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1일 (월)
(녹)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6 ㅣ No.1828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 수원교구의 교회사적 위상과 역할

 

 

1963년 설립된 수원교구는 본당과 신자수 등에서 한국 제2의 교세를 갖춘 역동적인 교구로서, 한민족 복음화의 중심교구로 부상하고 있다. 이같은 위상은 바로 수원교구가 갖고 있는 ‘교회사적 역량’에서 나온다.

 

수원교구는 일찍이 100여 년의 모진 박해를 이겨낸 신앙선조들의 순교신심과 거룩한 순례자의 영성이 솟아나오는 순교의 보고(寶庫)를 이루어, “순교자와 성지의 교구”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설립된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18세기 말) 복음실천 운동의 중심지였던 수원교구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활발한 전교에 힘입어 한강의 수운(水運)을 활용하여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신앙공동체를 확산시켜 나간 초창기 한국천주교회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또한 신태보 베드로와 정하상 바오로 등 수원교구의 신앙선조들은 1801년 신유박해의 광풍 속에서 폐허가 된 한국천주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곳곳에 교우촌을 건설하고, 중국에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을 영입하는 데 앞장선 결과, 마침내 1831년 조선교구 설정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와 함께 수원교구 지역 내 곳곳을 다니며 성사를 집전하고 복음을 전하며 신자공동체를 튼튼히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근대적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1836년 중국 마카오에 파견된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 신학생 3명의 출신지 또는 거주지가 모두 수원교구 지역이었으므로, 수원교구는 박해시기 한국천주교회 방인 성직자 양성의 못자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의 부모와 형제, 친지들은 곧이어 닥친 1839년 기해박해의 시련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굳센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수원교구가 순교영성강학 등을 통한 순교자 현양과 순교신심 교육의 모범적 교구가 되게 만들었다. [2019년 5월 19일 부활 제5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 수원교구의 기해박해 순교자 개관

 

 

수원교구의 신앙선조들은 초창기 교회창설과 동시에 불어닥친 100여 년의 박해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에 바탕을 둔 불굴의 신앙심을 발휘하여 교회를 재건하고 복음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늘날 그 이름이 전해지는 수원교구 관련 순교자만해도 무려 320명 이상에 이르고 있다.

 

거기에 1839년 기해박해 전후에 순교하신 분들로, 오늘날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을 위시하여, 복자, 하느님의 종들로 선정된 분들을 모두 합하면, 수원교구가 현양하는 기해박해 순교자만 해도 대략 30명에 달한다. 이중에 성인은 21명, 복자는 3명, 하느님의 종은 6명이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분들 중 수원교구 지역에서 출생하신 분들은 다음과 같다. 성인들 중에는 이문우 요한, 이호영 베드로와 그의 누님 이소사 아가타, 조증이 바르바라(이상 4명은 이천 출신), 김성우 안토니오,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생 이광열 요한(이상 5명은 광주 출신으로 구산, 분원 등 포함), 박후재 요한과 허계임 막달레나(이상 2명은 용인 출신) 등 모두 11명, 복자들 중에는 최조이 바르바라(여주 출신), 신태보 베드로(용인 또는 이천 출신) 등 2명, 하느님의 종으로는 김덕심 아우구스티노(광주 구산 출신)가 있다. 따라서 기해박해 때 수원교구 지역에서 출생한 순교 성인, 복자, 하느님의 종은 모두 14명으로 전체 30명의 절반쯤 된다.

 

나머지 16명의 기해박해 성인과 복자, 하느님의 종은 타 교구 지역에서 출생하여 수원교구 지역에서 활동하거나 거주하신 분이다. 기해박해 때 수원교구 지역 내에서 순교하신 분은 장사광 베드로와 그의 아내 손 막달레나(이상 양근 옥사), 김덕심 아우구스티노(남한산성 옥사) 등 하느님의 종 3명 뿐이다. [2019년 5월 26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3)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 (상)

 

 

조선후기 양근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전역과 광주시 일부분에 해당한다. 양근은 한국천주교회의 요람으로서 초기교회 당시 서울과 경기 일원의 신앙공동체를 충청도와 전라도로 널리 확산시킨 전국적 복음전파의 요충지였다. 1801년 전후까지만 해도 경기지역 신자의 90%는 양근을 비롯하여 여주, 이천, 광주 등 남한강 일대에 살고 있었고, 이 중에서 다시 대략 반 정도는 양근에 몰려 살고 있었다. 이곳 양근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이미 정조에 의해서 서울의 최제공, 내포의 이존창과 함께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우두머리로 낙인 찍혀 ‘선참후계령’으로 위협당하며 배교하라고 협박을 받았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생장하고 활동하던 곳으로서, 왕성한 교세에 걸맞은 탁월한 지도자를 배출한 고장이었다.

 

그러나 1792년 권일신의 순교에 이어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형 권철신 암브로시오, 조동섬 유스티노 등 고을의 주요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세가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기해박해 직전인 1836년경, 여전히 양근은 구교우와 예비신자만으로 대략 140~150명의 신자집단을 이루고 있던 경기 동북부 지역의 신앙중심지 기능을 했으며, 서울에서 이주한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와 같은 저명한 순교자를 배출해낼 수 있었다. 또한, 1837년 4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두 명의 선교사가 지방 최초로 합동 부활절 미사를 봉헌한 곳이기도 하다. 기해박해 때는 권철신의 손자인 권황과 권탁 형제가 관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양근의 신자들은 기해박해를 지나 병인박해 때까지 관아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여전히 능말, 추읍, 마당재(지평) 등 산골로 옮겨가서 신앙공동체를 존속시켰고, 다수의 신자는 서울, 개성, 은이, 음성 등 다른 고을로 이주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2019년 6월 2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4)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 (하)

