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성경자료

[인물]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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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02 ㅣ No.4661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이사야 (1)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3)

 

이 환호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외치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주님을 직접 모시는 천사들 - ‘사랍’들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룩하시다!’를 외칠 때마다 우리는 천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11,1)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7,14)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9,5)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52,7)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42,7)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53,5)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이사야서를 자주 읽었습니다. 사도들과 복음사가들은 이사야서를 인용해 복음을 전했고, 교회 초기의 교부들은 그 안에서 성탄부터 수난까지 예수님의 생애를 예언한 말씀들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도 전례 안에서 대림시기와 사순시기에 독서로 이사야서를 집중적으로 읽습니다. 이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에 대해 드디어(!) 나눌 때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서는 1-39장, 40-55장, 56-66장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 중에서 제1부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제1 이사야)이고, 제2부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던 시절(기원전 6세기 중반)의 예언자(제2 이사야)이고, 제3부는 그 이후의 시대에 활동한 다른 예언자(제3 이사야)라고 합니다. 200년이 넘는 간격이 있는데, 한 예언자가 그토록 오래 산 것이 아니라, 뒤의 예언자들이 앞선 위대한 예언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활동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를 한데 묶어 전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원이 되는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결혼도 했고(8,1-4), 제자들도 있었습니다(8,16). 임금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37,2) 그가 임금을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7,1-17; 38,1-8) 임금에게 가서 따져 묻기도 합니다(39,3). 또한 그가 활동한 곳이 예루살렘(6,1; 7,3; 38,1; 39,3)이라는 점, 사제나 고위 관리들과 직접 만나고 그들을 언급하는 말씀을 남겼다(8,2; 22,15-24; 37,2.5)는 데서 우리는 그가 상당한 지위를 가진 자(귀족 가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지위를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임금부터 관료들과 백성들에게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잘 나가던 젊은 귀족 이사야를 이러한 예언자의 길, 때로는 성공하지만 실패를 더 많이 겪어야 하는 질곡의 삶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소명)을 받는 장면 이사야 6장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라는 말로 소명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때 이사야는 성전에서 ‘어좌에 앉은 주님’(6,1)을 뵙습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2-3절) 성전의 문지방이 흔들리고 그 안은 연기로 가득 찹니다(4절). 이는 그가 뵙고 있는 분이 주님이라는 확인입니다. 그분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5절). 그러자 천사 하나가 불타는 숯으로 그를 깨끗하게 만듭니다(6-7절). 그때에 주님이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가리오?”(8ㄱ)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ㄴ) 이사야는 사명을 부여 받고 예언자로 파견됩니다(9-13절).

 

이 안에는 하느님이 진정한 임금이라는 고백부터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요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 안으로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것까지 담겨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과 현인들의 어리석음, 그들에 대한 징벌,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의 역할을 새로운 ‘씨앗’(임금)이 설 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예언자의 책임 등, 예언자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에도, 그 버거운 책무를 이사야는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뵙는 놀라운 체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않고, 하느님을 찾지 않으며 주님을 찬미하지 않는 세태(5절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비판적 생각은 그의 심장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가득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그를 주님의 말씀에 응답해 예언자의 삶을 기꺼이 선택하게 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3; 마태 15,8; 마르 7,6) 우리 시대도 주님을 외면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주님을 찾는다고 성전에 모였지만, 주님의 말씀은 흘려들으면서 우스갯소리나 소문에는 쫑긋하는 귀, 사랑에는 메마르나 비난에는 풍요로운 입술, 자선에는 인색하고 욕심엔 한없는 손, 주님의 가르침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살겠다는 굳은 마음,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말씀을 따라 살며 그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습니다. 오늘도 ‘거룩하시도다!’ 외치는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019년 3월 31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이사야 (2)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유다 왕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가 전한 말씀들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7세기 초의 유다왕국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원전 8세기 유다 왕국은, 우찌야(열왕기의 아자르야) 임금의 시대에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립니다. 그러나 우찌야의 죽음(742년) 이후, 유다왕국은 점차 고대 근동 지역을 흔드는 격랑 속으로 들어섭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새로운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745-727년)가 파괴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즈 임금 시대(736-715)에 아시리아에 저항하고자 하는 북 이스라엘 임금과 시리아 임금은 동맹을 맺고 유다 임금에게도 동참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하즈가 이를 거부하자, 반아시리아 동맹국들은 유다 왕국을 먼저 공격해 옵니다(시리아-에프라임 전쟁, 736-734). 유다 임금은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합니다. 티글랏 필에세르의 개입으로 유다 왕국은 살아남지만, 그 결과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고 맙니다. 아시리아에 계속 저항하던 북 이스라엘 왕국은 결국 멸망합니다(722년).

