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7일 (일)
(녹)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평협ㅣ사목회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27-28: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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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5 ㅣ No.104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7)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기도 (상)


기도 생활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짓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다. 아무리 바빠도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며, 주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CNS 자료 사진]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느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께 청해도 한 번도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많은 분이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느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것은 평소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특별히 청하고 구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미리 알아서 다 챙겨 주십니다. 청하지 않아도 앞길을 예비하십니다.

 

 

주님께 청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반면, 주님께 청하는데도 잘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에 욕심, 이기심, 교만함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면서, 하느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그냥 내 뜻만 이뤄달라고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처참한 마음으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내용입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우리는 “주님! 제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 “이것은 꼭 해줘야 합니다. 안 해주면 성당에 안 나갑니다”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종 부리듯이 “이것 해주십시오. 이것 안 해 주시면 알죠?”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무엇을 구하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으면 닮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기도 시간, 기도생활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좀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과 먼 곳에서 머무르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은총을 받겠습니까? 당연히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친하겠습니까? 당연히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친합니다. 평소에 말을 하지 않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관계도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하느님께 잘 보여야 하고 평소에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사랑받으려면? 사랑받을 짓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랑받을 짓이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그분께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부모는 항상 누구 생각을 합니까? 항상 자식 걱정하고, 자식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모르고 감사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저 혼자 잘난 것처럼 멋대로 하면 부모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마음 아프고 속상하겠습니까? 속상한 것이 좀 더 깊어지면, 그다음엔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자녀가 무엇을 해 달라고 해도 “아유~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 간에 관계가 소원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항상 말씀에 순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앞날은 보장될 수 없습니다. 돌에 이름을 새기듯이 우리들 마음속에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소에 잘해야 합니다. 아쉬울 때만 하느님을 찾아선 안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건강하고, 용감하고, 힘 있게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도 하느님입니다. 그 일을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을 깊이 모시고, 성령 안에 깊이 잠기시기를 바랍니다. 그 침잠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과 대화하십시오. 그러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6월 16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8)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기도 (하)


‘삶으로 바치는 기도’의 프로 선수가 되자

 

 

기도는 어느날 갑자기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 생활에서 설거지도 청소도 공부도 모두 기도가 될 수 있다. 침묵 속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면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 [CNS 자료 사진]

 

 

기도가 잘되지 않는다고요? 

 

자녀들이 공부에 지쳐 힘들어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좀 쉬어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쉬라는 말이 1년 365일 매일 쉬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힘드니까 조금 쉬어가면서 공부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때론 열심히 달리고 때론 물러서야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가 세상에 대한 생각과 관심을 모두 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매일 성체 앞에 앉아서 기도만 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달리고, 때로는 멈춰서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끊고 산에 올라 두 달 동안 기도만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입니다. 인격적인 하느님이시고 역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평신도의 일상 삶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평신도에게 하느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위 위에 앉아 기도하다가도 사나운 맹수가 오면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다가 추우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든든한 옷을 돈으로 사서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전제하에 말합니다. “끊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세속과 끊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과감하게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 여기서 끊는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종종 벽에 부딪힙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 길이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만약 인간 능력으로, 인간 정신으로, 인간의 입으로 하느님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 인간이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을 설명하고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현혹하는 것이 바로 사이비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느님께 기도로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부정적 방법이 때론 효과적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께 도달하는 방법은 하느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신비롭고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제가 하느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신비를 알기 힘듭니다. 그래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제가 흠숭과 경배를 드리고 찬양과 찬미를 드립니다. 저하고 똑같은 분이라면 제가 이렇게 흠숭과 경배도 안 드리고 찬양과 찬미도 안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모르는 정말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제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흠숭도 드립니다.”

 

그럼에도, 이 지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보기를 원한다면 하느님을 향해 사랑을 고정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하느님을 딱 만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거지하는 것, 청소하는 것, 아침에 일어나 이 닦는 것, 공부하는 것 모두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면서 이런 것들을 한다면 삶을 하느님 안에서 종합하는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설거지도 청소도 기도가 돼 

 

삶이 기도입니다. 삶이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의 삶을 완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그 능력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기도의 아마추어로 남아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삶으로 바치는 기도의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6월 23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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