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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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붓을 통한 신앙 전파1-3: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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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7-27 ㅣ No.657

[붓을 통한 신앙 전파] 1.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 (상)


전 세계 여행하며 예술로 신앙 전파한 ‘떠돌이 화가’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앙드레 부통 신부는 화가 선교사로서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여러 교회의 벽화를 통해 복음을 선포했다.

 

 

지난 글까지 총 22회에 걸쳐 1954년 성미술 전람회의 출품작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 가톨릭 성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를 되돌아보았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협력해 이루어낸 1954년 전시는 지금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가톨릭 미술의 역사는 1960년대에 들어서 외국 수도회 신부들의 예술 선교 활동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특히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속의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OSB, 1904~1978) 신부와 앙드레 부통(Andr Bouton OSB, 1914~1980) 신부가 남긴 교회 건축과 벽화 작업들은 우리나라 성미술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이정표다.

 

 

한국인의 풍습과 한국 고유의 색채 담아내

 

그중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은 1960년대부터 성 베네딕회 왜관수도원에서 화가로서 예술 선교에 매진했던 프랑스인 신부 앙드레 부통이다. 부통 신부는 1970년대 중반 한국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간 전국 각지의 성당에 벽화를 제작했다. 그가 국내에 남긴 벽화의 수는 현재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지방 공소를 중심으로 20여 점 이상의 벽화가 남아 있어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부통 신부는 벽화 외에 판화, 세라믹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남긴 작품에서 당시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인의 모습과 한국의 풍습, 한국 고유의 색채를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현재 대전교구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 남아 있는 2점의 벽화를 중심으로 현재 소실된 부통 신부의 나머지 벽화들을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니 그의 작품과 예술 선교에 대해 함께 살펴보는 일이 더욱 의미 있을 것 같다. 

 

앙드레 부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2011년 프랑스 위스크의 생 폴 수도원(Abbaye Saint-Paul de Wisques)을 방문해 자료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다. 다행히 위스크수도원에는 그의 생애를 요약한 문서와 이스라엘, 한국, 베트남에서 제작한 벽화에 관련된 스케치와 관련 자료, 컬러 슬라이드 필름 등이 남아 있어 현재 소실되었거나 훼손된 그의 작품 원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부통 신부가 제작한 필사본과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 세라믹 작품, 습작 스케치들 그리고 그의 여행 관련 기록 등을 통해 그의 다양한 작품 활동과 독특한 예술세계의 전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부통 신부는 1914년 4월 26일 프랑스 지엥(Gien)에서 오를레아네즈(Orlanaise)사의 보험사무소를 경영하는 부친 슬하에서 태어났다.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는 고향인 지엥의 생 프랑수아 드 살(Saint-Franois-de-Sales)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를레앙 대신학교(Grand Sminaire d‘Orlans)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튀니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1934년 프랑스 북부의 위스크(Wisques) 대수도원에 입회하여 1936년 6월 29일에 수도 서원을 하고, 1940년 2월 25 쿠르쿠 주교(Mgr Courcoux)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 앙드레 부통 신부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중동 등지를 여행하면서 많은 벽화를 남겼다. 그림은 부통 신부가 그린 예루살렘 성모 승천 대수도원 지하 성당 벽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을 입은 부통 신부는 벨기에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체포됐다가 탈출해 위스크수도원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이후 솔렘(Solesmes)에서 1년간 수감자들에게 전하는 소식지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사온에루아르(Sanes-et-Loire) 지방의 디고안(Digoine)으로 피신해 있던 위스크수도원 수사들과 합류했다. 

 

전쟁이 끝나고 공동체는 위스크에 다시 자리를 잡았지만, 부통 신부는 제3세계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1949년 5월 8일 위스크를 떠나 모로코의 세프루(Sefrou)를 거쳐 알제리의 틀렘센(Tlemsen)에서 독일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수도원 출신 라파엘 발저(Raphael Walzer)의 수도원에 소속되어 지냈다. 이 수도원이 사라지자 몇 해 동안 모로코에 있는 툼리라인(Toumliline)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교회에 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1956년 9월 1일부터 1957년 9월 20일까지 위스크에 돌아와 지내던 부통 신부는 다시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1962~1963년 도미니코회에서 운영하는 예루살렘 성서학교(Ecole Biblique de Jrusalem)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시나이반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팔레스타인의 갈릴래아 호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여러 성당에 벽화를 남겼다.

