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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교구 설정 90주년: 잊힌,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연길 교회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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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15 ㅣ No.976

[연길교구 설정 90주년] 잊힌,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연길 교회 어제와 오늘 (상)


척박한 땅에 핀 복음화의 꽃… 공산화로 사라져

 

 

- 1928년 7얼 19일 연길지목구 설정 당시 한국 천주교회 관할 지도. 이에 앞서 그해 7월 3일 성 베네딕도회에 위탁되면서 설정된 빈강성(현 헤이룽장성) 동부 의란지목구도 함께 그려져 있다.

 

 

19일로 연길교구가 교구 설정 90주년을 맞는다. 교회를 나무에 비유하면, 연길교구는 1831년 설정된 조선(서울)대목구를 시작으로 대구대목구(1910년)와 원산대목구(1920년), 평양지목구(1927년)로 이어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다섯 번째 가지다. 

 

1928년 7월 19일, 지목구로 닻을 올린 연길교구는 1937년 4월 13일 대목구로 승격했고 1946년 4월 11일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교구 승격과 동시에 펑텐(공산화 뒤 선양으로 개칭) 관구, 현재의 랴오닝관구에 강제 병합됐다. 온전히 독립 교구로 현존한 시기는 길게 잡아도 19년에 불과했다. 교구는 한 번 설정되면 폐지되는 건 아니지만 ‘연길의 봄은 짧기만 했다.’ 1946년 6월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군한 뒤 교구 전역이 공산화했다. ‘잊힌,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연길 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두 차례로 나눠 돌아본다.

 

 

1928년 7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에 교황청 문서 한 통이 날아들었다. “7월 19일 자로 새로운 자립 선교구로서 연길지목구의 창설을 인준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성 베네딕도회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 연길지목구를 위탁했다. 사실 이 문서는 바티칸이 일본제국에 던진 승부수였다. 

 

당시 연길 선교지를 관할했던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요청으로 새로 설정하는 연길지목구를 중국 베이징 주재 교황사절 관할에 두지 않고 일본 도쿄 주재 교황사절 관할에 뒀기 때문이다. 이로써 연길지목구는 선교 초창기부터 간도를 관할해온 한국 교회의 일원이 됐다. 

 

지목구 설정 당시 간도 교회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원산대목구에서 분할된 직후 1928∼29년 연길지목구 교세는 굉장한 선교 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되는 시련에도 테오도르 브레허(백화동) 주교아빠스를 중심으로 한 연길교구 공동체는 간도 선교에 매진했다.

 

 

당시 연길지목구는 간도성(현 지린성 동부) 화룡ㆍ혼춘ㆍ연길ㆍ왕청현과 지린성 돈화ㆍ액목현, 빈강성(현 헤이룽장성 동부) 녕안ㆍ동영ㆍ목단강현 등 9개 현을 관할했는데, 인구 80만 명에 신자 수는 1만 2257명으로 복음화율이 1.53%에 달했다. 사제는 15명, 본당은 8곳, 공소는 147곳, 영세자는 1065명, 예비신자는 582명, 회장은 196명이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연길지목구를 분가했던 원산대목구 교세와 비교하면 간도 선교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원산대목구는 관할지역 인구가 220만 명으로 연길지목구에 비해 3배 가까이 많은데도 사제 16명, 본당 6곳으로 엇비슷하고 신자 수는 2922명으로 간도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복음화율도 0.13%에 그쳤다. 

 

그러나 간도는 실상 ‘살기도 힘들뿐더러 척박하기만 한’ 선교지였다. 너른 만주벌 허허벌판 혹한과 굶주림으로, 일제 강압과 수탈로, 마적 떼의 잦은 출몰로 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같은 사정은 1928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간도에 파견돼 20여 년을 간도 선교에 투신한 코르비니안 슈레플 신부의 자서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분도출판사)에 잘 드러난다.

 

연길 성 십자가 대수도원(왼쪽)과 연길하시성당 전경. 전형적 독일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수도원으로, 수도원 안에 주교관과 교구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연길하시성당은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제지로 종탑을 크게 올리지 못하고 지붕과 같은 높이로 올렸다.

