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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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선종가의 죽음과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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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22 ㅣ No.1032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선종가’의 죽음과 무상

 

 

4음보 124행으로 이루어진 ‘선종가’는 죽을 운명에 처한 사실을 잊고 세속을 탐하다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육신을 극복하여 선종하기를 권고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죽을 운명의 사람이 헛된 욕심을 부리다 짧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를 촉구하고, 이어 고통스러운 죽음을 생각하여 육신의 극복과 계명의 준수로 선한 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장례와 묘지, 시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인생의 허망함과 죽음의 비참함을 부각하며 마무리한다.

 

 

선종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고자

 

‘선종가’는 선한 이와 악한 자의 대비적인 삶을 읊은 뒤, 37행에 걸쳐 장례와 묘지, 시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84-89행에서 ‘흉한 형상과 구린 기운’(92행) 때문에 부모, 처자와 친척, 붕우마저도 무서운 시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기 바쁘다고 한탄한다.

 

영혼육신 떠난후에 머무는바 육신이라

지각능력 없어지고 학문지식 다버리고

고운얼굴 변하여서 바로보기 어렵도다

독한기운 구린내는 눈을감고 코를막네

부모처자 못견디고 친척붕우 도망하네

바삐바삐 염습하여 어서급히 입관하네

 

98-100행에서는 죽은 이가 살아생전에 누리던 ‘고대광실’ 대신 ‘세자 밑 땅속’에 누웠으며, ‘푹신한 보료와 담요’ 대신 ‘황토요’를 깔았고, ‘따스한 이불’ 대신 ‘모래 이불’을 덮었으며, ‘화려한 병풍’ 대신 ‘진흙 벽’을 마주하였다고 밝히며 그 초라함과 비루함을 읊는다.

 

장사한지 수일만에 분묘다시 열고보면

놀랍고도 무섭도다 배의구멍 크게열어

구린기운 뿜어내며 오색벌레 우물우물

눈시울은 썩어지고 눈방울은 곰팡슬고

입시울은 처져지고 아래윗니 옹무렀네

코부리는 무너지고 콧구멍은 구더기요

귓바퀴는 접히고 귓구멍은 시즙(侍汁)이요

머리털은 어지러워 형상보기 어렵도다

썩은강아지 죽음이여 썩은고기 형상이라

슬프도다 사람이여 이모양을 뉘면할까

 

103-120행에서는 추악한 시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지은이는 103-112행에서 관을 열어 본 시체의 흉악한 모습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읊는다. 살아 있을 때 호의호식하고 남에게 찬미받던 육신이 ‘썩은 강아지’와 ‘썩은 고기’ 같은 형상이 되었으며, 마침내 ‘재와 흙’(118행)이 되고, ‘벌레 밥’(119행)이 되었다고 탄식한다.

 

이 노래를 향유하는 이들이 죽음의 비참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죽어야 한다.’는 선종의 당위성을 노래한다. 이러한 시체와 묘지에 대한 풍경은 이성수가 1900년에 사별한 형 이내수 신부를 추모하려고 지은 천주가사인 ‘이별가’(離別歌)에서도 보인다.

 

석자땅을 집으로삼고 널판쪽을 이불삼아

뗏장으로 천봉지고 쉬파리로 벗을삼아

정결하고 귀한몸을 구더기의 밥을삼아

초목으로 울타리삼고 쉬파리로 친구삼아

붕우친척 있다한들 찾아올이 뉘있으랴

 

지은이는 사제로서 대접을 받으며 살던 형이 죽은 뒤의 참혹한 상황을 한탄한다. ‘선종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천주가사에서도 죽음의 비참함과 인생의 허망함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은 선종의 중요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선종의 전제 조건으로 현세의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죽음이 허망하고 비참할수록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이 더욱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선종을 준비하는 삶이 더욱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선종가’의 말미인 121-124행에서는 이러한 죽음의 비참함과 인생의 허망함을 극복하고 선종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며 노래를 마무리한다.

 

선종을 맞이하려면 영혼의 세 가지 원수(삼구)인 마귀 · 세속 · 육신을 경계해야 한다. 그 가운데 육신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을 죄에 빠뜨리는 ‘마귀’나 ‘부귀영화’, ‘안락 공명’에 물든 세속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육신’이라는 것이다.

 

육신사욕 따르다가 영혼길을 닦을쏘냐

제일원수 육신이요 더러운게 육신이라

고신하고 극기하여 육신먼저 이긴후에

평생성총 얻어입고 선종함을 얻으리라

 

죽음과 동시에 썩어 없어질 육신이 아니라 불멸하는 영혼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곧 장례와 묘지, 시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은 한시적인 육신의 죽음보다 영구적인 영혼의 파멸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점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가르침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이가 영원불멸의 영혼이 아닌 한시적인 육체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듯하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손수 창조하시어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신 사람의 육체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를 통한 안일함과 게으름, 사치와 음욕을 추구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되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자기 육체를 좋게 여기고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죄로 상처 받은 인간은 육체의 반역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자기 육체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요구하고 육체가 마음의 악한 경향을 따르게 내버려 두지 않도록 요구한다”(사목 헌장, 14항).

 

곧 ‘육체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부덕과 악덕이 문제’라는 것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현세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세가 덧없는 눈물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 하는 곳이라고 해서 현세의 삶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더욱이 현세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며 인생이 무상하다고 해서 하루하루를 방일하게 살라는 뜻도 아니다.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하게 살아야 복된 죽음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선종가’의 가르침이다. 죽음 이후의 운명은 현세의 삶에 달려 있으며, 복되고도 영원한 삶을 지향한다면 주어진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이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인식과 묵상은 현세에서의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나침반이 된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백여 년에 걸친 참혹한 박해에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천주를 증거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을 전제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 말이다. ‘선종가’는 오늘날의 우리가 어디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또 신앙 선조들과 같은 순교 영성을 지니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이며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기획홍보위원장으로 계간지 「평신도」 편집장을 맡고 있다. 중국 선교 답사기 「둥베이는 말한다」, 장편 소설 「세 신학생 이야기」 등을 펴냈으며, 「천주가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9년 5월호, 김문태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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