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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행복을 찾아서: 겸손 - 낮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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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7 ㅣ No.948

[행복을 찾아서 – 겸손] 낮은 자리

 

 

“높은 자리에 오르면, 남을 거느릴 것도 생각나고, 원수를 잡아들여 보복할 것도 생각나고, 나를 두려워하며 아첨하는 자들이 나를 기쁘게 할 것도 생각나고, (내가) 어떤 사람을 땅에 내칠 수도, 어떤 사람을 하늘 위로 끌어올려 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나고, 불쌍한 사람이 하소연하면 그들을 도와줄 것도 생각나고, 도움받은 이들이 나를 칭송하고 좋아할 것도 생각나고, 그러면 (칭송을) 겉으로 사양하는 척할 것도 생각나는 것이다”(판토하, 「칠극」 참조).

 

 

교만한 현대인

 

교만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맹위를 떨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도한 느낌, 자신이 이룬 성취나 재능에 대한 과장, 우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성공과 권력, 명성에 대한 끝없는 갈구, 과다한 존경과 특혜 요구, 타인을 지속해서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경향 등이다.

 

오만하고 교만한 행동은 사회 지도층에게서 흔히 관찰된다. 그래서 약간의 오만함은 마치 유능한 지도자의 어쩔 수 없는 덕목으로 눈감아 주는 일도 있다. 사실 병적인 교만함과 건강한 긍지를 구분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귀엽게’ 볼 수 없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으로 가득한 성품을 정신의학적으로 말하면 자기애적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은 온통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화려하고 멋진 젊은 시절을 추구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선망한다. 내가 잘났으니 자신의 주변도 최고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 최고의 친구를, 가장 멋진 연인을, 가장 보기 좋은 일자리를 찾는다.

 

 

도덕적 교만

 

속물적인 가치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우월성이나 윤리적 결벽도 자기애적 성격의 ‘증상’이다. 엄격한 기준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지만, 이는 남보다 우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매도한다. 관용과 이해는 없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냉정한 평가절하를 마치 자신의 높은 윤리성에 대한 증거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교만이 죄 중의 죄, 죄의 여왕이라고 했고, 16세기 영국의 성직자 헨리 스미스는 모든 죄의 으뜸이 교만이라고 했다. 교만한 사람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느낌과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을 점점 자신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종종 주변을 잘 돕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내가 이렇게 똑똑한 데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라는 왜곡된 오만함으로 가득하다.

 

 

정직한 겸손

 

인간의 성격을 나누는 몇 가지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겸손과 정직이다. 이 둘은 뜻이 다르지만, 사실상 비슷한 가치를 말한다. 정직하면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나 겸손한데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은 별로 없다. 가식을 싫어하고 공정을 추구하며 사치와 향락을 꺼리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다.

 

지난날에는 인간의 기본적 성격을 다섯 가지 요인으로 나누기도 했다. 외향성, 순응성, 성실성, 신경성, 개방성이다. 이러한 요인의 상대적인 조합으로 한 사람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대규모 연구를 통해서 여섯 번째 요인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로 겸손과 정직이다. 마치 그 이름처럼 다른 성격 요인에 묻혀 자신을 숨겼던 성격 요인이다.

 

겸손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적 덕목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태도가 군자의 조건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겸손의 가치는 급락하고 있다. 신속하고 명확한 자기과시가 겸양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겸손의 가치가 너무 ‘겸손’해져 버린 세상이다. 모두 자신을 자랑하기에 힘쓴다. 돈과 지위를 드러내는 사람이나 청빈과 소박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전제되었다면, 두 가지 모두 정직한 태도는 아니다. 억지로 높은 위치에 올라 타인을 내려다보려고 한다. 높은 자리는 늘 북적이는데 낮은 자리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겸손한 나를 위해서 

 

미국의 정신 분석가 하인즈 코헛은 자기애적 소망이 깨지는 고통의 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애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 고통의 순간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그 불편한 순간을 감내하지 못하고, 당장 자신의 허약한 마음을 위로해 줄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선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거짓된 자기를 만들어 낸다. 과장된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속인다. 부풀려진 자기상을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 숨으려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다른 덕목과 달리 독특한 특징이 있다. 말 그대로 ‘겸손’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칭찬해 주기도 어렵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요.’라는 주장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니 칭찬할 수도, ‘올해의 겸손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상을 줄 수도 없다. 양보하기 시합에서 모두를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겸손한 사람이라면 이런 글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겸손의 미덕을 공개적으로 떠드는 글을 쓰고 있지만, 이야말로 정말 교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은 나서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자리는 피하고 은밀하게 양보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하다.’라는 사회적 평판을 날름 빼앗아 간다.

 

겸손이라는 가치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주변에서 정말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을 만나서 기쁜 마음이 든다면, 드러나지 않게 도와주어야 한다. 워낙 드러나기 싫어하는 사람이니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상을 주는 것은 무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본인도 모르게, 뒤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스스로 드러내고 자신을 알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현대 사회다. 허세와 교만, 자기 자랑과 오만으로 넘실댄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도 보석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다. 낮은 자리를 자처한 겸손한 이들이야말로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스스로 겸손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게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로 지내며, 서울대학교 비교무화연구소에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성안드레아병원에서 일했다.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글 박한선 ·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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