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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평신도 교회사: 김대건, 최양업 두 기둥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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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1-17 ㅣ No.1003

한국 평신도 교회사 (10) 김대건, 최양업 두 기둥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

 

 

교회는 김대건을 “피의 순교자” 최양업을 “백색 순교자” 혹은 “땀의 순교자”로 지칭한다. 한국교회는 이 두 사도의 기둥 위에 서 있다.(‘순교와 선교’를 주제로 한 가톨릭대 개교 160주년 기념 성화, 장긍선 신부作, 가톨릭대 성신교정 대성당)

 

 

2019년은 기해년으로 기해박해 18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 박해는 전국적인 규모로 이루어졌고, 선교사는 물론 각 지역의 회장 등 교회 지도자들을 모두 앗아갔다. 이로써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사집행은 중단되었고 교리서를 필사해줄 신자들도 부족해졌으며, 천주교 서적이 압수되면서 천주교 도리를 배우기 어려워졌다. 세 명의 선교사로 이루어진 파리외방전교회 제1세대 시기가 마감된 것이다. 조선교회는 1845년 김대건 사제와 함께 들어올 페레올 주교 시대(1843-1853)까지 다시 6년간의 목자 없는 시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1836년에 장차 사제가 되어 돌아올 소년 신학생들이 마카오로 유학을 가 있었다. 그들은 육로로 6개월 만에 마카오의 극동 대표부에 도착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측은 본래 말레이시아에 있는 페낭신학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그곳 신학교의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본부에서 대기하는 선교사들을 통해 가르치기로 결정하였다. 세 소년 가운데 최방제는 믿음과 신심, 우수한 학업능력으로 스승에게 가장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6개월도 되기 전에 위열병으로 선종하고 말았다. 나중에 그의 친형인 최형 베드로가 김대건 부제를 만나 회심하여 선교사를 배로 모셔오고, 병인박해 직전까지 천주교 서적의 인쇄작업을 돕다가 순교하면서 동생이 다 이루지 못한 봉사를 완수하게 된다. 1839년에는 중국의 아편 거래 문제로 마카오까지 안전을 위협받자, 스승과 두 신학생은 필리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당시 소년 김대건은 건강 문제로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그해 겨울 두 신학생은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다. 조선에서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고 고통을 받던 그 시기에 두 신학생도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기해박해 때 그들의 부모, 곧 김재준 이냐시오, 고 우르술라, 최경환 프란치스코, 이성례 마리아는 모두 순교하였다.

 

1842년 프랑스 극동함대의 세실 함장은 조선 국왕에게 교역을 제안할 목적으로, 통역을 해줄 조선인 신학생을 요청해왔다. 마카오에서 학업을 계속하던 김대건이 뽑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김대건은 이 배를 타고 마닐라, 대만, 오송항 등을 거쳐 남경까지 갔다. 그곳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남경조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참관하였다. 그러나 세실 함장의 조선 항해는 결국 좌절되었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상해로 갔고, 백가점에 머물면서 김대건은 신학공부를 지속했다. 김대건은 조선에 들어갈 입국로를 개척하고자 계속 노력하였다. 압록강을 통한 입국이 어려워지자 동북방 입국로를 통한 새로운 길을 모색했으나, 너무 험하고 거리가 멀어 어려움이 있었다. 1844년 겨울 김대건과 최양업은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은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고자 했으나, 조선의 밀사들은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에는 아직도 난관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김대건 부제 홀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양에 집을 마련하고, 배 한 척을 구입하여 상해로 출항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출항 전에도 조선전도와 기해박해에 대한 보고서 등을 정리하여 대표부에 보냈다. 이 배에는 김대건을 선장으로 하여 현석문, 이재의, 최형, 임치화 등 11명의 선원이 탑승하여 우연히도 12사도와 같은 인원이 되었다. 하지만 실상 이 가운데 사공은 넷뿐이고 대부분은 바다를 구경조차 못한 이들이었다. 고된 항해 끝에 상해에 도착하였고, 외국어 능력을 갖춘 김대건이 영국 영사에게 도움을 청해 페레올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만 24세가 넘은 김대건에게 사제서품을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845년 8월 17일 상해 푸동 지역에 있는 김가항(金家巷)성당에서 신부들과 조선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제서품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는 일주일 후인 8월 24일 역시 상해에 있는 횡당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떠난 배의 이름이 처음부터 라파엘호는 아니었다. 상해에서 기다리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조선인들이 타고 온 배를 보고 몹시 놀랐다. 두 선교사는 각기 자신의 편지에 ‘저런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너오다니! 조선인들의 신앙은 놀랍다!’라는 내용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대대적인 배의 수리와 보강을 끝마치고 항해의 수호천사요, 치유의 수호천사인 라파엘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 수호천사의 이름은 효과가 있었으니,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지는 어려움 중에도 강경포구 인근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처음으로 서해안을 통한 입국에 성공했다. 그때가 1845년 10월 12일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고 부활절을 은이공소에서 지낸 후 선교사 입국로 개척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서해안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 개척은 바로 김대건 신부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는 중국 배와 접촉하여 선교사 입국을 위한 편지와 지도 등을 전달하고 6월 5일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해주감영을 거쳐 포도청에 압송되었고 수차례 심문을 받고 서품 13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교회의 기록은 새남터에서의 마지막 강론을 전하고 있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순교한 병오박해 평신도 성인 여덟 명은 대부분 김대건 신부를 돕던 이들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던 성녀들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다, 우술임 수산나, 정철염 가타리나와 회장이었던 남경문 베드로와 한이형 라우렌시오, 옥중에서 세례받은 임치백 요셉, <기해일기>를 완성했던 현석문 가롤로가 그들이다.

 

한편 최양업 부제는 여러 번 조선입국을 시도하다 실패하였고, 1847년경 페레올 주교가 보내준 프랑스어본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장차 79위 복자가 탄생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겨울 13년 만에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는 첫 6개월 동안 3,815명의 신자를 만나 성무활동을 시작하였다. 한여름 쉬는 때는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글서적 집필을 도우면서 틈틈이 순교자 행적도 조사하였다. 또한 <천주가사>를 통해 구전과 노래로 신자들이 천주교 도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어려운 전교환경 속에서도 두 가지 풍습이 전교에 유용함을 짚어냈습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순교한 병오박해 평신도 성인 여덟 명은 대부분 김대건 신부를 돕던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들을 구하러 감옥에 들어갔다가 김대건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순교를 결심한 임치백 요셉 성인도 포함되어 있다.(‘옥중 영세’, 탁희성作)

 

 

“현재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오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의 초상부터 탈상까지 입어야 되는 상복의 풍속과 한글이 전교활동과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을 줍니다. …첫째, 상복이 전교활동을 도와주는 풍속입니다. …이러한 풍속은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을 위해 발명된 도구라 할 만합니다. 만일 이러한 풍속이 없었더라면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이 전교하기 위해 한 발짝도 외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에 머물러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둘째,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가운데서)

 

최양업 신부는 11년 6개월간의 사목생활 끝에 1861년 6월 15일 과로와 장티푸스까지 겹치면서 문경, 배티 인근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교회는 김대건을 “피의 순교자” 최양업을 “백색 순교자” 혹은 “땀의 순교자”로 지칭한다. 한국교회는 이 두 사도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김대건은 짧고 굵은 생애로 “순교의 피”라는 제단을 한국교회에 크게 세웠고(대건大建), 최양업은 정성된 성무활동을 통한 땀의 순교로 한국 평신도들에게 선한 업적(양업良業)을 남겨주었다.

 

* 조한건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다.

 

[생활성서, 2018년 11월호, 조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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