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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활동 경로(중국 동북지역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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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4 ㅣ No.1842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활동 경로(중국 동북지역 편) - 제1부

 

 

중국의 성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중국을 통하여 각종 정보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상해나 마카오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나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소개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아 2회에 걸쳐 관련 성지순례기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이 순례 코스의 설명은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오기까지 한국의 밀사와 사신들, 그리고 초기 외국 선교사 입국 경로이며 많은 신앙 선조들이 중국을 드나들던 길을 따라간다. 우리나라 북쪽 끝 의주를 지나 중국의 북경까지 산재한 성지들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중국 양관쇄강(兩關鎖江)

 

소설 『차쿠의 아침』에 최양업 신부님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 장면을 그린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사실을, 동행한 『차쿠의 아침』 작가 청주교구 이태종(사도 요한) 신부께서 설명한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 사선을 넘나드시며 강을 넘었던 최양업 사제의 애절한 심정과 죽음을 무릅쓰고 조력자로 위기 순간을 도와주었던 인물의 실존 여부를 떠나, 그 자리에 성모님과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강 건너 북한 땅은 강폭이 그리 넓지 않으면서 한강의 난지도처럼 중간에 섬이 있어,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하얀 광목을 뒤집어쓰면 옆에서도 사람 식별이 어렵다.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수많은 밀사들과 선교사들이 넘나들던 의주 땅과 만주(중국) 땅이 구분되는 압록강 국경 지대이다. 당시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신학생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에도 이곳을 거쳐 구련성, 봉황성 변문을 지나 심양, 마가자, 서만자, 북경, 태원을 거쳐 5000리 길을 지나서 마카오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36년 초,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 후동(后洞)의 모방 신부 댁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해 12월 3일(음력 10월 25일)에 모방 신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신학생으로서 선서를 하였다. 조선 신학생들은 이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함께 조선 밀사(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이광렬 요한 등)들의 안내를 받아 중국의 국경 관문인 봉황성의 책문(柵門)으로 떠났다. 이에 앞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샤스탕(Chastan, 鄭牙各佰) 신부는 약속대로 12월 25일에 이미 책문에 도착하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신학생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샤스탕 신부가 정해준 2명의 중국 안내원들을 따라 심양을 거쳐 적봉, 마가자, 서만자, 장가구를 지나 만리장성에 도달하게 된다. 이후 북경을 지나 중국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하여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거쳐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7개월 4일 만으로 5000km가 훨씬 넘는 대장정이었다.

 

 

구련성(九連城)

 

단동 시내를 기준으로 약 15km 북상하면 구련성(九連城) 터가 있다. 양관쇄강 표지석에서 옛길을 따라 직선거리로는 멀지 않은 곳이나 포장된 길을 따라 단동을 거쳐 구련성으로 간다. 명·청 때에는 국경을 건널 때 양국 사절이 꼭 거쳐야 하는 조선과의 통상 요지였다. 그곳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마을 한가운데 조그만 구멍가게 앞 모퉁이에 세워진 ‘구련성 고성지’라는 표지석 하나뿐이다. 표지석 옆 골목길을 따라 약 700~800m 쯤 가면 커브길 왼쪽 편, 낮은 둑 넘어 군부대 건물이 들어서 있는 넓은 공터가 전부 성터였다고 한다. 구련성이 우리 천주교회사에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이 바로 조선을 빠져나온 밀사들과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간 주요 루트이기 때문이다. 또한 압록강을 건너 변문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성으로, 주로 하룻밤 쉬어가는 유숙지로,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경우 야영지로 알려진 성터이다.

 

 

봉황성(鳳凰城), 변문(邊門), 책문(柵門), 고려문(高麗門)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된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3일 귀국길에 오른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조선 밀사 교우 안내원들을 따라 의주 변문으로 향했다.

 

변문(邊門)은 조선의 국경도시인 평안북도 의주로부터 48km 떨어진 지점 구련성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가 있어 의주 관리들이 파견돼 상주하던 곳이었다.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관문이다. 목책을 둘러쳐서 경계를 삼았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고려문(高麗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서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1836년 성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1837년 1월 성 샤스탕 신부, 그리고 그해 12월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방갓 차림으로 변장한 뒤 조선을 향했던 곳이다.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도 이곳을 향하는 꿈을 늘 가슴에 간직했던 곳이며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이곳을 통해 마카오로 간 장소이다.