 

 

장사광 베드로(1787~1839)는 서울 출신 양가(良家)의 자손이었고, 손 막달레나(1784~1839)는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회장 손경윤 제르바시오의 딸이다. 1792년 이전에 장사광은 양근의 한감개로 와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가, 권일신이 죽고 1801년 신유박해가 닥치자 곧바로 냉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 손 막달레나가 남편의 회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다시 신앙을 갖도록 간곡히 권면한 결과, 1828년경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장사광은 보다 확실한 믿음살이를 하기 위해서 집안의 제사를 폐지하고 위폐를 불살랐을 뿐 아니라, 유교적 제사를 강조하는 향교(鄕校)의 명단에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삭제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반의 체모(體貌)를 버리고, 술을 완전히 끊는 등 절제의 삶을 살면서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집중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장사광 부부는 곧바로 성사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앙심이 더욱 굳건해져서 신자의 본분을 힘써 지켜나갔다.

 

이들의 소문을 들은 양근군수는 1839년 8월 장사광과 손 막달레나는 물론이고 그의 두 아들까지 모두 체포하여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군수가 부부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에 장사광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인정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이들의 괴로움은 저희의 괴로움보다 백배나 더 고통스럽지만, 이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하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했다. 군수는 감사의 지시를 받고 그들 부부를 고문하고 협박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부부는 음식 제공조차 금지당한 상태에서 문초와 형벌을 참아 받다가, 장사광은 1839년 12월 18일(음 11월 13일), 손 막달레나는 이보다 4일 후인 12월 22일(음 11월 17일)에 각각 52세, 55세의 나이로 옥중순교했다. 이들 부부의 신앙고백은 구약성경에서 외아들 이사악마저 서슴지 않고 하느님 제단에 바쳤던 아브라함의 항구한 믿음을 연상하게 한다.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시여, 하느님을 만유 위에 가장 높이 사랑하신 당신들의 믿음을 저희 모두가 본받게 하소서. 아멘.” [2019년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5) 교우촌 건설의 주역 신태보 베드로와 그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

 

 

신태보 베드로(1770년~1839년)는 용인 또는 이천(동산밑) 출신으로, 20대 초반인 1791년경 천주교를 전해 들었고, 그의 친척 이여진 요한과 함께 1795년경 신앙을 받아들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신앙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그는 용인의 순교자 가족 40여 명을 모아서 강원도 풍수원 쪽으로 이주해 교우촌을 세웠다. 신태보는 이여진과 함께 주문모 신부 순교 이후 성직자가 없는 한국교회에 다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1811년, 이여진은 동료 1명과 함께 신태보가 마련해 준 경비로 북경에 가서,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신미년 서한) 2통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 후 신태보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거나 교리서적을 필사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경상, 전라, 충청도를 통틀어 삼남의 ‘천주교회 우두머리’로 낙인찍힐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만년에 경상도 상주 잣골로 내려가 은신하였으나,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었고, 이후에도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여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왕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지 않아서 무려 12년간 전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1839년 5월 29일(음 4월 17일)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수감된 동안 샤스탕 신부의 지시를 받고 작성한 옥중수기에는 감옥생활의 온갖 고초와 동료 신자들의 애덕행위가 잘 기록되어 있다.

 

신태보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1790년~1840년)는 1801년 여주 순교자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다. 결혼 후 얼마 뒤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 신태보를 봉양하였다. 궁박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내하며 교회 일을 도왔고, 시아버지가 전주 감옥에 수감된 12년 동안에는 교우들에게 의지하여 살면서도 힘겨운 옥바라지를 계속하여 그가 굳건한 신앙심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다. 1839년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 최 바르바라는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법정에서 최 바르바라는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1801년에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며, 몇 달 전에 참수당한 신태보의 며느리라고 당당히 밝히고, 1840년 1월 4일(음력 기해년 11월 30일)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6월 16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6) 기해년 순교의 서막을 알린 이천 출신 성인 이호영 베드로와 누님 이 아가타

 

 

이호영 베드로(1803~1838년)와 그의 누나 이 아가타(1784~1839년)는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이호영은 부친을 여의고 모친, 누나와 함께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했으나,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서울로 이사한 그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지만 평온한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이호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1790~1827)를 찾아가 교리를 착실히 배웠다. 이경언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직하고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회장직을 맡았던 교리연구회 겸 선교단체인 명도회 회원으로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교회서적을 필사하고 성화를 그려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1827년 정해박해 때 청주 감옥에서 순교한 인물이다. 이러한 스승에게서 배운 이호영의 교리지식은 풍부했고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성품이 온유, 정직하고 헌신적이었기에, 1834년 1월 조선에 입국한 유방제 신부는 기뻐하며 그를 교리교사로 임명하였다. 어느 날 천상 과거에 합격하는 꿈을 꾼 이호영은, 자신이 곧 순교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1835년 1월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호영은 4년간 포도청과 형조감옥 등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고백하다가 1838년 11월 25일(음력 10월 8일) 옥중에서 순교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무술년 음력 10월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곧이어 기해년이 시작되고 순교자가 줄을 잇게 되자, 이호영은 기해박해 순교의 서막을 장식한 인물이 되었고, 103위 한국 순교성인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분이 되었다.

