춘천에서의 그들의 위치와 이제껏 해온 특수한 군사 임무 및 정치 임무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이제라도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과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장교는 앞으로 가라고 명령한 뒤 몇 발자국 걷지 않았을 때 뒤에서 총을 쏘았습니다. 총을 맞고 콜리어 신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북한군 중 한 명이 “더 쏠까?” 하자, 다른 한 명이 “죽은 것 같은데, 총알 아까운데 그냥 가자.”고 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어깨와 목에 총알이 관통했으나 신부가 총에 맞으면서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심한 총상만 입고 살아남았습니다. 쓰러지면서 땅바닥으로 가브리엘을 끌어당겼던 것입니다. 그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렸습니다. 손이 함께 묶였던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려보니 손을 뺄 수가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힘겹게 밧줄을 풀고 북한군을 피해 산을 넘어 돌아온 그는 콜리어 신부의 순교 사실을 생생히 증언해 주었습니다. 콜리어 신부의 유해는 1951년 10월 9일 가브리엘의 증언에 따라 유엔군에 의해 발굴되어 춘천 성당 뒤뜰에 안장되었습니다.

 

 

소양로에 콜리어 신부 기념 성당이 세워지다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휴전되었지만 도시와 농촌 가릴 것 없이 쑥대밭이 되었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도로나 교량도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상상 이상으로 컸습니다. 춘천교구에서도 성당 재건에 힘쓰는 한편 이재민과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원조 물자를 배급하는 등 피해 복구에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한편 퀸란 교구장은 한국전쟁 중에 순교한 콜리어 신부와 매긴(J. Maginn, 陳) 신부, 레일리(P. Reilly, 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소양로, 삼척(현 성내동), 묵호에 기념 성당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소양로에도 제3대 주임 벅클리(J. Buckley, 夫) 신부에 의해 1956년 9월 3일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이 봉헌되었습니다.

 

소양로 성당은 춘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봉의산(鳳儀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한 격전지이기도 했던 봉의산은 상서로운 봉황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반원형 구조의 아담한 성당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당 뒤쪽을 돌아 들어가면 영락없는 귤 반의 반쪽입니다. 벅클리 신부가 이런 독특한 성당을 지은 것은 머나먼 타국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콜리어 신부의 살신성인 정신을 영원히 남기고, 한국전쟁의 아픈 사연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붕 위의 예수 성심상이 두 팔을 벌려 반겨주는 소양로 성당은 전통적인 중세풍 성당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근대적 건축 양식을 도입한 국내 최초의 성당으로 평가받아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기둥이 없는 반원형 성당 내부는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신자석이 부채꼴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신자석과 제단이 가까워 더욱 친밀감이 느껴집니다. 제대 십자가 위의 원형창과 주위의 반원형과 아치형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채광은 자연스럽게 콜리어 신부의 삶과 신앙을 묵상으로 이끌어 주고도 남습니다.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제가 된 지 12년밖에 안 된 콜리어 신부의 순교가 한국 전쟁 70주년을 맞아 더욱 아리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참고 도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자료집 제1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18.

춘천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춘천교구 50년사』, 1989.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본당사 편찬위원회,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본당사』, 소양로 성당, 2012.

 

[평신도, 2020년 여름(계간 68호), 글 · 정리 김주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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