 

1844년 12월 김대건이 부제품을 받은 직후 페레올(Ferréol, 高)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소팔가자를 떠나 봉황성 변문으로 향했다. 12월 말 변문에 도착한 그들은 1845년 1월 1일 이곳에 이미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포교지 조선에 들어간다는 기대를 가졌지만 조선 국경인 의주 변문 쪽 경비가 삼엄해 입국이 불가능해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했다. 신자들을 따라 의주 변문 근처에 온 김대건 부제는 어렵게 국경을 통과한 후 다시 신자들을 만나 평양을 거쳐 1월 15일 한양 돌우물골(石井洞)에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집에 도착했다. 한양을 떠난 지 9년 만이었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120리를 더 들어가야 중국의 국경선인 책문(柵門)이다. 압록강으로부터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완충지대였다. 단동역에서 옛 책문 터인 일면산(一面山)역까진 기찻길로 45km.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도로, 두 번째 철길 건널목 옆에서 ‘변문진’의 표석을 볼 수 있다. 변문 마을은 지금도 국경 요충지인 데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요 시설인 무기고가 있다고 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일부 신자들은 이 표지석 하나가 성지냐고 반문한다. 잘 조성된 우리나라의 성지를 구경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면 그저 보이는 것이 다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지를 바라볼 때 마음의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낄 때, 비로소 성지순례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1월 샤스탕 신부, 그리고 그해 12월 앵베르 주교가 방갓 차림으로 변장한 뒤” 이곳을 넘었다. 체격이 큰 외국인이 거추장스런 상복에 방갓 차림이라면 얼마나 불편했을지? 그리고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검문소 옆 개천(개구멍)을 통해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외국인 성직자가, 발각될까 염려되어 개구멍 통과라니? 마음의 눈으로 그 광경을 그려보고, 가슴으로 그분들의 당시 심정을 느껴보자. 그러면 “도대체 하느님이 누구이시길래?” 하는 물음이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심양을 지나 적봉(赤峰)을 거치게 되는데 적봉 또한 내몽골 자치구의 직할시로, 적봉 주교좌성당은 1932년에 설립되었는데,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본당이 52개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은 규모였다.

 

 

마가자(馬架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곳

 

중국 교우촌인 마가자는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1835년 10월 20일에 병사한 곳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선교거점이었다. 마가자는 적봉시에서 고속도로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이나 도로공사가 빈번하여 우회할 경우 세 시간을 돌아서 가야 하는 곳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마가자 천주당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성당을 감싸고 돌아가면 5분 거리에 바로 성직자 묘지에 있다. 프랑스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중국 내륙을 거쳐 조선 땅으로 부임하던 중 1835년 병사했다.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즉 펠리구(哵唎溝, Pie-li-Ko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지금의 중국 내몽골 지역)의 한 교우 촌에서 눈을 감고 만다.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모방 신부가 장례미사 후 고인의 유해를 마가자 현지에 안장했고, 묘소 앞에 묘비를 세웠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이장됐으나, 묘비는 마가자 현지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가 1960년대 후반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서양과 관련된 것들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내몽골 자치구에서 선종(善終) 170년 만에 발견되었다. 묘비에는 ‘首鐸 蘇公之墓 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수탁 소공지묘 도광 십오년 팔월이십구일립)’이라고 쓰여 있는데, 수탁(首鐸)은 초대 조선교구장을, 소공지묘(蘇公之墓)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뜻한다. 모방 신부는 1835년 11월 서한에서 “주교님의 무덤 위에는 주교님의 한자 성(姓)인 소(蘇)자가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적었다. 또한 도광(道光)은 청(淸) 나라 선종의 연호로, 도광 15년은 1835년이다. 따라서 묘비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일인 1835년 음력 8월 29일(양력 10월 20일)에 묘비가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때와 일치한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이 조선을 빠져나와 마카오로 어떻게 갔을지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으로 가셨던 길의 역방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만자(西灣子, 원어명 [Sivang])

 

장가구에서 적봉까지 보통 9~10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도로공사가 진행 중일 때는 기약이 없다. 다음 동계 올림픽대회가 중국 북경에서 열린다. 북경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활강경기장이 만들어지고 있어 배경으로 보이는 높은 산에 공사가 한창이다.

 

서만자 성당 및 주변 모습.