 

 

예술로 신앙 전파한 ‘하느님을 위한 순례자’

 

부통 신부는 중국, 일본, 한국 등 주로 동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올라프 그라프(Olaf Graf) 신부와의 만남을 인연으로 1964년부터 10여 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전국적으로 벽화 작업을 통한 예술 선교 활동에 매진했다. 한국 체류 기간에 베트남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벽화 작업을 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 일신상의 문제로 일본으로 떠났으나 건강 악화로 짧은 일본 체류를 마치고 1977년 9월 프랑스 위스크수도원으로 복귀했고, 1980년 3월 10일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뒤인 3월 12일 릴(Lille) 시립병원에서 선종했다. 

 

그는 한국 체류 이전에 특별히 미술대학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열두 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도회 입회 후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께 봉사하는 데 쓰겠다는 소명을 지니고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예술가가 되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닐 것’이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결심대로 프랑스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예술을 통한 신앙 전파에 힘썼다. 스스로를 ‘떠돌이 화가’라고 하면서 베네딕도회의 역사에 등장하는 ‘하느님을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pter Christum ; Peregrinari pro Deo)’의 예를 언급하면서, 베네딕도회의 정주(定住)의 규칙을 어겼지만, 이 역시 하느님을 위한 봉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7월 28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붓을 통한 신앙 전파] 2.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 (중)


붉은 색 도포 입은 예수 그리스도… 성화의 토착화 추구

 

 

부통 신부는 프랑스 야수주의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림은 부통 신부가 안동교구 청송성당 제대 벽에 그린 ‘그리스도 왕’ 벽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앙드레 부통(Andr Bouton OSB, 1914~1980) 신부의 한국 체류는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벽화 작업을 하던 그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올라프 그라프 신부와 만나면서 한국에서의 예술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주로 아시아 국가의 선교를 담당했던 올라프 신부는 예루살렘 성모승천대수도원 지하성당에 전시되어 있던 부통 신부의 그림과 동판화 작업을 보고 그림을 통한 선교를 펼쳐 달라고 부탁하며 그를 한국으로 초대했다. 이를 계기로 부통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머물며 10여 년간 전국의 성당, 수도원, 학교, 병원 등에 벽화를 제작했다.

 

 

그림값 받지 않고 춤추듯 빠르게 그려

 

부통 신부가 한국에 온 1960년대는 한국에 진출해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1952년 왜관으로 이전하여 새로이 수도원을 건립하고 국내 교회 건축 및 교회 미술 분야에서 활약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벽화 작업은 같은 시기 왜관수도원의 알빈 슈미트 신부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교회 건축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그는 해마다 1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에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벽화는 부통 신부가 한국 교회에 남긴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부통 신부의 벽화 제작 과정을 본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본당 신부의 요청이 있을 때에 식사와 믹스커피만 대접받고 그림을 그렸으며 별도의 그림값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부통 신부의 벽화 제작을 지켜봤던 이들은 그가 ‘마치 춤을 추듯이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쉽게 그림을 그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통 신부가 한국에 남긴 대표적인 벽화 작품으로는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의 벽화 10점(현재 두 점만 남아 있음)과 청송성당의 벽화(현재 소실), 서울 프란치스코회 경당의 벽화(현재 소실)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다수가 지워지거나 성당 신축으로 소멸됐고, 왜관ㆍ상주ㆍ성주 지역 약 20여 곳의 성당과 공소에 작품이 남아 있다. 다행히 프랑스 위스크수도원에 보관된 그의 유품 중에는 한국에서 제작한 벽화의 제작 과정과 완성작이 담긴 사진과 컬러 슬라이드 필름이 간단한 메모와 함께 보관되어 있어 현재 소실된 벽화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앙드레 부통 신부는 성화의 토착화를 추구했다. 그는 벽화를 제작할 때 각 나라의 풍광과 현지인들의 모습을 그려 넣어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유도하고자 노력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벽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인의 모습이 모두 그의 해석에 따른 한국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울러 그는 교복 입은 학생들, 짧은 단발머리에 한복 차림을 한 어린 소녀들을 배경에 함께 등장시키거나 인근의 풍경을 작게 그려 넣어 성화에 현장감을 더하고자 했다. 