 

히즈키야 임금(715-686)은 재위 초기 강력한 종교개혁(2열왕 18,4; 2역대 29-31장)을 실행하며 유다왕국의 힘을 키웁니다. 그러다가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 2세가 전투 중에 죽고 산헤립이 제위를 물려받자, 제국의 변두리에 속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뒤에는 새로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에티오피아-이집트 왕국이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말이 팔레스타인의 소국들에 흘러들었습니다. 히즈키야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결국 산헤립은 유다 왕국을 침공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합니다. 위기에 처한 임금은 이사야에게 문의하고 직접 성전에 들어가 기도를 바칩니다. 갑자기 덮친 전염병에 아시리아 군대는 물러가고 산헤립은 왕자들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습니다.(2열왕 18,13-19,37; 2역대 32,1-19; 이사 36,1-37,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이사 6,1)에 부르심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사야는 요탐의 시대에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다가, 아하즈 임금과 히즈키야 임금의 시대에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곧 그가 활동한 시기가 전쟁의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전쟁의 현실과 참상을 묘사하는 말들을 쉽게 만납니다(이사 5,26-30; 8,5-8; 9,4; 13,15-16.18; 15,2-3.6-7.9; 16,10). “그들의 화살은 날카롭고 활시위는 모두 당겨져 있다. 그들의 말발굽은 차돌과 같고 병거의 바퀴들은 폭풍과 같다.”(5,28)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9,4) “발각되는 자마다 찔려 죽고 붙잡히는 자마다 칼에 맞아 쓰러지리라. 그들의 어린것들은 그들 눈앞에서 내동댕이쳐지고 그들의 집들은 약탈당하고 그들의 아내들은 욕을 당하리라.”(13,15-16) “머리는 모두 벗겨지고 수염은 모두 깎였구나.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자루옷을 두르고 지붕 위와 광장들에서는 모두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는구나.”(15,3) “과수원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지고 포도밭에서는 환호도 환성도 울리지 않는다. 포도 확에는 포도 밟는 사람이 없고 흥겨운 소리가 그쳐 버렸다.”(16,10)

 

임금과 대신들은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앞에서 닥쳐오는 강력한 세력에 다른 강력한 세력을 끌어들여 막는 것이었습니다. 아하즈는 아시리아를 불러들였고, 히즈키야는 이집트의 도움을 믿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라는 살아남았지만 전쟁의 폐해와 막강한 조공은 더 큰 부담으로 돌아왔고 피폐함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사야는 다른 힘에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의 힘에 의지하라고 외쳤습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 주님께 대한 믿음,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나라를 지켜주는 힘이며 굳건하게 하는 바탕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의 ‘날개 아래’, 그들의 ‘그늘’로 피하려는 정치적인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시편 91,1.4)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시편 121,5)

 

‘강둑을 넘어 목까지 차올라오는 세찬 강물처럼’(이사 8,7-8) 짓쳐들어오는 제국의 힘 앞에 두려워 떠는 이들의 면전에서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는 만군의 주님만을 거룩히 모셔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해야 할 분이시다.”(8,13)

 

