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구약] 탈출기 말씀 피정10: 믿음 없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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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기 말씀 피정 (10) 믿음 없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지난 호에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4,24 참조).
주님의 공격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을 공격하는 대목이 종종 나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야뽁 강 어귀에서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장면(창세 32,23-33 참조), 주님의 허락을 받고 발락에게 가던 발라암을 주님께서 도리어 죽이시려는 장면(민수 22,22-35 참조) 등입니다. 이런 주님의 태도는 참 의아합니다.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의 역자들은 그런 모습을 피하고자 ‘주님’이라는 단어를 ‘주님의 천사’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하는 일 역시 주님의 일이라면, 결국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공격하셨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세일까? 모세의 아들일까?
우리말 성경은 모세가 길을 떠나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장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보면, 하느님께서 누구를 공격하셨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3인칭 대명사 ‘그’라는 표현이 계속 나와 그가 모세인지 모세의 아들인지 불분명합니다. 공격 대상이 모세의 아들이라면,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그를 공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창세 17,9-14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한 뒤,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나갈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아들이 공격받았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치포라가 할례를 베푸는 동안 모세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할례로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아버지 모세는 결코 멀뚱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하느님의 공격으로 모세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치포라가 움직였으리라 추측합니다.
우리말 성경도 이런 견해를 반영하였습니다. 곧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큰 병을 앓게 되어 움직일 수 없자, 치포라가 즉시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치포라는 아들의 포피를 움직이지 못하는 모세 발 앞에 놓고, “나에게 당신은 피의 신랑입니다”(4,25)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풀어 주십니다. 모세는 이번에도 아내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론, 그리고 백성과의 만남(4,27-31)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은 뒤 하느님께서는 아론에게 모세를 만나러 광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올 테니 이집트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마중하러 나가라고 하십니다. 광야를 거쳐 오며 죽을 고비를 넘긴 모세를 위한 배려였을까요? 아론은 길을 떠나 하느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을 맞춥니다. 하느님의 산은 미디안과 이집트 사이에 있던 산으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명령을 아론에게 알립니다. 그러고는 즉시 이스라엘 자손의 원로들을 불러 모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표징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자 모세의 걱정과 달리 모든 백성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주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모세와 아론이 만나는 장면부터 백성이 그들의 말을 듣게 되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보입니다. 백성도 의심 없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의 믿음은 금방 깨집니다. 파라오가 자신들을 더욱 못살게 굴자, 즉시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가 따지기 때문입니다(5,20-21 참조). 어찌 보면 구약성경 전체는 이러한 백성의 확고하지 못한 믿음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그것이 바로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입니다.
파라오와의 첫 만남(5,1-5)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가서 ‘야훼’라는 주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분이 명하신 바를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축제를 지내게 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진한 고딕체로 ‘주’라고 표기된 대목은 모두 주님의 이름인 ‘야훼’가 나오는 대목이라고 앞서 밝혔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다인 관습에 따라 가톨릭교회도 ‘야훼’를 ‘주님’으로 표기합니다. 어쨌든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분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야훼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스라엘을 내보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고 거절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즉시 주님의 이름을 듣고 그분을 알아본 것과 대조됩니다. 파라오가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모세와 아론은 그분이 바로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다시 말해 줍니다. 그 신이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이신지 설명하면서, 그분께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흑사병이나 칼이 자기들을 덮칠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5,2-3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 말을 지어 낸 것일까요? 아니면 모세와 아론의 현재 마음 상태를 드러낸 것일까요? 아쉽게도 그 말은 파라오에게 아무런 협박도 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신 또는 신의 아들임을 자처한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곧 ‘노예들의 하느님’이 전하는 말을 들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던진 말은 파라오를 겁주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모세의 마음 상태를 알려 주는 말로 여기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직도 모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달리 파라오는 하느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도대체 그 주님이 누구인가?”(5,2 참조)
믿음의 목적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돌려보낸 뒤 작업 감독과 조장들에게 명합니다. 벽돌 만들 때 쓰는 짚을 히브리인들이 직접 모아 쓰게 하되, 그 생산량은 줄이지 말라고 이릅니다. 히브리인들이 배가 불러 하느님이나 섬기겠다고 하니, 그런 생각을 할 틈을 아예 없애겠다는 뜻입니다(5,6-9 참조). 파라오의 명령을 들은 작업 감독들은 이스라엘 작업 조장들을 불러 다그치고 때립니다(5,10-14 참조). 그러자 이스라엘 작업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쫓아가 자신들을 왜 이렇게 박대하는지 따져 묻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서야 이스라엘 조장들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받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5,15-19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되리라 기대했지만, 상황이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모세와 아론이 하느님의 계획을 백성에게 분명히 알려 주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그가 이스라엘을 쉽게 내보내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든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따지고 듭니다. 주님께서 등장하시면 모든 고난이 다 없어질 줄 알았는데 파라오가 자신들을 도리어 더 힘들게 만드니(5,20-23 참조), 하느님 계획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지금 닥친 문제부터 당장 해결하라는 요청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반긴 것은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 때문이 아니라, 이집트 땅에서 어려움 없이 살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 주는 모세와 아론은 불필요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말을 들은 모세도 주님께 달려가서 아룁니다. 파라오에게 주님의 이름을 말하자 그가 도리어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도와주고 구해주시기로 해 놓고, 왜 이렇게 가만히 계시느냐고 따집니다.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이 당신의 계획이라고 미리 알려 주었는데도 모세와 백성이 이리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살다 보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있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잘 된다는데 도대체 나는 왜 이런가’ 하고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립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의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탈출기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믿음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0월호(통권 463호), 염철호 사도 요한] 0 6,74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