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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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사랑에로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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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22 ㅣ No.1293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사랑에로 부르심

 

 

스무 살이 되던 해, 필자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벌써 28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수도자요, 사제로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나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성소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임을 가슴 깊이 느꼈다. 수도 성소, 사제 성소, 평신도 성소는 직무적인 성소로서 외적으로 구별되는 것일 뿐, 결국 우리 모두는 날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부르심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필자는 8년 가까이 우리 수도원의 성소 담당자였다. 성소 주일마다 강론과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당시 나는 수도 성소가 다른 성소보다 우월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교구 사제 성소, 평신도 성소 등 세상의 그 어떤 성소보다 수도 성소가 더 고귀하고 거룩하다고 여겼다. 물론 자신의 성소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성소를 차등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영적인 교만이었다.

 

흔히들 ‘성소’라고 하면 사제 성소, 수도 성소, 결혼 성소를 떠올린다. 이렇게 분류하면 “그럼 결혼하지 않고 수도자도, 사제도 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은 무슨 성소입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듯싶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주 교회 안팎에서 어떤 범주에 우리를 가두는지 반성하게 된다.

 

성소를 어떤 신분이나 제도 안에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성소를 틀에 가둘 때, 예컨대 수녀님은 일반인과는 달리 티 없이 착하며 순결한 사람이어야 하고, 신부님은 성스럽고 고귀한 사람이며, 결혼 성소를 택한 사람들은 이보다 조금 덜 거룩하지만 성가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 또한 혼자 사는 사람은 부르심에 아무 응답도 못하고 사는 것 같지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미국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토마스 머튼 신부가 성소에 대해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과정은 보편적인 성소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모든 성소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깨닫다

 

1941년 머튼은 엄격한 수도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며, 수도 성소가 다른 어떤 성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승은 특별히 ‘관상’ 생활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느님과 더 가까이에서 사는 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는 아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이었으므로 교회와 세상, 또는 영혼과 육신에 대한 구분이 더 뚜렷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 안에서 수도승들은 세상과는 동떨어진, 더 영적인 삶으로 부름받은 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머튼은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깊이 이루어 가면 갈수록 이러한 생각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이 자신 안에 스며들수록 수도원 봉쇄 구역의 높은 담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생기던 즈음, 1958년 3월 18일 그는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루이빌’에서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의 영성에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로 ‘포스 앤 월넛’ 길모퉁이에서의 체험이다.

 

“루이빌, 포스 앤 월넛 길모퉁이에서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나를 압도하는 듯했고, 내가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 그것은 마치 금욕과 거룩함으로 여겨지는 세상(수도원), 특별한 이 수도원 안에서 차별과 거짓된 자기 위안의 꿈으로부터 빠져나와 이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으며, …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의 개념은 완벽한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수도 서원을 함으로써 수도승들은 다른 존재, 천사들과 같은 이들, ‘영적인 사람들,’ 내적인 삶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망상이었다. … 내가 단지 사람들 가운데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 내가 홀로 있는 것이 그들의 덕분인 것은 내가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이며, 내가 홀로 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낯선 이들은 더 이상 없다!”(「토마스 머튼의 단상」)

 

머튼은 그들과의 신비로운 일치를 체험하며,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체험을 통하여 모든 인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는 ‘차별의 꿈’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인류의 구성원 가운데 한 명’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과 동등해졌으며, 모든 성소도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성소’로 하나가 되었다. 더는 수도 성소가 다른 성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모든 이가 관상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보편적 사랑 안에 모든 성소의 뿌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이 완성되려면

 

교회에서는 성소를 직무적 성소와 보편적 성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물론 직무적 성소는 그 자체로 고귀한 소명이다. 하지만 보편적 성소와 이에 대한 응답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직무적 성소는 알맹이 잃은 껍데기에 불과하게 된다.

 

모든 고등 종교에는 제도와 사제, 평신도 같은 신분의 구별이 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닌 그 본뜻을 되찾는 것이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무수히 하신 말씀도 바로 이것이었다. 성소의 본디 의미를 이해하고 체험하며 살아갈 때 수도자와 사제, 평신도, 그리고 비신자의 구별과 차별을 넘어 진정한 거룩함의 삶, 하느님께 응답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소의 본뜻은 무엇일까? 먼저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당신과 함께하는 ‘사랑의 삶에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듯이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람 가운데 몇몇 사람을 뽑아 예언자로 삼으셨고, 세상의 무수한 여인 가운데 마리아를 택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열두 사도를 뽑아 당신 제자로 삼으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들을 부르시고 뽑으셨을까? 바로 당신의 뜻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시고, 당신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자, 다시 말해 이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협조자를 택하신 것이다. 그 협조자들은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다.

 

하느님의 협조자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이사야, 베드로, 바오로 성인과 같은 유명한 분들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모든 이가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해 우리는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의 ‘자비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자비의 부르심에 용서로써 응답할 때, 그 부르심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부르심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순간마다 사랑의 응답이 모여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식별의 은총

 

이러한 사랑과 자비에로 부르심에 끊임없이 응답하며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나름대로 응답하며 산다고 할 수 있다. 사제나 수도자로 살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살든, 또는 혼자나 심지어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살더라도 말이다. 부모님이 불교 신자라 자연스럽게 불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또한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침묵과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물 때 그분의 ‘사랑의 힘’과 ‘용서의 힘’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되고, ‘나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식별의 은총’도 받게 되는 것이다.

 

201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에서는 ‘성소 식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소) 식별은 우리 혼자 힘으로 개발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이 아니다. 식별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신중하고 현명하게 수련하면서 길러 나가야 하는 은총이다”(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의안집: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 82항).

 

우리가 자신을 비우며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식별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 그 열매를 맺게 된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로 부르심에 “예.”라고 곧바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먼저 찾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라고 응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날마다 들려주시는 사랑의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며 그 ‘사랑의 마음’과 하나되어 ‘그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눌 때, 이것이 바로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사랑의 응답’이 될 것이다.

 

* 박재찬 안셀모 -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자로 머튼 영성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국제 수도승간의 종교간 대화 기구(DIMMID)에서 아시아 지역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심리학과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토마스 머튼과 종교 간의 대화’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5월호, 박재찬 안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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