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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한국 가톨릭 미술 원로 여성 작가들: 해농 백남순 요안나 - 한국 가톨릭 첫 여성 교회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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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9-09 ㅣ No.668

[한국 가톨릭 미술 원로 여성 작가들] 해농 백남순 요안나(1904-1994) (상)


한국 가톨릭 첫 여성 교회 미술가… 프랑스 유학 첫 한국 여성 화가

 

 

백남순 화백이 1983년 미국에서 그린 ‘예수 탄생’ 유화 작품.

 

 

올여름 방학을 맞아 프랑스와 독일에 다녀왔다. 여행의 주요 목적은 스테인드글라스 관련 전시와 작가ㆍ기업 탐방이었지만 마지막 행선지인 파리에서 오랜만에 주요 미술관의 전시를 둘러보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었지만, 필자는 그 중 조르주 퐁피두 센터와 오르세 미술관의 특별전을 선택해 방문했다. 두 미술관의 특별전이 모두 여성 작가를 재조명하고 있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파리에서 동시에 여성 작가 재조명전

 

퐁피두 미술관의 특별전으로 개최된 도라 마르(Dora Maar, 1907~1997)전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연인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한 전시였다. 피카소의 여러 연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천재적인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의 폭넓은 예술세계를 살펴볼 좋은 기회였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있었던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전 역시 인상주의 화가 중 유일하게 여성 화가였던 모리조의 작품을 한층 넓은 스펙트럼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프랑스 파리의 주요 미술관에서 동시에 여성 작가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정치ㆍ사회ㆍ문화계에 일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 미술가로 살아남기에 절대 녹록지 않았던 시대의 작가들을 다룬 위의 두 전시가 같은 여성인 필자의 마음에 더욱 깊게 와 닿았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 1931~2017)은 1971년 1월 아트뉴스(ARTnews)지에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미술계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그는 가부장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교육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탄생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남녀가 평등하게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현재도 이른바 위대한 여성 작가들의 비율은 남성 작가들보다 턱없이 낮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회화, 조각 등 순수미술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를 살펴봐도 여성작가들은 손에 꼽을 만큼 소수만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가톨릭 미술계 여성 작가들의 활약상은 주목할 만하다. 2017년 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사업으로 진행했던 한국 가톨릭 미술 원로작가 동영상 기록 작업을 진행하면서 회화ㆍ조각ㆍ공예 분야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가톨릭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전혀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작업의 끈을 놓지 않고 작가로서 삶을 이어온 가톨릭 미술계의 여성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재평가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분씩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백남순 화백과 임용련 화백의 약혼 당시 모습.

 

 

1930년 한국 최초 부부 서양화가 작품전

 

처음으로 소개할 작가는 해농(海) 백남순(白南舜, 요안나, 1904~1994) 화백이다. 백남순 화백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羅蕙錫, 1896~1948)과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화가이다. 백 화백은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21년 숙명여자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서양학과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중퇴해 서울로 돌아와 서울 중림동약현본당에서 운영하던 가명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25∼27년 조선미술전람에 풍경과 정물을 그린 유화를 출품해 입선을 거듭한 백 화백은 1928년에 파리 미술연구소로 유학을 떠나 1929년 르 살롱(Le Salon: 프랑스미술가협회 주관)과 야수파 계열의 살롱 데 튀를리(Salon des Tuileries) 등에 출품해 입선했다. 당시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에는 백 화백의 유학 소식과 프랑스에서의 활동상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어 당시 우리 교회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 화백은 프랑스 체류 중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등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윈체스터 장학금으로 유럽 연구여행을 떠나 파리에 잠시 머물렀던 임용련(任用璉)을 만나 인연을 맺고 1930년 4월 파리 근교의 에르블레의 가톨릭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1930년에 함께 서울로 돌아와 동아일보사 전시장에서 한국 최초의 부부 서양화가 귀국 작품전을 열었다. 전시된 작품 수는 모두 82점이며 크로키 20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화 작품이었다.