 

이 아가타도 동생 이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이호영이 순교한 지 6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했다. 이 아가타는 알몸으로 공중에 매달린 채 매를 맞는 ‘학춤’이라는 형벌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까지 묵묵히 참아냈다. 이호영과 이 아가타 남매의 착하고 아름다운 수감생활은 주위 포졸들에게도 늘 칭찬의 대상이었고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호영은 오늘날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사의 참된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 아가타는 굳은 신앙심으로 무장하여, 가톨릭을 배척하는 외교인에게 진실된 표양으로 감동을 주는 전교자의 모범이다. [2019년 6월 2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7) ‘천상과거’를 위하여 배교의 유혹을 뿌리쳤던 이문우 요한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0년대 중반까지 양근, 광주, 이천 등지에 100여 명 이상의 신앙공동체가 존재한 것과는 달리, 남한강 유역의 초기 천주교회 중심지 중 하나였던 여주에는 소수의 신자만이 겨우 남았다. 그러나 병인박해 무렵 여주에는 다시 선교사가 방문하여 각시울, 원심이 등의 공소가 세워졌다. 여주와 함께 초기 한국교회 남한강 지역 거점의 하나였던 이천은 여리양광(여주-이천-양근-광주) 중에서도 비교적 내륙 깊숙이 있던 관계로 신유박해의 광풍을 덜 받았다. 따라서 이천에는 병인박해 때까지 단내(호법면 단천리), 소리울(모가면 송곡리), 진안(모가면 진가리) 등지에 신앙 공동체가 존속했다. 181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조선교회 재건운동의 주역들이 이곳 이천 출신으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는 중요한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이천 출신의 이여진은 양근의 권기인(상립), 권노방(상술) 등과 함께 1811년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가 조선교회 재건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고 성직자 영입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천 동산밑(호법면 동산리)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문우 요한(1809~1840)은 다섯 살 때 부모를 잃은 후, 오 바르바라의 양자가 되어 서울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이문우는 아내와 자식들이 일찍 죽자 곧 신앙생활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문우는 모방 신부의 복사가 되어 1년 동안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감옥에 갇히자 성금을 모아 정성껏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또한, 은신한 주교와 사제들에게 박해와 교회의 소식을 전달했고, 순교한 선교사와 신자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장사를 지내기도 했다.

 

1839년 11월 11일(음 기해년 10월 26일) 체포된 이문우는 배교의 유혹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정서이나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문우는 1840년 2월 1일 서울 당고개에서 31세의 나이로 참수형 당했다. 그는 포도청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작성한 ‘옥중제성’(獄中提醒)이란 천주가사에서 ‘순교를 천상과거 합격으로, 배교를 불합격’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순교의지를 굳힘은 물론이고, 다른 신자들도 항구한 신앙심으로 순교하도록 권면했다. [2019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8) 교회 재건을 위해 서울과 이천을 오갔던 남이관 조증이 부부 순교 성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1780년~1839년)는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충주 출신 남필용의 4남매 중 막내로, 이천 출신의 조증이 바르바라(1782년~1839년)와 결혼하였다. 1801년 부친이 체포되자 남이관은 처가인 이천으로 피신했으나 붙잡혔다. 이후 부친은 전라도 강진에서, 남이관은 경상도 단성에서 각각 귀양살이를 했다. 1832년경 유배지에서 풀려난 남이관은 처가인 이천으로 가서, 아내 조증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내의 외척인 정하상 바오로를 도와 교회 일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이사했다. 남이관은 정하상 등과 함께 의주까지 가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모셔와 서울 살리뭇골(중구 산림동)의 자기 집에 모셨다. 남이관, 조증이 부부는 그 후 프랑스인 모방 신부도 모셔와 비밀리에 신자들을 불러 성사를 보게 하는 등 공소회장의 역할도 했다.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남이관은 서울을 떠나 이천의 다래촌(대월면 구시리)으로 피신했으나 신자의 밀고로 그를 추적해 온 포졸들에게 잡혀, 압송됐다. 포도청, 의금부, 형조를 차례로 거치면서 심문과 재판을 받은 그는 무수한 구타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켜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한편, 기해박해 때 조증이도 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남편의 행방을 묻는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라며 가하는 5회 이상의 고문과 180대 이상의 형장(매질)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매질로 온몸에 고름이 흐를 정도였지만 조증이는 의연하였다. 또한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례나 심문을 받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꿋꿋하게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하여 조증이도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먼저 사형집행을 당하게 된 남이관은 여자 옥사의 옥졸을 통해서 아내 조증이에게, “우리 부부가 같은 날 죽기로 약속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게 되었소. 하지만 적어도 같은 곳(형장)에서 죽읍시다.”라는 말을 전했다. 남이관은 1839년 9월 26일 60세에, 조증이는 1839년 12월 29일 58세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남이관, 조증이 부부 순교 성인이시여, 저희 부부도 당신들과 같이 변함없는 신앙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복음 실천의 삶을 살면서 해로하도록 전구해주소서. 아멘. [2019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9)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요 용인 굴암의 회장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1820년대를 전후하여 용인의 산골에는 화전과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신자들의 신앙공동체가 여러 곳에 생겨났으며, 기해박해 무렵에는 용인의 굴암, 한덕골, 양지의 은이, 골배마실 등지에 공소가 자리를 잡았다. 1840년대 이후 용인의 손골과 양성의 미리내 등지는 선교사들의 사목 거점이자 휴양지 겸 조선말과 풍속을 배우는 곳으로 발전하여 병인박해 때까지 온전히 존속했다.