이사야의 목소리는 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 누구의 목소리보다 우선해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며, 세상의 힘들을 견주어 보기 전에 하느님의 힘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사건에 대해 해석할 때 어느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누구의 힘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다들 그런다고 주님의 말씀을 뒤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 주님의 뜻이 아니라, 더 목소리 큰 쪽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며,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쫓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요구하는 오만일 뿐입니다. 믿는다고 하며 세상의 흐름을 그냥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나도 종교를 가졌다.’고 말하는 자기 위안이며 겉치레일 뿐입니다. [2019년 4월 7일 사순 제5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이사야 (3)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집과 건물, 숲과 강, 삶의 터전들이 무너집니다. 아비와 형제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주린 배를 움켜쥔 아이와 여인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어둠 속을 배회합니다. 장터의 소란함과 활기는 사라지고, 눈물과 절규, 비참의 침묵이 잿빛 거리를 채울 뿐입니다. 웃음은 사라지고 차가운 악랄이 지배합니다. 검붉은 칼바람 뒤로 수탈의 쇠갈퀴가 들이닥쳐 남은 것마저 앗아가 버립니다. 절망, 전쟁이 남기는 것은 절망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살던 시절은 이런 전쟁이 벌어지던 때입니다. 예루살렘은 포위당하고 강력한 군대를 앞세운 아시리아 제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북왕국처럼 멸망으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부패와 불의가 판을 쳤습니다(이사 1,21-23; 10,1-2; 28,7-8; 29,15). 희망 없는 시대, 떠밀려 절망의 나락 앞에 서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나서서 새로운 희망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실 새로운 시대, 주님이 보내실 메시아의 시대가 열릴 것이며, 그때는 ‘정의와 공정’으로 다스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판과 경고의 말들 사이에 구원에 대한 말씀들이 등장하는 이사야서의 구성은 마치 전쟁의 어둠 한 가운데서 평화의 새 빛을 선포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2,4ㄴ)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것은 주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2,4ㄱ)

 

주님은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열 새로운 임금-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9,1.5ㄱ) 그는 “평화의 군왕”(9,5ㄴ)이라 불릴 것이고, “공정과 정의”(9,6)로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그 일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열정으로’(9,6) 그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베어지고 넘어져도 남겨질 그루터기(6,13), 거기에서 움터올 새로운 싹(11,1), 그가 바로 메시아구세주입니다. 그는 다윗처럼 주님의 영이 머무는 자(1 사무 16,13; 이사 11,2)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11,2.3)입니다. 정의, 곧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메시아는 정의의 표본(11,5)이 될 것이며, 그 정의로 다스릴 것입니다(16,5; 32,1). 그래서 ‘정당하게 시비가 가려지고 불의가 사라질 것’입니다(11,3-4).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 정의의 성과는 영원히 평온과 신뢰가 되리라.”(32,17) 정의와 공정은 평화로 이어질 것입니다(32,17). 이 평화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짐승들까지 누리게 될 것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11,6-8) 평화의 시대에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 동물과 동물 사이에 생겨난 갈등과 분열(창세 3장)이 다 사라지고 ‘평온과 신뢰’ 속에 어울려 지낼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만이 아닙니다. “광야에 공정이 자리 잡고 과수원에 정의가 머무르리라.”(이사 32,16) 나무들과 자연까지 정의와 공정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까지 평화가 가닿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정이 자리하고 그래서 평화가 넘치는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어떤 세력이나 힘, 나라나 위인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25,9; 26,8), ‘한결같은 심성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에게’(12,2; 26,3.4; 30,15; 50,10)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26,12 참조).

 

평화로 나아가는 첫 조건은 언제나 ‘주님과 이루는 평화’(27,5)입니다. 곧 주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그 화해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1,18) 주님 앞에 서는 것, 거기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43,22-28 참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43,25)

 

사람들은 이사야의 입을 통해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나라와 임금, 땅과 성전을 잃고 머나먼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당신과 화해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언제나처럼 먼저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셔서’(히브 1,1) 우리에게 화해를 청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으나,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기고’(이사 53,4) ‘우리에게서 잘라내려’(53,8) 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53,7) 끌려간 그분은 “자신을 속죄 제물로”(53,10) 내놓았고, ‘우리의 악행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으스러졌습니다.’(53,5ㄱ). 그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치유’를 위해 이루신 일(53,5ㄴ)입니다. [2019년 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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