 

 

“만주는 너무나 춥고 거칩니다. 하느님이 버린 쓸쓸한 땅이라고까지 혹평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용기를 북돋우며, 하느님 뜻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연길교구가 불꽃과도 같은 신앙의 역사(役事)를 일으킨 데는 선교의 선구자들이 있었다. 

 

‘간도의 사도’ 김영렬(세례자 요한, ?∼1931) 등 ‘간도 12사도’들이 그 주역이다. 

 

1931년 완공된 연길교구 합마당성당은 연길교구 성당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성당으로, 문화혁명시기에 외양간으로, 기름공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방치돼 있다.

 

 

1895년 3월 동학 농민전쟁으로 스승 김이기(?∼1895)가 함북 회령군 관아에서 처형당하자 동학도였던 김영렬은 평소 스승이 권하던 서학을 공부하고자 1896년 4월 서울로 향하다가 원산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조제프 베르모렐 신부를 만나 3주간 교리를 배운 후 그해 5월 17일 세례를 받고 개종한다. 세례를 받고 나서 고향 간도 호천포(현 회경촌)로 돌아온 그는 1898년 용정 근처에 간도 교회 사상 첫 공동체인 ‘대교동공소’를 세우고 훗날 ‘간도 12사도’로 불리는 최규여(그레고리오)와 박연삼(루카), 김진오(바오로) 등과 함께 선교에 힘쓴다.

 

이같은 선교 활동으로 1909년 간도 교회 첫 본당인 영암촌(삼원봉으로 개칭)ㆍ용정(용정하시) 본당이 설정됐고, 1928년 연길지목구 설정 당시에는 팔도구(조양하)ㆍ연길(연길하시)ㆍ육도포(팔지)ㆍ혼춘ㆍ대령동(차조구 이전)ㆍ돈화 등 본당 6곳이 더 설정돼 총 8곳에 이르게 됐다.

 

지목구 설정 이후 간도 교회 선교는 더욱 활발해졌다. 1951년 판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편람」을 보면, 8개 본당으로 출발한 연길지목구는 화룡(대랍자)ㆍ왕청(백초구)ㆍ두도구ㆍ옹성랍자(명월구, 안도)ㆍ연길상시ㆍ목단강ㆍ신참ㆍ용정상시ㆍ삼도구ㆍ합마당ㆍ도문 본당 등 11개 본당이 새로 설정, 총 19곳의 본당을 운영했다. 해방 즈음에는 신자 수가 1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연길교구 첫 사제인 김충무ㆍ한윤승 신부를 비롯해 이태준ㆍ김성환ㆍ한도준ㆍ허창덕ㆍ박태산 신부와 김남수(전 수원교구장) 주교 등 9명의 조선족 출신 성직자를 배출했다. 지목구 설정에 앞서 1927년 11월 설립된 성 베네딕도회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은 1934년 8월 1일 자로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돼 간도 복음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혼춘본당 수녀원 객실은 오전에는 진료소로, 오후에는 교리실로 쓰였다.

 

 

그러나 간도 교회는 지목구 설정 직후부터 거듭된 시련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30년 5월 간도대폭동 사태,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됐다. 시골 신자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성당은 이주해온 신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마적들의 약탈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선교사가 생명을 잃었다. 교회는 대처 방안을 찾지 못했다. 지목구 내 공소 147곳 중 130곳이 문을 닫아야 했고, 본당 공동체 침체도 거듭됐다. 1931년 삼원봉(구 영암촌) 본당은 외교인들의 난동으로 현청 소재지인 대랍자로 이전해야 했다. 같은 해 돈화본당도 마적과 일본군의 횡포로 일시 폐쇄됐다.

 

1932년은 특히 간도 교회사에서 ‘비극의 해’였다. 1932년 육도포본당은 공산당의 기습으로 트라버 주임 신부가 피신하면서 혼춘본당 관할이 됐다가 1934년 폐쇄됐다. 1932년엔 팔도구본당 보좌로 있던 엠멀링 신부가 장티푸스에 감염돼 숨졌다. 대령동본당 주임 아쇼프 신부와 대령동 보좌 뮐러 신부 역시 장티푸스로 같은 해에 목숨을 잃었다. 부감목(지금의 총대리) 랍 신부도 술에 취한 일본군에게 1932년에 피살됐다. 