 

용인에서 체포된 김제준 이냐시오(1796년~1839년)는 충청도 솔뫼 출신으로 순교자 김진후 비오(1738년~1814년)의 손자였다. 집안의 신앙을 물려받은 김제준의 보명은 제린(濟麟)이고, 신명(信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가 가족과 함께 고향 솔뫼를 떠난 년도는 분명하지 않으나, 모방 신부의 서한(1836년)에 의하면 1821년생인 장남 김대건 안드레아가 솔뫼 출신(라틴어의 대가인 故 최승룡 신부는 솔뫼 탄생으로 해석)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1827년 정해박해 때 고향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힘이 장사였던 김제준은 가족을 보호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다가 용인의 깊은 산골인 광파리골, 성애골 등을 거쳐서 굴암(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에 정착했다. 농업을 생계로 삼았던 그는 신앙에도 매우 열심하여 서울에 거처를 두고, 성직자 영입운동에 종사하던 정하상 바오로 회장의 집을 여러 번 방문했다. 그리고 정하상의 집에 은신하던 유방제 신부, 모방 신부 등을 만나 성사를 받았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하면, 김제준은 굴암의 회장으로서 신자들과 함께 싫증이 날 때까지 교회서적을 읽고 기도했다고 한다. ‘유다스’ 김여상의 꼬임에 넘어간 사위 곽가의 고변에 의해 관가에 체포된 김제준은 처음에는 배교를 했다. 그러나 아들을 외국에 보낸 사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감옥의 동료 신자들이 설득하자, 이에 자신의 나약함을 회개해 배교를 철회하고 고향인 솔뫼 교우촌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하면서 용인 사람으로만 행세하는 등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그는 1839년 9월 26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0) 감옥에서 도적에게 교리를 가르친 용인 출신 박후재, 두 딸과 함께 자진 순교한 용인댁 허계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용인 출신 박후재 요한(1799년~1839년)은 ‘명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이 순교하자 모친은 물장수, 그는 짚신장수로 생계를 이었다. 항상 기도를 열심히 했고 특히 천주교 교리에 밝았는데, 평소에 ‘치명’(致命, 순교)이야말로 구원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육신을 고통으로 단련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박해를 미리 예견하고 자신의 아내에게 세간을 판 돈을 주면서 친척 집에 가 있게 한 박후재는 포도청과 형조로 끌려가서 배교를 강요받으며 치도곤 40대를 맞아 까무러쳤다가 깨어났다. 그는 혹심한 형문(刑問, 형장을 치면서 심문함)에도 배교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감옥에서도 신자들과 도적에게까지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박후재는 참수형을 당했는데, 망나니가 녹슨 칼로 그의 목을 수차례 가격해도 떨어지지 않아, 칼날을 다시 가는 동안 박후재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는 옥살이 5개월 만인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41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허계임 막달레나(1773년~1839년)는 용인 출신으로 시누이인 이매임 데레사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문했다. 허계임은 외교인인 남편의 엄청난 구박과 학대를 받았으나 두 딸 이영희 막달레나와 이정희 바르바라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길렀다. 또한 학다리골(현 서울 서소문동)에 마련한 딸들의 거처에 판공성사 때마다 들러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허계임은 남명혁 다미아노 가족의 체포 소식을 접하고, 그의 두 딸, 그리고 외손녀 이 바르바라, 이매임 등과 함께 자진해서 포졸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묵주를 내보였다. 이에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형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굳건히 지켜,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67세의 나이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1) 포교들도 경청할 만큼 명품 설교를 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회장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양지 고을에는 ‘은이’를 비롯하여 ‘응다라니, 무량골, 한터, 사기점, 정쇠, 배마실, 넙실’ 등 수많은 교우촌이 산재했다. 이 중에 은이는 어은산(御隱山) 아래의 동네로 ‘언리’ 또는 ‘응이’로도 불렸으며, 병오박해 무렵에는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가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곳 은이의 상뜸이에 와서 머물렀다. 김대건 신부 가족은 한때 은이의 이웃 동네인 배마실(=골배마실)에도 살았다. 이러한 은이 교우촌에는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한이형 라우렌시오 등 서울의 전교회장들이 자주 파견되어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신자들도 나름대로 선교사를 영입하여 성사를 받는 데 힘썼다.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년~1840년) 회장은 서울 태생으로 ‘이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1798년~1839년)는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그보다 한 달 먼저 순교했다. 박종원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께 효성을 다했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참아내고 기도와 묵상을 부지런히 하면서 타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특히 그는 죽을 위험에 있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베풀었으며, 항상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과 같이 자신도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는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곧 전교회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내포 지역의 교우들에게 파견되어 성사를 받도록 도왔고 교리를 전했다. 1837년 말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또다시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가 있는 서울에서 전교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 한 차례 은이 교우촌으로 내려가 한 달 이상을 머물면서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기해박해로 감옥에 체포된 신자들을 찾아가 보살피고 박해 소식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8개월을 피신하다가 1839년 10월 26일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으나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형조로 이송되어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는 엄중한 형벌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훌륭한 말솜씨로 재미있게 교리를 전하여, 포교들도 감옥으로 달려가 그의 설교를 즐겨 듣곤 했다. 박종원은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2)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광주에 연고가 있는 기해박해 순교자들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배경은, 선교사가 직접 해당 지역에 들어가서 복음을 선포한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다. 처음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학문적 호기심으로 천주교 서적을 중국 북경에서 들여와서 개인 차원으로 탐독하다가, 차츰 집단적 학습(=강학)을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마침내 최초의 예비신자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 장소가 바로 지금의 천진암이요 주어사이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가 천진암과 주어사를 포함한 초기교회 발상지다. 따라서 광주는 초기교회 때부터 신자들이 존재했고 양근, 여주에 이어 세 번째로 신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의 조짐이 나타나자 남한강 변에 거주했던 신자들은 서울로 이주하거나 현재의 광주시 실촌읍 곤지암, 건업리 등 산속 깊이 피신했다. 1790년대 이후 광주 분원(소내)으로 와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과 그 직계 가족들은 1800년 5월경에 서울 석정동으로 이주했고, 그의 행랑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황일광 알렉시오 형제도 정약종 회장을 따라 서울로 갔다. 1800년 10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해 옹기짐을 지고 자주 도성을 드나들며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거두어주던 한덕운 토마스(1748년~1802년)는 곧 체포되어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 또, 광주 출신으로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사적이 분명한 분들로는 구산 마을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그의 동생 하느님의 종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등이 있다. 이외에도 1839년 5월과 7월에 서울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이광렬 요한 형제 성인들이 거론된다.(『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제1권, 성황석두루가서원, 1984) 그러나 이들이 광주에서 생장(生長, 태어나고 자람)했음을 확증해 줄 직접적인 문헌 근거가 없어서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광주 출신의 순교자들은 병인박해기에는 앞서 말한 광주시 실촌읍에서 다수 배출되며 프랑스인 선교사 도리, 볼리외 등도 각각 광주 인근의 용인(손골), 성남(뫼로니) 등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다. 이는 당시 관찬기록에 “광주 판교와 산답 사이에 천주교가 크게 퍼져있다.”고 보고된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한편 기해박해 때까지 순교자가 거의 없었던 (안성시)양성현, 죽산부, 양지현 등에서도 병인박해 때에는 다수의 순교자가 배출된 것으로 보아, 병인박해 무렵에는 오늘날 안성시 일대가 다수의 신자들이 거주하는 교우촌으로 발전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2019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3) 살아도 죽어도 천주교인이기를 원했던 김성우 안토니오