 

현재 소실되었지만, 청송성당의 예수상과 가톨릭대학교 병원 성주분원 진료실의 ‘한복을 입은 아폴린 성녀상’ 등 앙드레 부통 신부가 남긴 벽화 곳곳에서 한국적인 표현으로 완성된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 가톨릭대학교 병원 성주분원 진료실에 그린 부통 신부의 ‘한복을 입은 아폴린 성녀상’.

 

 

생동감 있고 강렬한 색채 주로 사용

 

부통 신부는 1966년 6월 7일에 축성된 청송성당 제대 벽과 창쪽 벽에 벽화를 그렸다. 성당 신축으로 소실됐지만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통해 제대 쪽 벽에 한복을 입고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으로 표현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한 벽화를 확인할 수 있다. 

 

벽화 정중앙에 자리 잡은 예수 그리스도는 검은 머리카락에 한국인의 이목구비를 하고 붉은색 도포와 전통 신발을 신고 오색의 산을 밟고 있다. 도포 흉배(胸背)에는 한자로 王中王(왕중왕)이 세로로 쓰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손에 펼쳐 든 성경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라는 말씀을 한글로 적어 넣었다. 한글과 한자를 이용한 성경 메시지는 벽화 양옆과 하단의 가장자리에도 적혀 있다. 제대를 향하고 선 방향에서 왼쪽에는 한자로 정의(正義), 자비(慈悲), 진리(眞理), 평화(平和)가 위에서 아래로 한 단어씩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天主의從(천주의 종), 主의羔羊(주의고양), 豫言者(예언자), 王中王(왕중왕)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부통 신부의 벽화에는 프랑스의 야수주의를 연상시키는 생동감 있고 강렬한 색채가 주로 등장한다. 그는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각에 따라 과감하게 색을 사용했다. 강렬한 원색을 거침없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보색대비를 이용해 명암을 처리하는 등 파격적인 색채를 구사했다. 모든 성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부통 신부 역시 성경에 기초해 작품 주제를 결정했다. 그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성모님의 일생, 성가정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예수 부활상 주제로 한 벽화 주로 그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교세가 강한 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자신의 벽화에 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부통 신부의 벽화에 등장하는 원색 중심의 강렬한 색채에서 사찰 건축의 단청이나 탱화, 한복의 대범한 색 조합, 민속신앙에서 사용되는 색채 등과의 영향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부통 신부는 당시 한국인의 87%가 비그리스도교인이며 그중 다수가 불교 신자임을 고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부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불교의 덕목이기도 한 선행과 자비 그리고 영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십자고상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부활상을 주제로 한 벽화를 주로 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성화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게 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신의 벽화를 통해서 언어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신비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례 공간을 이루어내고자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8월 11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붓을 통한 신앙 전파] 3.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의 예술 선교 (하)


야수주의 화풍과 한국 전통 색채 융합, 그림으로 성경 말씀과 복음 정신 전파

 

 

- 앙드레 부통 신부가 1960년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부산 초장성당의 벽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1960~70년대 100여 점에 달하는 벽화 제작

 

앙드레 부통 신부는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간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 가톨릭교회에 서양화와 한국적인 표현을 적절히 융화시킨 독특한 화풍을 소개하여 1960~7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 미술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제한된 재료와 작업 여건에도 불구하고 앙드레 부통 신부는 예술을 통한 신앙 전파의 열의로 국내에 100여 점에 달하는 벽화를 제작했다. 부통 신부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 ‘FRAB’, ‘부’, ‘부신부’와 같이 여러 형태의 서명과 함께 제작 년, 월, 일을 남겼다. 

