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녀원 창가에서: 화가 풀려야 인생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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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14 ㅣ No.609

[수녀원 창가에서] 화가 풀려야 인생이 풀린다

 

 

분노의 감정은 생각 기차를 타고

 

큰 수도원에서 청소 봉사를 해 주시던 자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녀님들은 기도만 하며 조용히 사시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으신지 정말 바삐들 사세요.”

 

수도 생활을 바라볼 때 마치 유토피아나 천국의 삶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로 활동 수도자들은 사도직 안에서 많은 이를 만나며 바삐 살아간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다 보니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거기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 뭐 그리 다름이 있으랴. 수도원도 세상 사람들이 겪는 것과 비슷하게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그 가운데 분노는 인간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수도 생활 20년, 30년이 지나도 사람의 성향은 그리 바뀌지 않음을 함께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이렇듯 각자의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수도 생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자주 갖다 보니 자신의 약함을 조금은 빨리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전에 한 수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 일어난 뒤 빨리 화해하지 않으면 관계 회복은 그만큼 더디고 어려워져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화해하세요.” 그렇다. 인간관계에 금이 간 것을 방치한 채 지내면 결국 그 상대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생각 차이로 서로 얼굴을 붉힌 상황은 이미 지나 버린 과거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지나간 것에 마음을 두고 지난날의 그림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화가 났던 지난날의 일을 곱씹으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아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생각이 들어도 종래 화가 났던 상황과 유사한 일에 부딪히면 또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게 우리들이다.

 

우리가 분노의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는 건 언제 분노가 일어났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화의 메커니즘이 내 안에서 너무 빨리 일어난다는 데 있다. 우리는 화를 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화낸 사실을 인지한다.

 

처음 올라온 분노의 감정은 생각 기차를 타고 계속 달려가면서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 버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화해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될 수 있으면 빨리 화해해야 하는 이유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틱낫한 스님이 방한하셨을 때 다음과 같은 화해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먼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이다. 이때 “너 때문이야.”라고 말해선 안 되고, 그저 자신이 지금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화해에 매우 중요하다.

 

그다음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돌보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리기’이다. 분노는 아이와 같아 돌봄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는 게 화를 돌보는 것인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명상을 들 수 있다. 이 명상은 화가 난 다음에도 실제로 도움이 되지만 화가 났을 때에도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분노 에너지를 크게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가급적 빨리 화나게 한 장소를 떠나면 일단 분노가 증폭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격렬한 분노의 감정은 폭풍과 같아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이 폭풍과도 같은 감정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분노는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분노는 지나가는 것이고 감정일 뿐이다. 감정은 나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감정 이상의 존재다.

 

호흡 명상을 한 뒤 상대와 이야기할 때 대화의 주어를 ‘너’가 아닌 ‘나’로 시작하라. ‘너’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말은 핀잔을 주거나 트집을 잡기 마련이다. 그 반면, ‘나’로 시작하는 말은 나의 느낌이나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곧 “당신 때문에 내가 화가 났어요.”가 아니라 “나는 지금 당신이 한 말로 힘들어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 상태와 그 감정을 돌보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리고 난 뒤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라. 그것이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이다.

 

 

사랑의 완성은 용서로

 

몇 년 전 서강대에서 ‘수양과 명상’ 과목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그 과목은 불교 명상과 그리스도교의 기도 방법을 소개하고 함께 명상 실습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해 종교학과 석사 과정의 목사님 한 분이 내 과목을 청강하셨다. 열심히 명상하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각자가 한 명상에 대해 나누는 시간, 목사님은 이렇게 나누셨다. “오늘 저는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아이는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먼저 화해해야 할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이다. 자신 안에 고통받고 상처받은 아이가 있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기 안에 상처받은 아이를 발견했다는 목사님의 말씀은 “분노는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하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랠 유일한 방법은 아이를 안아 주고 보듬어 주는 일이 아닐까. 어머니와 같은 자애의 에너지로 자신을 다독거려 줄 때 비로소 우리는 분노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분노는 결국 미움과 증오를 키우기 마련이다. 미움을 택할지 용서를 택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미움을 택할 때 나는 평화를 잃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용서는 너를 위하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용서하거나 용서를 청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화가 풀려야 인생이 풀린다.” 그렇다! 내 안에 화가 쌓였다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종전의 일로 왜곡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멈출 수 있는 길은 용서가 아닐까. 예수님께서 용서를 그토록 강조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정호승 시인은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용서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용서해야만 ‘분노의 기억’이 ‘화해의 기대’로 바뀔 수 있다.

 

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남북 간 냉전 체제가 북미 회담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상대를 향한 분노와 적대의 감정을 내려놓고 화해와 대화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씀대로 우리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주변부터 화해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분노를 내려놓고 화해하며 용서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죽는 날까지 애써야 할 영성의 정점이 아닐까.

 

* 최현민 엘리사벳 - 사랑의 씨튼 수녀회 수녀. 종교대화씨튼연구원장이며 「영성생활」 편집인이다. 일본 난잔대학 종교문화원과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8월호, 최현민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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