 

 

김성우 안토니오(1795년~1841년) 성인은 경기도 광주의 구산(龜山)에서 김영춘 바오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다른 이름은 우집(禹集), 치윤(致允)이다. 그의 4대조 김성좌가 한양에서 구산 마을로 내려와 정착한 이후, 구산 마을은 경주 김씨 집안의 세거지(집성촌)가 되었다. 김성우 일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가 넉넉하고, 인심이 좋기로 소문나 구산 일대에서 덕망이 높았다.

 

1830년을 전후로 이씨 성을 가진 교우가 김성우와 그 형제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하였고 김성우와 그의 작은동생 김문집 베드로는 이를 수용한다. 그러나 그의 큰동생 김만집은 그들만큼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였다가 나중에야 복음을 수용한다. 먼저 복음에 눈을 뜬 김성우와 김문집은 모든 가족을 1~2년 사이에 모두 입교시켰다.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던 양반 김성우의 가문이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천주교는 구산에 사는 다른 이웃들, 경주 최씨나 제주 고씨 등에게도 전파되었으며, 나아가 구산 마을이 속한 광주 고을 동부면의 다른 마을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성우 성인은 얼마 후 서울의 느리골(현 효제동)로 갔다가 다시 마장안(현 마장동)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아마도 천주교 신자로서의 신앙생활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기해년 연말, 김성우는 마장안 자기 집에서 포졸에게 체포되어 곧장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체포된 후에 그는 감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그곳에서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당(黨: 함께 활동하던 다른 천주교 신자)을 대라든가 배교하라는 등의 강요에 일체 응하지 않고 여러 차례의 신장(訊杖: 죄인을 심문하면서 치는 형벌)을 꿋꿋이 참아냈다. 또한, 그는 포도청 옥에 갇힌 흉악한 다른 죄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는데, 처음에는 비웃고 놀려대던 자들이 차츰 그의 부지런하고 정직한 행실에 감화되어 그중에 두 명은 옥중에서 대세(代洗)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갖은 고문에도 “나는 당신들의 질문과 회유에 대하여 ‘나는 천주교인이오.’라는 한마디밖에는 할 말이 없소.”라고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지 17개월째인 1841년 4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4) 남한산성 감옥에서 유혹을 뿌리치고 순교한 하느님의 종 김만집 아우구스티노

 

 

순교자 김만집 아우구스티노(1798년~1841년)는 김영춘 바오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이 입교할 때에도 망설이다가 결국 나중에 마지막으로 입교하였는데, 이는 그가 신중한 성격이였으며, 성리학적 사고와 관습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모친상을 당하여 그의 형제들이 서울로 옮겨간 후에도 그는 여전히 구산에 남았는데, 그가 아마 그때까지도 세례를 받지 않은 채 모친상을 유교식으로 치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친상이 끝난 후 그는 곧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그의 형 김성우 성인이 서울과 구산을 오가면서 공소회장의 책임을 맡아 활동하자, 이를 도와서 구산 마을을 복음화했다. 그리하여 1838년경 구산 마을은 외교인 하나 없는 온전한 교우촌으로 변하였다. 기해박해때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 갇힌 김만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옥 안에서 갖가지 번민이 생겨나서 신앙심이 흔들렸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예수님의 수난 고통을 묵상하면서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김만집은 감옥에 갇힌 지 20개월이 되던 1841년 1월 28일, 옥중에서 순교했다.

 

김만집의 동생 김문집 베드로는(1801년~1868년)는 1839년 5월 하순경, 밀고자에 의해 구산의 가족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 김문집은 1858년 10월, 원자의 탄생을 기념하여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베푼 특사로 석방될 때까지, 무려 19년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때로 구타하고 협박하는 형리들과 관장, 그리고 같이 갇힌 잡범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큰형 김성우처럼 아예 옥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않고, 마치 자신의 집 안에 있는 것처럼 옥을 편하게 여기며, 거칠고 힘든 옥살이를 묵묵히 감내했다. 김문집은 병인박해 시기에(1868년) 향년 68세로, 함께 끌려간 조카들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 등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같은 날(2월 15일)순교하였다.