 

시련은 거듭됐지만, 간도 교회의 선교는 계속됐다. 마적들의 성당 기습과 공산당의 방화, 외교인들의 박해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브레허 주교 아빠스를 중심으로 한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과 연길교구 공동체는 간도 선교에 매진, ‘아프고도 아름다운’ 복음의 꽃을 피워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15일, 오세택 기자,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연길교구 설정 90주년] 잊힌,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연길 교회 어제와 오늘 (하)


죽음으로 지킨 ‘신앙의 불씨’에 성령의 바람이

 

 

1946년부터 2년간 중국 공산당에 억류됐던 알빈 슈미트 신부가 자신의 남평수용소 시절을 재현한 삽화. 수도자들이 밭을 갈고 장작을 쪼개고 통나무를 베는 노동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봄은 짧고, 겨울은 길었다. 1945년 8월, 일본 관동군이 패주하고, 소련군이 진주했다. 관동군이 지배하던 만주의 도시들은 화염에 휩싸였고 잿더미로 변했다. 

 

연길교구 선교 또한 갈림길에 섰다. 

 

그럼에도 연길대목구장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아빠스는 “선교사는 남는다”는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선교지에 남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만주를 비롯한 대륙 전역을 장악하며 선교의 꿈은 아득해졌다. 기나긴 수난의 서막이 올랐다. 선교사들은 사제관과 수녀원에서 체포됐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도 결국 몰수됐다. 포도밭은 파괴되고, 어두운 밤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길은 구원과 부활을 잉태한 은총의 길이 됐고, 연길 교회는 되살아나고 있다. 연길 교회의 수난과 부활의 꿈을 돌아본다.

 

 

주님의 포도밭은 무너지고 

 

“우리는 공동체가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 슬픔은 직접 신자 공동체를 돌본 사목자만 느낄 수 있다. 안으로는 아직 튼실하지 못한 공동체, 밖으로는 성당과 학교에 수년간 공들여 이룩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우리 포도밭이 무너지고, 텅 비고, 황폐해지는 모습을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 부서진 성당에서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 결국, 지성소를 지켜내지 못했다….”

 

2008년 주일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서는 할머니들과 연길본당 주임 염창원(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DB.

 

 

1945년 말 간도 교회 상황을 「연길 연대기」는 이렇게 전한다. 

 

1945년 9월 팔도구본당 엥겔만 젤러 수사가 소련군에게 총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선교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체포되고,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굶주림과 박해 속에서 죽어갔다. 

 

1946년 4월, 국제적 비난을 우려해 그나마 수도원을 보호하던 소련군의 철수는 연길교구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그해 5월 팔로군(훗날 중국인민해방군)이 수도원에 들이닥쳐 수도자들을 체포, 투옥했다. 독일 국적 수도자들은 나치로 몰렸고,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고발됐다. 

 

수도자들은 연길 감옥과 화룡 삼도구성당을 거쳐 삼도구에서 50㎞가량 떨어진 조ㆍ중 접경 남평수용소에 억류됐다. 지금의 남평통상구가 자리한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남평진 남평촌으로, 함북 무산군과 맞닿아 있다. 

 

당시 폐렴을 앓던 브레허 주교아빠스와 수도자 29명, 수녀 3명 등 33명은 일제강점기에 군사훈련을 하던 합숙소였던 방 3칸짜리 초가집에 2년간 갇혀 있어야 했다. 배급은 해줬지만, 굶주림에 시달렸고 고량(수수)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때로는 노력동원에 끌려가 도로 공사에 투입되는 등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1947년 3월에는 합마당본당 초대 주임 보니파시오 쾨스틀러 신부가 두도구본당 사제관에서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그해에 벌어진 2차 청산 때는 ‘혁명 인민군’이 수용소에 난입, 수도자들이 덮고 자던 낡은 이불과 내의, 전구, 밥그릇까지 몽땅 압수해 트럭에 싣고 갔다.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 십자가와 성상, 성화는 다 부쉈다. 그러고 나서는 수도자들 손에 부서진 십자고상 조각을 들리고는 ‘조리 돌리기’를 했다. 

