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수도 ㅣ 봉헌생활

프란치스칸 영성 –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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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29 ㅣ No.610

프란치스칸 영성 – 평화 (1)

 

 

과거에도 프란치스칸 가족 안에 정평창보(정의 · 평화 · 창조질서보존)위원회가 있었지만, 실제로 정평창보 문제가 부각된 것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형제들 상호 간(성직 형제와 평형제 간)에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작용했고, 잘못한 형제들에게는 체벌이 있을 정도로 정의 혹은 평화와 관련이 먼 요소들이 있었다.

 

그랬던 것이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평창보 문제를 많이 다루는 오늘날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 과정 자체를 프란치스칸적 정평창보의 개념이라 이름 짓는 것은 무리다.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생각했고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는가를 먼저 찾아내야 한다.

 

 

통합의 결실로서의 평화

 

평화는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할 때만 유지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면 하느님을 떠난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귀의해야 한다. 이것이 제2의 창조이고 인간에게 이루어지는 구원의 길이다. 이렇게 평화는 하느님과의 화해와 생활의 회개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프란치스코가 지녔던 평화는 하느님 체험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가난의 삶으로부터 그 바탕을 찾을 수 있다. 프란치스코의 평화는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은 다 선물’이라는 강한 의식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프란치스코처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선물이라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의식한 것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산이 유럽인들의 DNA 속에 전해져 내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나일강 가에서 수천 년을 살면서 먹을 것을 주는 것, 나일 강가에 꽃이 피게 해주는 것, 바로 태양을 섬겼다. 그들에게는 태양이 신(Ra)이었다. 다음 그림을 보면 기원전 1330년경 <그림 1>에서 태양신으로부터 손들이 퍼져나오는 것과 기원후 <그림 2>에서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이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것이 어떤 것이든 소유한다는 것은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질투,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돌려드릴 것이 없기에 십자가를 돌려드리게 된다고 하였다.

 

평화란 하느님의 것인 모든 선을 홀로 선하신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이로써 하느님의 질서가 회복될 때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질서란 하느님이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미와 감사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일하셨으니 그 대가를 받으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존엄한 존재이기에 서로가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식탁에는 자주 나오고 절대로 구걸하러 나가지 않는 형제를 파리 같은 형제라 책하였다.1) 그 형제는 다른 형제에게 자기 몫까지 구걸해 오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씨 착한 형제라면 전에 자기 몫까지 구걸해준 형제에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좀 쉬라하고 자기가 그 형제의 몫까지 구걸하러 나갈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이 많지만, 프란치스코의 평화는 그의 고유한 사명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 평화를 전달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참으로 좋으심 즉, 선하심을 강조하였다. 성인의 신심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어떤 것에도 만족함 없이 창조주께 모든 것을 돌려드릴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알고 평화롭게 산 프란치스코는 창조된 어떤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상황이 프란치스코에게는 주는 자로서 ‘위대한 자선가’로서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프란치스코는 이를 절실히 체험함으로써 결국 가장 위대한 하느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껴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으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을 살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계속되는 기쁨으로 넘쳤으며,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고, 그분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늘 가까이서 체험한 프란치스코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경이로움과 친교로 반영되었다. 프란치스코에게 비친 피조물은 그저 단순한 창조물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는 질서와 조화를 느꼈으며, 창조된 존재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을 보았다.

 

피조물에는 창조하신 분의 표가 새겨져 있으며 그분의 사랑, 관용, 그리고 그분의 모든 특성이 들어있음을 프란치스코는 느꼈다. 또한 피조물을 있게 한 근원 및 기원이 한 분 하느님이심을 인식하였기에 모든 피조물을 형제 혹은 자매로 불렀다.

 

프란치스코가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이여!”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였다. 즉,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을 특별한 방법으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인간관계를 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 보나벤투라가 <하느님께로 향하는 영혼의 여정>에서 적합하게 묘사한 바와 같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神)-인(人)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죽음에서 예수는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수용력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하려 하였으며, 기쁨에 넘치는 아낌없는 사랑의 발로를 공유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고요, 진정한 평화를 체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기도를 드린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기도로 변화시켰으며 매우 열성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의 관상과 생활을 통합시켰다. 그의 내적 평화는 증거와 봉사로 흘러나왔으며,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 즉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평화의 하느님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주1) “파리 같은 형제여, 당신의 길을 가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일은 하지 않고 형제들의 땀만 빨아먹으려고 합니다.”(2첼라노 75) [성모기사, 2018년 8월호, 최우식 프란치스코(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성모기사회 전주지구 담당)]

 

 

프란치스칸 영성 – 평화 (2)

 

 