 

 

서만자는 중국 내몽고(內蒙古)에 있는 마을.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고을에는 일찍이 프랑스 계통의 라자리스트(Lazaristae)회가 진출하여 전교함으로써 주민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는 선교사와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이곳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에 앞서, 1834년 10월 이곳에서 모방 신부를 만난 후 조선으로 향하던 중 펠리쿠에서 선종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도 조선 입국에 앞서 1837년에 이곳에 들러 조선 교우와의 연락을 취한 뒤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페레올 신부도 1840년에 여러 차례 이곳에 들러, 앞서 이곳을 경유하여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의 서신을 받은 바 있으며, 1842년에야 조선 교우들과의 연락이 이루어져 기해(己亥) 대박해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서만자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에서 3대 교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직자가 이곳에서 조선교회와 연락을 취한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장가구를 거쳐 북경의 관문인 만리장성으로 가게 된다. 장가구 또한 교회사에 가끔 등장하는 도시 중 하나이나 지금은 심양이나 적봉처럼 숙소나 식당을 이용하는 도시로 특별히 순례할 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평신도, 2019년 가을(계간 65호), 김창환 바르톨로메오(서울대교구 청구본당)]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활동 경로(중국 동북지역 편) - 제2부

 

 

지난 호에는 중국 접경지대부터 서만자에 이르는 경로를 살펴보았다. 제2부에서는 만리장성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요녕성, 길림성에 걸치는 경로를 두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만리장성

 

브뤼기에르 주교의 설명대로 서만자 성당을 지나 장가구(張家口)를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만리장성이다. 이곳은 몽골족이 쳐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는 북경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평야 지대 그리고 산맥들 사이의 협곡들에서 이 성벽은 높이가 10~12m로서 방어용 요철을 갖춘 큰 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산맥 위로 올라가면 이 성벽의 높이는 3m 정도 됐다. 산맥 위의 성벽은 각 면 보루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은 언덕들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인접해 있는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성벽은 중국과 달단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다. 따라서 남쪽에 있는 산비탈은 중국에 속하며, 북쪽의 것은 달단에 속한다. 나는 장가구라고 부르는 문으로 이 성벽을 통과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갈 때 바로 이곳을 통과한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고용했던 사람들은 아마 나와 내 뒤에 올 사람들이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를 모르는 척했다. 만약 감시가 엄격했더라면 산맥을 넘거나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좁은 길을 통해 만리장성을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길 코스인 의주에서 북경까지를 살펴보았다. 이후 마카오로 건너간 두 신학생은 아편전쟁 도중 필리핀 롤롬보이로 피신하여 잠시 머문다. 다시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이동하여 신학수업을 계속하며 부제품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행적은 중국 요동반도 남단 지역과 관련이 있다.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太莊河)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이수하고, 신학 과정에 입문한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은 1842년 2월 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남경조약 체결 현장까지 참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842년 10월 22일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 해안에 도착한다. 10월 25일 백가점(白家店, 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차쿠성당 인근) 교우촌의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하였다. 백가점은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이다. 최양업은 11월 3일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등과 헤어진 후 만주 선교사 드 브뤼니에르(de Bruniere) 신부와 함께 요동반도 북단에 있는 개주(蓋州) 부근의 양관(陽關) 교우촌을 거쳐 페레올 주교가 있는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김대건은 백가점에 머물면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신학을 계속 배우며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해박해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매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려 했으나 연락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조차도 무모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대건이 조선 변문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1842년 12월 23일 김대건은 중국 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을 출발하여 4일 후 의주 변문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건은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끼어 있던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교회 사정을 자세히 들었는데 자신을 신학교에 보낸 모방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 3명이 모두 순교했고, 동료 최양업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도 순교했으며 어머니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자신이 직접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2월 하순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만주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옮겨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 차쿠 성당과 대형초상화를 설치한 차구 성당 제대(우).