 

백 화백은 1931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미술과 영어 교사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이주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사립학교로 여러 인재를 양성해냈다.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이 아끼던 제자 중에는 이중섭 화백도 있었다. 백남순 화백은 남편 임용련과 함께 1934년 파리와 미국 유학의 선배였던 이종우(李鐘禹), 장발(張勃), 김용준(金瑢俊), 길진섭(吉鎭燮), 구본웅(具本雄)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최초의 본격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牧日會)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목일회가 해체되고 1937년 목시회가 결성됐을 때도 동참해 작품전을 함께 가졌다.

 

 

해방 이전 작품은 피란길에 대부분 분실

 

백 화백은 해방될 때까지 평북 정주에서 많은 작품이 남겼지만 애석하게도 급히 38선을 넘어야 했던 피란길에 모든 작품을 분실했다. 당시 백남순, 임용련 부부 화가는 모든 그림을 캔버스에서 잘라 둘둘 말아 친분이 두터웠던 정주의 기차역장에게 맡기고 다시 찾으러 가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전쟁 중에 임용련은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북송되었고 1ㆍ4 후퇴 때 사살됐다. 이후 홀로 일곱 명의 자식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던 백 화백은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붓을 꺾었던 그는 말년에 작품 활동을 재개해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주제로 다룬 작품들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남순 화백의 작품은 대부분 피난 때 분실되어 아쉽게도 당시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다행히 백 화백이 1936년 친구의 결혼 선물로 제작한 8폭 병풍의 풍경화 ‘낙원’이 남아 있어 당시 백 화백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9월 8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 해농 백남순 요안나(1904~1994) (하)


8폭 병풍 ‘낙원’, 동서양 화풍 넘나들며 몽환적 이상향 표현

 

 

- 백남순 작 ‘낙원’, 166×366㎝, 병풍 위 캔버스에 유채, 1937년.

 

 

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우리나라 근대미술 작품 가운데 종교 주제를 다룬 작가들에 대해 관심을 두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한국 가톨릭 미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할 무렵부터 여러 자료를 찾아 모으던 중 임용련 화백의 ‘십자가의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지면상으로 접하고 임 화백과 그의 아내 백남순 화백이 남긴 종교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낙원, 해방 이전 작품으로는 유일한 실물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임용련ㆍ백남순 화백이지만 이 부부 화가가 남긴 자료, 특히 백남순 화백이 미국으로 건너간 후 남긴 작품들에 대한 정보는 미미해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는 유족 임대웅 박사를 만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들을 함께 보며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다.

 

임대웅 박사는 임용련ㆍ백남순 부부 화백의 막내아들로 비뇨기과 의사로 활동하다 은퇴하고 현재 백 화백의 남아 있는 작품들을 알리고 재평가하는 일에 노력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 생전에 전시를 열어드리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며 2013년 11월 SYK 한미 커뮤니티센터에서 ‘해농 백남순 회고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백 화백이 미국에 거주하던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이처럼 1980년대부터 화업을 재개하면서 남긴 작품들은 다행히 여럿 남아 있어 그의 말년 화풍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남순 화백이 해방 이전에 제작한 작품으로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1936년 작 ‘낙원’이 유일하다. 해방 직후 평안북도 정주에 모든 작품을 남겨두고 급히 월남했던 탓에 그 밖의 많은 작품은 선전 도록에 실린 몇 점의 작품 외에는 실물은 물론 사진 자료도 확인할 길이 없다. 백 화백의 대표작 ‘낙원’은 가톨릭 신자로 신앙심이 깊은 백 화백이 가명보통학교에 교사로 있을 때 함께 재직한 동료 교사 민영순에게 결혼 선물로 그려준 8폭 병풍이다.

 

1981년 민영순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세상으로 나온 ‘낙원’은 생동감 있는 색채와 자유로운 필치, 구축(構築)적인 구성 등 백남순 화백의 특징이 집결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국내 미술계에서 거의 잊혔던 그의 존재를 되살려냈다. 현재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2016년 병인년 순교 150주년 기념 한국 가톨릭 성미술 재조명전에 출품되어 소개된 바 있다.