평화에 이르는 길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내어 주고 사랑을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썼을 때, 지구는 그의 집이 되고 모든 피조물은 그의 형제자매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주위와 그 안에 있는 세계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었으며 진실로 겸허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살았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은 그가 평화를 지향하는 원천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가난 부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만민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평화였다. 평화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것이 프란치스칸 선교 사명의 본질인데, 이는 모든 덕행의 근본으로서 가난을 따름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평화를 전하고 이룩하기 위해서 복음을 원천으로 하고 복음에서 밝혀진 가난에 근본을 두었으며, 이 가난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겸손, 그리고 단순함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즉 평화에 이르려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사랑, 겸손 그리고 단순함을 통하지 않고서는 평화에 이를 수 없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세 가지 길을 묵상하고 삶을 살아감으로써 평화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성모기사, 2018년 11월호, 최우식 프란치스코(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프란치스칸 영성 – 평화 (3)

 

 

성령과 복음

 

프란치스코 영성의 바탕은 성령과 복음이다. 프란치스코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유언 14)라고 말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누린 자유와 평화는 그 기원이 성령의 체험에 있다. 성령은 자기중심적이고 악덕과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지닌 낡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성부께 승복하며, 성령께 순명하고, 그리고 성자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도록 남을 위하여 자유로워지게 한다.

 

프란치스코는 성령의 힘으로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어 힘을 얻고,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받기를 열망하였다.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이 길을 제시한다면, 그 길 이상의 더 좋은 길을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생각해 낼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개인적으로 직접 자기에게 주어진 듯 절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는 합리적인 분별력에 의존하기보다는 복음에서 출발하여 삶의 방향을 잡고자 늘 노력하였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평화란 공상적인 꿈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일이며 목표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을 내리고 이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해석과 계획이 그에게는 하나의 생활방식이었으며, 사상에서보다 그의 실천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평화에 대한 저항과 소외의 깊이와 서로 반목하는 인류 집단 사이에 놓여 있는 ‘적대감의 담’에 대한 인식에는 이와 더불어 평화의 진귀함에 대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본성에 의해 저질러진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인간의 마음속에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기에 평화는 값비싼 화해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 평화는 서로 분리되어있는 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 즉 대속(代贖)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대속적 행위였다. 이러한 평화의 대가를 기꺼이 치르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뿐만 아니라 화해된 공동체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대속 활동을 계속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당신 제자들에게 평화의 유산을 넘겨 주었을 때, 그리고 진복 팔단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내세웠을 때, 이것이 안정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값비싼 행위를 계속하라는 초대였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성모기사, 2018년 12월호, 최우식 프란치스코(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프란치스칸 영성 – 평화 (4)

 

 

가난 - 사랑과 겸손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는 세속적 가치(돈, 명예, 권력, 성적 만족 등)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며 오히려 행복해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부러운 것이야 많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본다. 물론 그들이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따먹지 못하는 감을 바라보며 저 감은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가난은 모든 성덕의 근원이다.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곧 포기한다는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는 자기 몫을 포기하는 아픔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가난은 자기로부터의 이탈을 통한 하느님 은총에 대한 개방을 말한다. 이는 자기비하 및 비움을 의미하는 겸손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가난은 사랑과 겸손을 낳으며, 이를 통하여 가난을 실천하는 자체가 하느님 안에 깊이 동참하며, 그분을 만나고 은총의 선물로서 평화를 지니게 되는 것을 뜻한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에 따라서 자기 생활을 하느님께로 돌리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회개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 특히 나병 환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그는 가난을 항상 그리스도의 삶에 직결된 것으로 여겼으며, 가난과 고통을 한 몸에 지니신,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고통 중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의 역사적 구현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포옹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난은 세상의 죄를 대신해 걸머지심과 동시에 죄의 원인이며 원흉인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온화한 미소에 편안해 보이는 부처님과는 달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누구나 예수님을 동정하게 된다. 프란치스코도 예수님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겼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폐허 상태에 있던 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깨달았을 때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 대한 거룩한 연민의 정이 그의 영혼에 깊이 새겨졌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할 때, 온유한 연민의 정은 그를 변화시켜 스스로 십자가에 수난하기를 바라는 자가 되게 하였다. 그가 겸손되이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 놓도록 인도한 것도, 그리고 온갖 피조물과 인간과의 조화를 회복시킴으로써 그로 하여금 원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것도 역시 이 ‘사랑에 찬 동정심’ 바로 ‘연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평생에 걸쳐 예수님의 육화, 그리스도의 낮아짐,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짐승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억울하고 불쌍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닮고자 하였다.

 

자신을 낮추어 내려가다가 그당시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나병 환자에게까지 내려가고, 그곳에서 더 내려가다가 짐승과 풀, 나무와 물질에게까지 내려가 맞닿았으며, 누나인 ‘죽음’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한 그는 마침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되돌리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텅 빈 삶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겸손의 모범인 육화는 하느님과 공감하고 한 마음이 되는 신비이며,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하여 하느님의 대가족 가운데서 형제자매로 통합하는 길잡이였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형제인 그리스도에의 사랑에 찬 동정심에서 발전한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존엄성의 확인이었다. 피조물은 사랑받아야 한다. 단 사랑으로 인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을 금하는 가난의 정신과 함께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사랑해야 한다.

