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30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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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29: 영국에 건너간 로마네스크 - 노르망디와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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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15 ㅣ No.726

[성당 이야기] (29) 영국에 건너간 로마네스크


노르망디와 영국

 

 

이제 성당 이야기가 대륙에서 섬나라 영국으로 건너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영국에는 11세기 초엽까지 앵글족과 색슨족의 독자적인 성당 건축이 있었습니다. 이후 영국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이 도입되었는데 노르망디의 건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전 회에서 노르망디의 초기 로마네스크(몽생미셸)와 전성기 로마네스크(캉의 생테티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노르망디’는 북쪽 사람이란 뜻의 ‘노르만’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리고 게르만족처럼 ‘노르만족’ 역시 특정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의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바이킹으로 더 잘 알려진 노르만족은 바다와 강을 통해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9세기부터는 프랑스 북쪽 해안에도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침략과 약탈에 시달린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프랑스어 사용 등의 조건으로 그들에게 땅을 내주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노르망디 공국입니다(911년).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앵글족과 색슨족은 앨프레드(871~899년 재위)에 의해 통일 왕국을 이루고 그 나라를 잉글랜드(영국)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여 년이 흘러, 가톨릭 신앙이 깊은 에드워드(참회왕, 1042~1066 재위)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에드워드에게 도움을 주었던 노르망디의 공작이 윌리엄(기욤)이었는데, 에드워드는 그 보답으로 그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를 밀약합니다. 그러나 세습이 아니라 위탄게모트에서 왕을 선출하는 방식의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사후 헤럴드를 왕으로 뽑습니다. 이에 왕위 계승자로 생각했던 윌리엄은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와 운명의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1066년). 전쟁에서 승리한 윌리엄은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세우고 정복왕 윌리엄(1066~1087년 재위)이 되어 잉글랜드를 통치하였습니다. 윌리엄의 이야기는 캉의 생테티엔 성당 편에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노르만 왕조 이전부터 이미 참회왕 에드워드에 의해서 영국에는 노르망디의 로마네스크 건축이 수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완성의 단계에 들어선 시기였으므로, 영국은 사실상 초기 로마네스크 시기를 거치지 않은 셈입니다. 에드워드는 그의 재위 20여 년 동안 노르망디 쥐미에주의 노트르담 수도원 성당을 본으로 삼아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성당 등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대륙으로부터의 본격적인 수입은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를 세운 이후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봉건체제를 도입하여 정치적 안정을 취하였으며, 자신이 지은 캉의 생테티엔과 삼위일체 성당으로부터 전성기의 노르망디 로마네스크를 수입하여 문화적 부흥을 꾀하였습니다. 이때 윌리엄의 옆에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출신의 건축적 감각을 지닌 신학자이자 왕의 조언자인 란프랑쿠스(1005~1089년)가 있었습니다. 법관이었던 그는 노르망디에 와서 베크의 베네딕토회 수사가 되었고, 신학자로서 구이트문두스와 함께 실체변화설을 정리한, 명망 높은 수도자였습니다. 윌리엄은 그를 생테티엔 수도원의 초대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고(1063년), 영국 정복 후에는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1070년). 건축신학자 란프랑쿠스가 노르망디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캔터베리에 주교좌성당을 지은 이야기는 다음 회에 들려드리겠습니다.

 

[2020년 6월 14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수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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