 

구산 성지에서는 이들 외에도 최지현 휘두, 심칠여 아우구스티노 등 구산 마을과 인근 동네에서 순교한 분들을 함께 현양하고 있다. [2019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5) 기해박해 대표 순교자 정하상 바오로의 생애와 영성 (1)

 

 

정하상 바오로(1795년~1839년) 성인을 부대시참(不待時斬, 즉시 참수형에 처함)으로 판결한 기해박해 당시 조정의 결안에 의하면, 그는 부모의 출생지인 광주(경기도 광주부) 마현(현 의정부교구 마재 성지 일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가 서울(한성부) 남부의 후동계(현 중구 주교동)로 이사 와서 입적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찬기록만으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조정의 사형 판결은 당시 정하상 성인을 문초하면서 그가 진술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발설할 경우 교우 공동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광주 분원(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이나, 부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한 온 가족이 박해를 피해 거주했던 서울의 청석동, 창동 등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김대건 신부가 포도청에서의 6차례 심문과 40회에 걸친 진술에서도 끝내 그의 출생지 당진 솔뫼를 언급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다수의 교회사 연구자에 의하면, 정약종(1760년~1801년) 회장이 가문의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마재로부터 한강(현 팔당댐 일대)을 건너 소내(분원)로 거처를 옮긴 시기를 1791년 신해박해 직후(~1793년)로 본다. 그러기에 1795년생인 정하상 성인이나 1797년생인 정정혜 성녀의 경우 광주 분원 출생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와 교회사를 연구했던 고 최완기(예로니모) 교수는 18세기~20세기 호적대장, 읍지, 교세통계표 등을 자료로 하여, 18세기 후반 정약종 회장이 시작한 분원의 신앙공동체가 어떻게 변모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인 연구 성과를 남겨두었다(2006년 여름호 “상교우서” 참조).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겨우 죽음을 면한 정하상 성인과 모친, 누이동생 등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 회장의 남은 가족들은, 한동안 마재 정씨마을로 가서 살았다. 이때 유 체칠리아는 7살 하상과 5살 정혜에게 주요한 교리를 말로 가르치면서, 천주교를 원망하거나 믿지 않는 이들이 다수였던 마재 마을의 주민들로부터 받는 온갖 핍박을 참아내야만 했다.

 

정하상은 스무 살을 전후하여, 함경도 무산에 귀양살이하던 조동섬 유스티노(1739년~1830년)를 찾아가 그에게 좀 더 체계적으로 한문과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그에게 영적 감화와 격려를 받아 교회에 적극적으로 봉사할 결의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6) 기해박해 대표 순교자 정하상 바오로의 생애와 영성 (2)

 

 

1816년경, 상경한 정하상은 조숙(1787~1819년) 베드로, 권천례(1783~1819년) 데레사 부부의 집에 임시거처를 두고 북경을 왕래하면서 선교사영입운동을 통하여 신유박해로 멸절 위기에 처한 조선교회의 재건에 진력했다. 정하상은 초기 교회의 두 번째 동정부부로 알려진 조숙과 권천례 부부의 믿음살이에서 많은 감화를 받아,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정을 지키며 오로지 천주의 영광을 위해 교회 일에 열중하였다.

 

정하상은 1824년경부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함께 한 유진길(1791~1839년) 아우구스티노, 곧이어 동참한 조신철(1795~1839년) 가롤로 등과 함께, 어떠한 박해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조선교회를 위한 항구한 구원 대책 마련 방안에 대해 간절한 편지를 교황청에 올렸다. 이는 곧 1831년 9월 북경교회에서 분리 독립된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그리고 기나긴 병인박해를 이겨내고 현재까지 230여 년간 지속해오는 한국천주교회 재건에 확실한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정하상 성인은 기해박해 당시 체포를 예상하고 미리 그의 친척 홍약여와 의논하여 작성해 둔 호교론적 교리서 《상재상서》를 체포 직후 관가에 제출했다. 이를 본 조정의 대신들은 그 문장의 세련됨과 논리전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재상서》는 비록 3600여 자에 불과한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글이지만, 1887년 홍콩교회에서 책자로 간행하여 대중용 교리서로 활용할 정도로, 동아시아 천주교회에 특화된 해설(토착적인 소재를 활용한 해설)과 보유론(補儒論)을 그 특징으로 한다. 《상재상서》는 먼저 천주교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 유교의 사서삼경을 인용하면서, 유교의 가르침과 천주교의 가르침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합유(合儒)의 논리를 펼쳤다. 이어서 천주교에는 유교에 없는 많은 장점이 있음을 ‘영혼불멸’과 ‘천당지옥’의 교리를 통하여 입증함으로써, 천주교가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보유(補儒)를 설파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천주교는 온 세상 모든 백성이 마땅히 믿고 실천해야 할 윤리도덕이자 종교라는 점에서 유교를 초월한 영원한 구원의 진리임을 밝혔다. 조정에서는 정하상 성인을 모반부도죄(외환을 초래한 죄)로 처벌하면서, 나라를 원망하며 풍속을 어지럽혀 화란을 도모한 역적의 무리로 규정했다. 정하상 성인은 앵베르 주교가 귀국한 직후부터 약 1~2년간 복사로서 주교의 지방 순행에 동행하였고, 주교가 직접 가르치는 속성 신학교 교육을 받았으나, 성직자가 되기도 전에 천주께로 불려 올라감으로써 한국천주교회 103위 순교성인 중 평신도 대표로 선정되었다. [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7) 정하상 성인의 모친 유 체칠리아 성녀와 누이동생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정하상 성인은 조숙, 권천례 부부에 이어, 1820년대부터 남이관(1780~1839년) 세바스티아노, 조증이(1782~1839년) 발바라 부부의 서울 집에 거처를 두고 계속해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했다. 한편으로 박해의 위험 때문에 정하상은 그의 모친 유 체칠리아(1761~1839년)와 누이동생 정정혜(1797~1839년) 엘리사벳을 충청도 산골로 피신시켜 6~7년간 머물도록 했다. 정하상 성인 자신은 서울과 충청도의 거처를 오가면서 성직자영입을 통한 조선교회 재건운동을 계속 했다. 그러다가 “모친과 누이를 내버려두지 말라.”는 북경교회 선교사의 충고를 듣고, 모친과 누이를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함께 거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는 그들이 관가에 체포되기 전인 1839년 7월까지 지속되었다. 이곳에서 정하상은 1834년 초부터 중국인 여항덕 신부,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를 순차적으로 그의 집에 모셔, 성직자들의 성무집행을 보조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돌보았다.

