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성경자료

[성경] 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의 축복으로서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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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08 ㅣ No.4946

[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의 축복으로서의 웃음

 

 

사라의 웃음과 아들의 약속

 

창세기 18장의 이야기를 계속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이 차려준 음식을 먹은 손님이, 정확하게는 사라의 수고로 식사대접을 받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0절)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참 재밌습니다. 이 말을 천막 어귀에서 들은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욕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8,12) 사라의 이런 생각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었지요.

 

앞서 8장 11절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이유 있는 웃음을 알아채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3-14절) 그러자 사라는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며 부인했고, 이에 주님께서는 “아니다. 너는 웃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웃음 때문에 생긴 재밌는 이야기 아닐까요?

 

 

아브라함의 웃음과 아들의 약속

 

앞선 17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신 주님께서 ‘사라이’에게는 ‘사라’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 그리고 네가 그에게서 아들을 얻게 해 주겠다. 나는 복을 내려 사라가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여러 나라의 임금들도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15-16절) 그러자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17절)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종인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18절) 하였고, 이에 주님께서는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19절) 하시며, 덧붙여 이스마엘에 대한 축복도 약속하셨지요.

 

 

하느님의 웃음 이사악

 

또 재밌는 것은 ‘이사악’이란 이름의 뜻입니다. 이 이름 자체가 ‘아브라함의 웃음’과 ‘사라의 웃음’을 상기시키는 이름이기 때문이지요. ‘이사악 엘’의 축약 형태가 이사악인데, 이는 ‘하느님께서 웃으시기를!’ 곧 ‘하느님께서 호의적이시기를!’ 이란 뜻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웃음과 관련하여 창세기 21장은 다음의 언급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사라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5-6절)

 

 

참웃음을 주시는 하느님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러한 웃음을 가져다주시는 분은 누구셨나요?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기쁨으로 웃음 짓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우리에게 진정한 웃음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무덤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빈 무덤을 보고 슬퍼하는 막달레나에게 “막달레나야!”하고 다정스런 음성으로 부르시며 웃음을 주신 것입니다.

 

 

웃음을 짓게 하시는 예수님

 

루카복음 10장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도 웃음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정신이 없는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요.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보고만 계십니까? 마리아보고 저를 좀 도우라고 하십시오.” 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심각한 분위기였을까요? 차라리 웃음을 자아내는 분위기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만 옳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르타도 옳고 마리아도 옳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하는 일의 소중함도 잘 아셨고, 그래서 마르타의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들리는 듯합니다. “나에게 시중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 생명의 말씀을 듣는 일은 더 중요하다! 그러니 그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너는 무슨 일을 할 때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불평함이 없이 하라!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쁘게 하라! 이왕에 할 일 웃으면서 하라!”

 

 

웃음을 짓게 하는 신앙생활

 

신앙생활은 기쁜 것입니다. 즐거운 것입니다.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마음으로부터 웃는 것입니다. 한량없이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신비 앞에 기쁨과 감사의 웃음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기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떠할까요?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을 남에게도 전하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영혼의 웃음을 짓고 있다면, 나의 그러한 웃음을 남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웃음을 짓게 되는 우리로서 그 놀라운 신비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구원을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호의를 생각하면서 영혼의 웃음을 짓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웃게 하고, 내가 하느님을 웃게 하는 일, 그것이 바른 신앙생활임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

 

창세기 18장에서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17절) 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으니 그에게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선택하다’는 원래 ‘알다’는 뜻의 히브리어를 번역한 말인데, 성경에서 ‘알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가 서로 아는 것은 남녀가 서로 ‘육체관계’를 맺는다는 뜻을 지니고, 누군가를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매우 친밀하게’ 안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내가 아브라함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로써 그들이 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와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시고, 그러한 부르심을 우리가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는 ‘기도’와 ‘성사생활’ 등이 있고, 아울러 ‘레지오 마리애’와 같은 ‘신심생활’이 있습니다. 신심생활의 한 부분인 주회합의 시간도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는 친교의 시간’과 ‘하느님과의 내밀한 사귐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정의와 공정’(창세 18,19)은 백성을 다스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들이 실천에 옮겨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자 ‘사회 통치를 위한 중요한 원칙’에 해당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대 근동에서는 모든 지도자들이 이 덕목을 존중해야 했는데, 특히 임금들이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 ‘꾸리아’, ‘꼬미씨움’, ‘세나뚜스’는 말할 것도 없고, ‘쁘레시디움’의 4간부까지도 당연히 ‘정의롭고 공정한 처신’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창세 18,20)하시며 그들을 벌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시자,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일종의 협상을 벌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한명의 의인은 물론이고 회심하는 단 한명의 죄인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실상은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아브라함과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단원들도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당당히 한 몫을 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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