 

그의 판화 작품에는 서명과 함께 그의 한국 이름으로 보이는 ‘부보경(夫普敬, 夫普景)’이 새겨진 낙관(落款)이 찍혀 있다. 부통 신부의 판화 작품은 1969년 3월 16일, 3월 23일자 가톨릭시보 제4면에 실린 ‘사순절 전례(四旬節 典禮) 부활의 길’의 삽화로 실린 바 있는데 기사에 ‘글···白플라치도, 그림···夫普敬’라 쓰여 있어 부통 신부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명들이 부통 신부 작품의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약 10여 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앙드레 부통 신부는 건강상의 문제 등으로 1970년대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본원인 프랑스 위스크의 생 폴 수도원으로 복귀했다.

 

 

프랑스 귀환 후의 활동 : 예술가에서 교육자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앙드레 부통 신부는 건강 악화로 1977년 9월 일본에서 프랑스 위스크 수도원으로 복귀하여 1980년 3월 선종할 때까지 자신의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프랑스로 돌아온 부통 신부는 건강상의 문제로 대규모 벽화 작업은 실행하지 못했으며 세라믹 작품을 비롯한 소품을 주로 제작하였다.

 

- 앙드레 부통 신부는 서양의 야수주의 화풍과 한국의 전통 색채가 융합된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사진은 부통 신부가 그린 축복예식서 표지.

 

 

당시 그는 성인 시리즈를 주제로 한 세라믹 패널 작품을 제작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인물상들이 담긴 작품들이 현재 위스크 수도원에 남아있다. 또한, 이 시기에 제작한 세라믹 작품 중에는 그의 한국어 이름 약자인 ‘부’로 서명이 되어 있는 작품이 남아 있어 한국 체류 시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귀환 이후 부통 신부는 작품 제작보다는 교육 관련 일에 주력하였다. 한국 체류 시기에 쓴 편지에서 그는 “지금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프랑스어로 강의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10여 년이라는 긴 한국 체류 기간 그는 언어가 아닌 그림으로 소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성경 말씀에 대해 보다 다양한 소통을 이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보낸 3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부통 신부는 주로 위스크 수도원의 수련기 수사들을 위한 성경 연구회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앙드레 부통 신부는 스스로도 늘 이야기했듯이 예술가이기에 앞서 신부, 선교사, 교육자였으며 성경 말씀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교육하고 알리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소임임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교육과 선교를 위해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소통의 수단이었다.

 

 

지방 공소 중심으로 벽화 20여 점 남아 있어

 

앙드레 부통 신부가 국내에 남긴 벽화의 수는 현재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지방 공소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20여 점의 벽화에서 서양의 야수주의 화풍과 한국의 전통 색채가 융합된 그의 독특한 화풍을 볼 수 있다. 그동안 부통 신부의 작품을 재평가하고 현재 남아 있는 작품에 대한 보존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현재 대전교구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 있다가 소실된 부통 신부의 벽화들을 복원하는 일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대구대교구, 안동교구에 남아 있는 부통 신부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도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상주 서문동성당의 벽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앙드레 부통 신부에 대한 연구는 필자에게 옛 자료를 뒤지고 기록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960~70년대 가톨릭시보에 게재됐던 부통 신부 관련 기사 목록과 필자의 연구 논문을 정리하며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본 졸고가 부통 신부가 펼쳤던 예술 선교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1969년 3월 16일, 1969년 3월 23일자 제4면 ‘사순절 전례(四旬節 典禮) 부활의 길’ 판화 삽화

 

▲ 1972년 4월 2일 제1면, ‘영광의 그리스도’, 부 안드레아 신부 그림, 대전 성남동성당 벽화

 

▲ 1972년 4월 9일, 제4면 ‘그림으로 복음전파, 왜관 베네딕또수도원 부신부’(삽화: 삼위일체, 화령본당 하동공소 벽화, 1967년 제작)

 

▲ 1972년 12월 25일, 제4면, ‘성탄’ 삽화

 

▲ 정수경, ‘붓을 통한 신앙 전파 : 앙드레 부통 신부(Andr Bouton OSB : 1914~1980)의 예술 선교’, 「교회사연구」 38, 2012, pp.105~141.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8월 18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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