 

유 체칠리아는 남편 정약종 회장이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엄청난 가문박해와 열악한 생계 때문에 하루하루 고통의 나날을 겪었는데, 어느 날 꿈에 남편이 나타나 “천국에서 방이 여덟 개나 되는 집을 지어, 방 다섯 개는 벌써 찼고 이제 세 개가 남았으니, 실망하지 말고 곤궁을 잘 참아 받다가, 꼭 우리를 만나러 오시오.”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다. 기해년 2월에 그의 친척이 박해의 위험을 알리며 시골로 빨리 피신하라고 권유했다. 이에 유 체칠리아는 “나는 아들과 함께 치명하는 것이 소원이다.”면서 거절했다. 유 체칠리아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힌 5개월 동안 수차례 문초를 당하고 매를 맞았으나 끝내 믿음을 잃지 않았고, 1839년 11월 23일 고문과 장독의 영향으로 순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은 어머니의 부지런함과 자애로움을 본받아 자신도 늘 빈궁하였으나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풀기를 그치지 않았고 기도와 노동으로 세속의 유혹을 극복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데 힘썼다. 그녀 또한 오빠와 마찬가지로 정결의 삶을 살았으며, 특별히 자선을 통한 청빈의 실천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영혼구원을 위한 믿음살이를 훌륭히 해나갔다. 정정혜는 약 6개월에 가까운 감옥살이 중에도 믿음을 굳게 지키다가,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8) 앵베르 주교의 사목활동과 순교영성 (1)

 

 

앵베르(1796~1839년, 제2대 조선대목구장)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프랑스인 대목구장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미리 조선선교를 하도록 준비된 선교사이다. 1831년 9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대목구가 설립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원 브뤼기에르(1792~1835년) 바르토롤메오 주교가 임명되었으나, 1835년 10월 20일 조선으로 오던 중, 병사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앵베르 주교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브리카르에서 태어났다. 1812년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1818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서 1819년 12월 18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서품 후 조선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선교를 위해 곧바로 중국의 사천대목구로 가서 12년 동안 선교하면서 특히 목평에 신학교를 세워 현지의 중국인 사제를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1년, 앵베르 주교는 조선대목구 설정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특히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자신은 중국 사천성에서 활동하면서 한자 사용이 어느 정도 익숙하며, 또한 현지 신학생 양성 경험 등이 있으므로, 조선 선교사로 받아준다면 여러 가지로 유익할 것이라고 했다.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이 뜻도 모르고 암송하던 한문으로 된 일상 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바치게 함으로써 그 참된 의미를 깨우칠 수 있도록 기도생활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또한 1836년 12월, 당시 대목구장 대리였던 모방 신부가 마카오에 보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최초의 세 조선신학생에 이어, 2차로 2~3명의 소년을 더 선발하여 마카오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고, 이와는 별도로 정하상, 이재의 등 4명을 조선 현지에서 주교가 직접 속성으로 신학교육을 한 후 사제서품을 주는 일도 추진했다. 앵베르 주교는 1837년 4월 20일 교황청으로부터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면, 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진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하며, 조선과 아울러 유구(류큐) 열도까지 관할한다.”는 내용의 소칙서를 받았다. 이에 따라 앵베르 주교는 같은해 5월 14일 사천대목구장 폰타나 주교 집전으로 갑사의 명의주교이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축성된 후, 조선 선교지로 향하면서 한편으로 유구에도 전교회장을 파견하는 문제를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신부와 논의를 하는 등, 조선 선교를 계기로 유구와 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 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확대해 나갈 뜻을 보였다. [2019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19) 앵베르 주교의 사목활동과 순교영성 (2)

 

 