 

- 백남순 작 ‘영광’, 60.5×91㎝, 패널에 아크릴릭, 유채, 1987년.

 

 

원죄 짓기 이전 천국을 한국적으로 해석

 

700호 크기의 이 작품은 동양화법과 서양화법이 특이하게 결합한 작품이다. 화면 왼쪽과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호수를 끼고 기묘한 고산준령이 전통화법에 따라 그려지고 화면 오른쪽 폭포를 비롯해 암벽 곳곳에는 전통식 정자와 누각이 자리하고 있다. 화면 중앙과 아래쪽으로 호수를 끼고 서양식 건물이 등장하고 곳곳에 전라 또는 반라의 남녀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낙원’은 자연, 건축물, 인물 등의 요소들이 동서양 화풍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몽환적인 이상향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백남순의 ‘낙원’은 서양화풍으로 이루어진 ‘몽유도원도’를 마주한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서양화 작품이 8폭 병풍으로 묶였다는 점도 특색 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낙원’이 동서양의 회화 형식을 합치시키려 한 창조 의식의 산물이며, 특히 인류가 원죄를 짓기 이전 천국을 한국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전통을 지키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백남순 화백은 남편 임용련이 납북된 후 성심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일곱 자녀를 홀로 키우며 오랫동안 그림 그리는 일을 중단했다. 이웃조차 그가 화가인지 모를 정도로 긴 은둔의 시간을 보낸 백 화백은 1980년대에 들어 다시 화필을 잡았다. 당시 80대에 접어든 백 화백은 노령에도 붓을 놓지 않고 정물화, 추상화, 종교화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당시 그의 작품은 1930년대 젊은 시절의 꿈을 재확인하는 과정으로 해석되는데 화려한 색채에 섬세한 감성을 담은 온화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이 시기에 그린 종교 회화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백남순의 신앙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한 알의 밀알’(1983), ‘영광’(1987), ‘순교의 십자가’, ‘예수 탄생’ 등 그리스도교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중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광’은 백 화백이 90세가 다 된 시기에 그린 종교적 메시지의 추상화로 과감한 색채의 대비가 강조된 강렬함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고 장발 화백도 이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백남순 작 ‘한 알의 밀알’, 90×90㎝, 1983년.

 

 

1980년대 들어 신앙심 깊은 작품 다시 그려

 

‘영광’은 삼원색과 검정, 흰색으로 이루어진 화면 구성으로 우리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검은색 배경에 흰색 원을 중심으로 큰 굴곡을 그리며 화면 왼편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붉은색, 노란색의 곡선들은 강렬한 태양을 연상시키며 빛을 발하고 있다. 힘 있게 뻗어 나가는 붓 터치에서는 그 어떠한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 중심에서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듯 그려진 선들은 화면에 움직임을 더해주고 있고, 빛의 입자들이 흩어지듯이 투명하게 그려진 선이 오른편 하단의 푸른색 면과 만나는 장면은 빛이 이 세상에 침투하여 맞닿는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영광’은 강렬함과 온화함,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적절히 융화된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백 화백은 생전에 ‘영광’에 관해 “아주 강한 신비의 힘이 성심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유족은 전했다. 그리고 백 화백의 깊은 신앙심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이 작품을 그의 묘비석에 새겼다고 한다.

 

6ㆍ25 전쟁 당시 부산 피란 시절에 백남순 화백을 만났던 서울대교구 김수창 신부는 “동대신동 판자촌에서 지낼 때 소래신동본당 신자였던 백남순은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기품 있고 자상하고 인자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을 떠났던 여류화가, 최초의 여성 가톨릭 미술가. 최초의 부부 화가전을 열었던 화가 등 백남순 화백의 이름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다니곤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ㆍ25 전쟁, 남편 임용련 화백의 납북, 은둔의 삶 등 굴곡이 많은 삶을 살기도 했다. 백남순 화백은 이러한 자신의 삶의 여정을 만년의 작업, 특히 종교 주제의 작업들로 승화시켰던 것 같다.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백남순 화백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고 재평가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9월 22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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