 

 

단순함

 

단순함은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올바른 길이며 하느님을 직관하는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에게 감추신 것을 당신의 종에게는 보여 주셨는데, 그 길이 단순함 또는 단순성이다. 단순함은 자신의 흠을 개의치 않고 하느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쏠리게 하여 직접 하느님을 뵙도록 인도한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단순함은 마음의 가난함과 의로움의 열매이다. 또한 일치를 뜻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자기가 복잡하게 풀어나가야 할 추상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뢰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이런 관점은 현실을 사는 사람들한테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실로 프란치스코는 이 때문에 오해를 받았다. 한번은 다른 형제들이 그에게 분별력을 갖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지적했을 때 “형제들이여, 주님께서 친히 나를 단순함의 길로 부르셨고, 단순성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단순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정화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지며, 덕행으로 진리를 구하며 교만과 허식에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나벤투라는 그의 저서인 삼중도에서 하느님의 복되심에 참여하는 천상적 복락을 이야기하면서 복락을 평화, 진리, 사랑 세 요소의 복합체라 표현하고, 여기서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화의 길을 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단순함이 하느님을 뵙도록 인도하는 길이기에 단순함으로 사는 사람,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으며 평화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프란치스코가 남긴 작품을 보면 그는 평화와 일(노동)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유언1)

 

《유언》에 나타난 평화는 얼핏 보기에 ‘일’과 ‘가난’이 언급되는 항목의 가운데에 부자연스럽게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렇게 언급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평화가 내포하고 있는 바가 다른 어떠한 개념보다도 의식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가난이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인 위치는 부정할 수 없다. 세련되고 원숙한 작가이기보다는 오히려 시인인 그의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가 평화의 중요성을 잊은 채 작품을 서술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록 덧붙여진 듯이 평화가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프란치스코가 말하고 실천한 그 평화는 결국 하느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여 주신 것으로 나타난다. 일과 평화가 하나의 내용으로 서술되면서 ‘형제들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평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재를 바라보는 프란치스코의 관점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평화임이 유언에 드러나 있다. 프란치스칸 학자인 카예탄 엣세르(C. Esser)는 이에 대한 주석에서 사실상 ‘일의 태도’에 관한 항목의 계속적인 진술로서 평화가 취급되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이 두 단락이 잇따라 서술되면서 하나의 중요한 권고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일에 대한 권고가 다소 어색할 정도로 하나하나 조목조목으로 말하여지고 있는 반면 평화에 대한 권고는 표현의 단순함으로 한결 더 깊은 감명을 준다는 것이다.

 

태양 형제의 노래2)

 

이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존재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행동양식에 의해서도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고, 그들이 용서를 청하고 시련을 겪을 때, 그리고 평화로이 참을 때,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는 더 한층 높이 들어 높여지고 계속된다는 것이다.

 

만일 용서하는 것이 능동적인 면으로 보이고, 참는 것이 수동적으로 보여진다면, ‘평화로이 참는 것’은 두 가지 면의 조화일 것이다. ‘평화로이 참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평화’와 ‘인내’가 종종 함께 발견된다는 것이다. 참는 것은 피조물의 행동양식이다.

 

‘평화로이 참는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유언》에서 보았던 것처럼 ‘평화로이 참는다는 것’은 평화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프란치스코의 양식이다. 이 평화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말하는 《유언》과 《태양의 노래》 두 항목에서 평화추구는 매우 힘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는 ‘일’로부터 태어나고,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고통의 측면을 지닌 참을성과 인내의 시험인 것이다. 평화는 오직 하느님과 함께 말해지고 발견될 수 있으며, 실천을 요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정말 의로운 자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인내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늘 피조물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진정 정평창보(정의 · 평화 · 창조질서 보존)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피조물과 더불어 드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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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리고 나는 내 손으로 일을 하였고 또 지금도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도 올바른 허드렛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일의 보수를 받을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고 한가함을 쫓기 위해서 일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의 보수를 받지 못할 때에는 집집마다 동냥하면서 주님의 식탁으로 달려갑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인사를 주님께서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형제들은 성당과 초라한 집 그리고 형제들을 위해 세운 모든 건물이 우리가 회칙에서 서약한 거룩한 가난에 맞지 않으면 그것들을 절대로 받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며, 거기서 나그네와 순례자같이 항상 손님으로 머무십시오.(유언 20-24)

 

주2) 내 주님, 당신 사랑 까닭에 용서하며, 병약함과 시련을 견디어 내는 이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평화 안에서 이를 견디는 이들은 복되오니 지극히 높으신 이여, 당신께 왕관을 받으리로소이다.(태양 형제의 노래 23-26) [성모기사, 2019년 3월호, 최우식 프란치스코(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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