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 10대 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14 ㅣ No.997

역대 교구장 (10) 10대 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1942년-1967년)

 

 

올 한 해 동안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에 대해 아주 작은 퍼즐이라도 함께 찾아보고, 그분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직접 찾아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서울대교구가 있기까지 헌신하신 교구장들의 삶이 주는 울림을 전합니다. 우리가 찾은 서울대교구 열 번째 교구장님은 노기남 대주교입니다.

 

노기남 주교님에 대해 정리되어 있는 글을 찾다 보면 굿뉴스 안에서 「경향잡지, 2017년 8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의 1942년 한국인 주교의 탄생」이란 글에 정리된 표현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1845년에서부터 97년이 지난 194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명동 본당의 노기남 보좌 신부였다.”

 

여기에 약간의 사실을 추가하면,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그 뒤로 97년이 지난 194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주교님이 탄생하고, 그 뒤로 27년이 지난 1969년에는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께서 탄생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최초의’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순간들은 이미 파리외방선교회가 서울대목구를 담당하였던 그 순간에 이미 예견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노기남 주교님이 교구장으로 계실 때에 우리나라는 정말 큰일을 많이 겪어냈습니다. 일제 말기와 광복, 6.25 전쟁, 휴전협정까지 1942년~1953년 근 10여 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간절했던가를 생각하게 하고, 동시에 교회는 그 힘든 상황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하였을까요?

 

한국교회 초기에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을 보내고 한국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신 노기남 주교님이 안계셨다면 2018년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렇게 힘든 시기에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고 사람에 투자한 분이 계셨기에 서울대교구는 지금 신부님 900명으로, 큰 교구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전쟁통에 나라가 둘로 나뉘고 복구에 엄청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외국에 직접 나가서 발로 뛰셨던 주교님이 안 계셨다면 그 적극적인 원조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신자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때라고….’

 

‘1962년 3월 한국교회 교계제도를 설정하고 서울, 대구, 광주 관구가 설립되고 동시에 노주교님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昇品) 되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님을 기억합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님으로서 주교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일들을 해 주시고 서울대교구를 지켜주셨음을 기억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주교님.

 

· 1930년 10월 26일 서품.

·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주교 성성식.

·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교구장.

· 광복 전후의 격동기에 슬기롭게 교회를 이끌었으며, 노력을 더하여 1962년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도록 함.

· 1984년 6월 25일에 선종하여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장됨.

 

[2018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서울주보 4면, 이도행 토마스 신부(홍보위원회 사무부국장),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50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