1837년 12월 18일, 앵베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도움으로 국경을 넘었다. 앵베르 주교는 성모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한 것을 기념하여,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조선교회의 주보로 교황청에 요청했고(1838.12), 1841년 교황청에서는 성 요셉과 함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주보 성인으로 공식 승인했다. 앵베르 주교는 유방제 신부가 조선 선교 기간 과오에 대해 자백을 강요당한 처지를 헤아리면서, 유 신부가 고향에서 선교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북경교구와의 마찰을 예상하여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지부 등에 매우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선교지 대목구들 사이의 상호 화합과 일치를 위해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를 실천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1838년 12월 21일 조선에 입국한 지 약 1년 만에 그는 최초로 현재의 수원교구 지역에 해당하는 서울 근교의 경기도 일대로 사목순방에 나섰다. 그의 순방에는 정하상 바오로가 복사로 나섰다. 그들은 성탄절을 맞으러 서울 도성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수리산 공소로 갔다. 이후 앵베르 주교는 은이와 양간 등지의 공소, 갓등이(왕림) 공소에서 성사를 집행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급히 되돌아가서 부활절까지 계속해서 성사를 주었다. 계속된 박해로 점차 신변의 위험이 다가오자, 6월 3일 손경서 안드레아와 동료 김절벽 도미니코 등이 양간 부근에 미리 장만해둔 은둔지로 주교를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이곳에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두 달 이상 머물렀으며, 그동안에도 박해로 인한 순교자의 소식을 꼼꼼히 기록하여 훗날 《기해일기》를 편찬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내게 하였으며, 조선교회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조선대목구 성직자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화경 회장을 속여서 은신처 부근까지 따라온 거짓 신자 김여상을 보고 스스로 포졸들에게 갔고, 8월 11일 체포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9월 21일 한강 변 새남터에서 모방, 샤스탕 두 선교사와 함께 군문효수형을 당하여 순교의 영광스러운 화관을 받았다. 앵베르 주교는 항상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었고, 먼저 순교한 이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했으며, 신자들과 교회의 안정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 자신을 희생하여 이를 실천함으로써 참된 선교사, 착한 목자의 표상이 되었다. [2019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0)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사목활동과 순교영성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충실한 보좌역으로 모방(1803~1839년) 신부와 샤스탕(1803~1839년) 신부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 신자들에게는 노(盧) 신부로 자주 불렸던 모방 신부와 정(鄭) 신부로 불린 샤스탕 신부는 동갑내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샤스탕 신부는 사제서품을 받고 미리 동아시아에 와서 페낭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는 등 약 5년간의 선교사목의 경험을 쌓다가, 1837년 1월 조선에 입국했다. 샤스탕 신부보다 1년쯤 앞선 1836년 1월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보다 늦게 사제로 서품되어 1832년 3월에 마카오로 출발했다. 그는 마카오에서 중국 사천성 선교사로 배정받고 출발하다가, 도중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1833년 3월, 조선 선교사를 자원했다.

 

신자들은 이 두 선교사가 모두 한여름에는 주로 서울에서 지내지만, 가을이 되면 곧장 지방으로 공소 순방을 나섰다고 증언한다. 모방, 샤스탕 두 신부는 모두 신자들에게 자주 자선을 베풀었는데, 특히 샤스탕 신부는 옷이 없는 교우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신부의 성격은 서로 매우 달랐다. 앵베르 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모방 신부는 너무 강하고, 샤스탕 신부는 너무 부드러웠다고 하며, 교우들도 “모방 신부는 아버지 같고, 샤스탕 신부는 어머니 같다.”라고 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후 샤스탕 신부가 오기 전까지 약 1년 동안은 주로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곳곳에 공소를 설정하고 회장을 임명했다. 그리고 1837년 1월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자, 그가 서울의 주교댁에 머물면서 조선말과 풍속을 익히도록 배려하고, 자신은 남쪽(=삼남) 지방 순방에 나섰다. 한편 샤스탕 신부는 처음에 강원도 지역 등 북쪽 지역을 전교하다가 모방 신부가 질병으로 순방을 못 하게 되자, 그를 대신하여 경상도, 전라도 등 남부지방의 교우촌들을 순방했다. 특히 부산의 왜관을 통해서 일본으로의 전교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기해년의 박해가 심각해지자, 주교가 은신하고 있는 상괴로 가서 함께 조선교회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모두 잡힐 때까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려는 조정의 동향을 알고 신자들의 안위를 고려하여 앵베르 주교가 두 신부에게 자수를 권했고, 이에 기꺼이 순명하여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1) 정화경과 손경서의 신앙과 활동

 

 

정화경(1807~1840년) 안드레아와 손경서(1799~1839년) 안드레아는 김철벽 도미니코와 함께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1839년 6월, 앵베르 주교를 ‘상괴’라는 수원 고을의 바닷가 은신처로 피신시킨 일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들이다.

 

정화경(1807~1840년)은 충청도 정산의 부유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고향을 떠나 수원 양간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공소를 세우고 회장이 되어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주위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왔으며, 자주 서울을 왕래하면서 교회의 사정을 신자들에게 알려주는 소식통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정화경은 앵베르 주교를 추적하던 거짓 신자 김여상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앵베르 주교가 사는 곳 근처까지 그를 따라오게 하였고, 결국 은신처의 위치가 드러났다. 정화경은 앵베르 주교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김여상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잡혀가서 순교하고자 했으나, 주교가 그를 떼어놓고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한편 앵베르 주교의 체포 이후 포졸들은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추적했는데, 우연히 이들 신부의 복사인 이재의와 최형을 만난 정화경이 또다시 유혹에 넘어가 신부의 복사들을 포졸들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또한번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정화경은 포졸들이 신부를 찾아오라고 보내자 신부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고 오히려 신부를 피신시켰다.

 

손경서는 너그러운 성품과 민첩한 두뇌로 세속 일에도 유능했고 외교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는 1838년 홍주의 관장이 박해를 일으키자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교하고 많은 사재를 털어서 보석금을 냄으로써 사건을 무마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다가 나중에 이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를 상괴에 모신 뒤에, 그는 주교의 지시로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찾아가 그들을 상괴로 피신시킨 후, 그곳에서 조선교구 성직자회의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앵베르 주교가 체포된 뒤에 손경서와 그 가족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나 가족들이 먼저 잡히자 손경서는 자수를 하였다. 이런 와중에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하기도 했지만 곧 배교를 철회하고 1839년 12월 21일 교수형으로 41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한편 손경서보다 먼저 체포된 정화경은 다섯 달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끝에 12월 19일 33세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손경서와 함께 주교와 신부들을 상괴로 모시는 일에 협력했던 김철벽은 체포되어 관가의 고문에 굴복하여 한때 배교했다. 그러나 민극가 스테파노 회장의 권면에 용기를 내서 배교를 취소하고 3일 동안 치도곤 180대를 맞은 뒤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50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