 

코르비니안 슈레플 신부는 자신의 자서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에서 남평수용소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짚으로 이은 지붕은 다 썩었고, 천장은 비가 새 얼룩졌다. 문도, 창문도 없었고, 벽은 온통 구멍투성이였다. 마룻바닥엔 먼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어떻게든 살아야겠기에 이 집을 청소하고 대강 수리도 해야 했다.… 또 고량밥을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동네 부인들을 찾아가 밥 짓는 방법을 배웠다. 우선 수수쌀을 초벌로 삶은 뒤 거기서 우러난 붉은 뜨물을 버리고 행군 다음, 다시 밥물을 부어 밥을 안쳤다. 하루 세 끼니씩 30명분 식사를 이런 식으로 지어야 했다….” 

 

일시 ‘종교의 자유’를 내건 중국 공산당 덕분(?)에 수도자들은 연길이나 용정으로 되돌아갔지만, 결국은 모두 추방당했다. 1948년에서 195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늘날 연길 교회 지역별 성당.

 

 

연길 교회는 잉걸로 다시 불타오르고

 

선교사들은 추방됐지만, 교회는 류위팅 신부 등 중국인 사제들에 의해 겨우 목숨줄을 이어나갔다. 1957년 중국에 관변 천주교 조직인 천주교애국회가 설립되면서 그 산하로 들어갔고 자양(自養), 자전(自傳), 자치(自治)의 3자 원칙이 중국 교회정책으로 정립되면서 교회의 어려움은 가중됐다.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66년부터 10년간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으로 연길 교회는 또다시 초토화됐다. ‘간도의 로마’로 불리던 팔도구본당이 1968년 용정 제2고급중학교 홍위병들에 의해 무너진 게 대표적 사례다. 팔도구성당까지 무너지며 연길 교회는 몇몇 소규모 신앙 공동체로 명맥을 이었다. 교구장 서리직도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2대 라이문도 악커만 신부(1950∼1954년), 3대 티모테오 비테를리 몬시뇰(1954∼1980) 등이 승계했지만, 지금은 교구장 서리직을 누가 승계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수난의 길을 걷던 연길 교회가 기사회생한 건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였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최초로 엄태준 신부가 1989년 10월 지린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으면서 연길 교회는 재건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연길 교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ㆍ용정ㆍ화룡ㆍ혼춘ㆍ안도ㆍ도문본당 등 6개 본당이 중심을 이룬다. 연길 주임은 염창원 신부가, 안도 주임은 윤덕헌 신부가, 용정ㆍ화룡 주임은 조광택 신부가, 도문 주임은 리광필 신부가, 혼춘 주임은 권혁화 신부가 맡았고, 엄 신부는 현재 휴양 중이다. 조선족 신자는 대략 700여 명, 중국인 신자까지 합쳐봐야 3000여 명에 그친다. 하도 박해를 많이 받아 교적에 이름을 올리길 꺼려해 교세 통계는 정확하지 않다. 

 

1946년 5월 중국 공산당에 몰수됐던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은 54년 만인 2001년 지린교구 지린시 코첸(口前)성당 내에 복구됐고, 2014년 지린시 썽허징(雙河)으로 수도원을 이전, 두샹우(노르베르토) 원장 신부를 비롯해 종신서원자 4명, 유기서원자 2명 등 6명이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조선족 손철호(바실리오) 수사 신부도 연길 수도원 공동체의 일원이다. 올해 6월 17일에도 체지쉬안(암브로시오) 수사와 왕양(그레고리오) 수사가 첫서원을 했다. 

 

뿌리째 흔들렸던 연길 교회는 이제 지린교구의 조선족 출신 성직자들과 복구된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공동체를 수레바퀴 삼아 연길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해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걷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2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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