 

 

요동반도 남단 차쿠(백가점, 용화산)

 

요동반도 남쪽 장하 시에서 북쪽 70리 거리에 위치한 차쿠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국 요동 지역 사적지이다. 차쿠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은 용화산이라 부르고 있다. 베롤 주교는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차쿠 성당을 건립하였다.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동일한 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사방이 눈으로 덮이면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천산산맥의 끝 부분에 속해 있는 높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위치에 대해 조선 선교사들은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 영광의 산, 남쪽으로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鷄冠山)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70년 리델 주교가 차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현재의 위치는 옛 성당 자리가 아니다. 이곳은 요동지역에서도 조선과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첫 사목지인 이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지금의 용화산 성당)은 1867년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박해로 입국하지 못한 채 이 성당에 거주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이곳에 머무르며 재입국을 모색하였다. 1869년 베롤(E. J. F. Verolles, 方)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자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개주시 나가점, 양관

 

양관은 현재 요녕성의 개주시 남동쪽 40~50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나가점’(羅家店)이라고 불리는 가구 수 50여 호의 한적한 농촌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 주교는 1840년 양관에 부임하여 아름다운 주교좌 성당(본당 주보는 ‘성 후베르토’)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의 신자 수는 180명이었다. 이때부터 양관 성당은 만주 남쪽의 전교 중심지가 되었다. 1842년 10월 김대건과 최양업,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1843년 12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이곳에서 있었으며,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이나 조선 선교사들은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이곳에 들렀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신부도 만주 선교사로 있을 당시 이 성당에 거처하면서 사목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요동으로 건너와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의 보좌 신부로 양관에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저는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만주 대목구장 직무 대행을 맡고 있는 베르뇌 신부님의 명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에는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해 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869년 조선 선교사들이 베롤 주교에게 요동 일부의 사목 재치권을 이관받게 되면서 양관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 소팔가자 성당 가는 길의 김대건로.

 

 

지금 양관 성당의 옛 터는 마을 뒤편에 있으며,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6칸)과 옛 성당의 주황색 벽돌담만이 남아 있다. 베롤 주교가 지은 처음의 성당은 문화 혁명(1966~1976년) 때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 성당은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 오른쪽 첫째 칸에 마련되어 있다. 성당이라기보다 시골 공소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평소에 문이 잠겨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며 우리 한국 신앙 선조들이 떠올라 발걸음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소팔가자

 

길림성(吉林省) 장춘시(長春市)에서 약 30㎞ 거리에 있는 소팔가자 마을로 가는 도중 성당 약 10㎞ 이전 지점에 ‘김대건로(金大建路)’라는 표지석이 있다. 소팔가자 성당을 찾는 신자들에게 순례길의 의미를 더하자는 서울대교구 신자들의 정성으로 1999년에 완공되었다. 중국 당국은 도로 등에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으나 이 경우는 특별히 허락하였고 정부 측에서도 도로 공사비용 일부를 지원하여 김대건로의 완공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 상호교류의 시작점이 되었다. 1796년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소팔가자는 1838년 요동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했다. 만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 주교가 1841년 소팔가자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 뒤쪽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성역화 추진위가 지난 1998년 건립한 고(故) 김세중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의 작품이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갓과 두루마기 차림으로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앞을 향하고 있으며 방향을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동상 뒤쪽 김대건 신부가 거처했던 장소에 5층짜리 피정(순례자)의 집이 있다.

 

- 소팔가자 성당과 소팔가자 성당 김대건 경당(우).

 

 

소팔가자는 장춘 서북쪽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촌이다. 1843년 1월 6일 김대건은 1843년 3월 백가점에서 소팔가자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1843년 초 페레올 주교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받아 제3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31일 개주의 양관에서 만주 대목구장 베롤 주교 집전으로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1844년 1월 14일 최양업은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를 계속하고 1월 말 페레올 주교도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4월에 조선의 동북쪽 입국에 실패한 김대건도 훈춘(琿春)에서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4∼12월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로부터 제 1∼5품까지 받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곳에서 함께 부제로 서품되었다. 1845년 상해로 건너간 김대건은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10월 1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충청도 황산포 나바위를 거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반면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한 두 번째 탐색 여행을 위해 훈춘으로 갔다.

 

 

마치며

 

김대건, 최양업 두 사제의 발자취를 중국 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2회에 걸쳐 소개하였다. 제2부는 요동반도 남부 쪽에서부터 북경에 이르는 한국 천주교 관련 성지·사적지를 살펴보았다. 추가적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 마카오를 거쳐 사제 서품 장소인 상해, 제주 표착지, 이후 활동 경로 등 살펴볼 곳이 다수 존재한다. 순례길을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보살펴주신 하느님께 찬미, 감사와 흠숭을 드리며 글을 마친다. [평신도, 2019년 겨울(계간 66호), 김창환 바르톨로메오(서울대교구 청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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