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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신유박해(순조 시기): 하느님의 종, 양제궁 마리아들의 기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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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21 ㅣ No.1031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신유박해(순조 시기)] 하느님의 종, 양제궁 마리아들의 기도 생활

 

 

유교를 받드는 조선 왕조에서 궁 안에 살던 왕족 부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을까? 양제궁은 우정국 자리(현 서울 종로구 견지동)근처에 있었는데, 영조가 사도 세자의 후궁 임씨에게 마련해 준 거처였다. 임씨는 본디 궁인으로 입궁했다가 1752년 무렵 사도 세자의 눈에 들어 임신을 하고, 종2품(숙의) 양제에 봉해졌다.

 

세자가 죽임을 당한 뒤 임씨는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몇 년이 지난 뒤 영조는 그에게 양제궁을 지어 주었다. 그는 사도 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빈으로 승격되어 숙빈 임씨라 불린다. 숙빈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았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의 기도 생활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서 활동하던 무렵, 신자 부부 조봉삼과 이조이에게서 난 딸과 서손녀가 양제궁의 궁녀로 들어갔다. 이조이는 딸과 손녀를 보려고 양제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강완숙은 이조이를 통해 양제궁으로의 길을 텄다. 강완숙은 양제궁 부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주문모 신부가 양제궁의 두 부인(정순 왕후의 손자며느리와 증손자며느리)에게 각각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당시에는 강완숙의 집 별채에서 교리공부를 했다. 여러 곳에서 온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신부의 강의를 들었다. 남녀가 함께 토론하기도 했지만, 여성이 주를 이뤘다. 왕족 부인들이 강완숙의 집에까지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들은 때때로 신부를 궁으로 초청하여 강론을 들었다. 마침 강완숙의 사돈인 홍익만의 집이 양제궁과 붙어 있어서 담벼락을 뚫어 신부가 홍익만의 집에서 수월하게 궁을 드나들었다. 신부는 양제궁에 머물기도 했는데, 이때는 홍익만의 집에서 왕래할 수 있는 따로 떨어진 방에 숨어 지냈다.

 

두 부인은 명도회에도 참여했다.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중국 북경에 있는 단체를 모방하여 만든 신자 조직으로 교리 연구와 전교가 목적이었다. 회장 정약종을 중심으로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하부 조직이 여러 개 있었고, 각 회는 지도급 신자들이 분담하여 운영했다. 명도회는 남성과 여성 조직이 따로 있었다. 명도회에 가입하려면 추천할 신자를 먼저 신부에게 알려야 했다. 그렇게 이름을 올려놓고 1년 동안 공부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전교의 성과를 본 다음에야 입회가 허락되었다.

 

명도회 모임은 강완숙, 정약종, 홍익만, 황사영, 김이우 등 당시 교회의 핵심 인물의 집에서 가졌다. 신자들이 모이면 신부가 가서 강론을 했고,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가령, 김범우의 동생인 김이우의 집에서는 7일마다 사람들이 모였는데, 날이 저물면 모였다가 새벽녘에 흩어졌다.

 

첨례 날에는 미사를 드렸다. 아래채 벽장에 ‘예수의 상’을 걸어 놓고 장막을 드리운 채 방석을 깔아 놓으면, 신부가 주인 자리에 앉고 남자들이 둘러 앉아 ‘사서’(천주교 서적)를 외웠다. 집안의 여인들은 창밖에서 방청했다.

 

왕가의 여인들도 이렇게 교리 공부를 하고 미사를 드렸을 것이다. 두 부인의 열성으로 양제궁에 딸린 시종과 궁인들도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양제궁에서 단독 ‘육회’(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자 집회소)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문모 신부의 마지막 은신처

 

왕족 부인들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양제궁을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로 제공했다. 포졸들은 끈질기게 탐색했고 신부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신자들을 고문했다. 강완숙의 여종 하나가 고통을 못 이겨 끝내 자백하고 말았다. 신부의 나이와 용모, 양제궁과의 관계도 드러났다. 그리고 양제궁의 궁녀와 하인들을 고문하는 과정에서 궁인 서경의가 양제궁 부인들의 천주교 입교 사실을 실토했다.

 

이에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는 사도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아직 살아 있음에도 어떤 신문이나 재판도 없이 법적 형식을 거치지 않은 채 그들에게 사사를 내렸다. 그들은 1801년 3월 16일 사형 명령을 받고 4월 4일 사사를 당했다. 정순 왕후는 송 마리아의 시부모인 사도 세자 내외보다도 열 살이나 어렸고, 자신의 손자며느리인 송 마리아보다는 여덟 살 정도 많았다.

 

정순 왕후는 “이들은 ‘정의가 두터운 친척 관계’이지만, 이들부터 법을 적용하여 일반 백성에게 징계를 세우겠다.”며 처형을 감행했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강화도의 은언군마저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은언군은 평소 양제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으나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인은 아니었다.

 

왕족 부인들의 죽음은 그들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던 궁의 여러 나인의 죽음을 불러왔다. 이들도 사형 언도를 받았지만, 나인들은 서소문 밖에 마련된 작은 집에 가서 ‘독약을 받아야’ 했다. 워낙 서둘러 비공개로 처리한 형벌이기에 이들의 수효와 이름, 신앙 고백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왕족 부인인 마리아들, ‘하느님의 종’으로

 

양제궁 부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남들보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배운 대로 실천했다. 마지막 순교의 시간이 다가왔다. 사약을 받은 왕족 부인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자살은 지옥으로 가는 죄가 된다며 독약을 ‘스스로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의금부의 포졸들이 강제로 사약을 입에 부었다. ‘망나니가 목을 쳐주는’ 일반 순교자들과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양반의 격’에 따른 사형에서 그들은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증거했다. 생명의 존엄은 당대 유교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송 마리아는 하늘의 뜻에 어긋날까 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고 전한다. 그는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지만 어느 경우에도 근심스러운 빛을 보이지 않았고, 탄식하는 말조차 없었다. 은언군이 어려운 일을 당해서도 늘 올바로 처신할 수 있었던 데는 부인의 공이 컸다. 은언군 부부는 아들 전계대원군 이광과 며느리 용성부대부인 염씨에게서 낳은 손자가 철종이 되면서 작위가 복구되었다. 고종이 황제가 되고 나서는 이들에 대한 추증(죽은 뒤 품계를 높여 주는 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재판 중이다. 두 마리아의 죽음은 왕실의 첫 순교자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폐쇄된 궁 안에서 숨죽인 실천은 ‘말씀’을 그대로 살게 했고, 이제 세계 교회에 울림을 만들고 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5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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