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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나는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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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6 ㅣ No.978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나는 왜 이럴까?’


인간은 하느님과 친교 이루는 존재

 

 

찬미 예수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제대로 된 방학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학교 방학은 이미 2주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동안 여러 연수와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 여전히 바쁘게 지냈지요. 아직도 할 일이 여전히 있긴 하지만, 프로그램을 다 마친 지금은 그래도 훨씬 가벼워진 마음입니다.

 

지난 한 학기를 돌아보면 또 ‘언제 그렇게 지났냐’는 듯 바빴지만, 그 안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보람과 또 사랑받으며 살고 있음에 대한 감사로 행복하고 기뻤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늘 좋았던 것은 아니죠.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고 또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져 속상했던 순간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당연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죠. 그리고 우리가 당신 안에서 참된 행복과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삶에 늘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살고 싶은데 늘 기쁠 수는 없다는 거죠. 살다 보면 우리 바람과 다르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짜증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죠. 내 탓 없이 갑자기 주어지는 외적인 고통들, 질병이나 사고 같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내 마음은 평화롭게 또 자유롭고 기쁘게 유지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어떠세요? ‘아, 정말 그렇다. 진짜 내 이야기다!’라고 공감하게 되지 않으시나요?

 

정말 그렇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제가 이 글을 통해서 함께 나누었던 내용들이 다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요. 기도라는 것,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마음처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영 차원의 원리를 따라 ‘너 중심’으로 사는 것,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누리는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있는 저이지만, 저 역시도 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여전히 제 중심으로 일하고 움직이며, 그 안에서 자꾸만 인정받으려고 애쓰고 있지요.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채워진다 싶으면 기쁘고 감사하다고 느끼지만, 그렇지 않다 싶을 때면 또 속상해하고 힘들어하는 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제가 이런 제 모습을 알면서도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그렇지 않으려고 하는데, ‘너중심’으로 하느님과 함께 자유롭고 기쁘게 살고 싶은데, 문득문득 돌아보면 또 제 중심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며 지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제 자신이 이렇다 보니,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제 마음에 사무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묻게 되는 거죠. ‘나는 왜 이럴까?’ 하고요.

 

그런데 이런 물음을 저 혼자만 가졌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내 자신이 누구인지, 내 마음이 왜 이렇고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신학적인 물음들입니다. 물론 각각의 물음들이 어떠했고 또 찾아낸 답이 어떠한지를 지금 여기에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철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 곧 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과 의지의 힘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바라봅니다. 이를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자기 초월을 향한 의식적인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지향성과 초월이라는 움직임을 통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움직임, 곧 ‘현재의 덜 나은 상태’를 벗어나서 ‘이상적으로 더 나은 상태’를 향해 가려고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을 어떤 ‘결핍을 지닌 존재’로 이해합니다. 물론 심리학 학파들에 따라서 결핍의 내용은 ‘무의식의 욕구’일 수도 있고 ‘잠재된 가능성’이나 ‘아직 찾아지지 않은 의미’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를지라도, 어찌 되었든 이러한 ‘결핍을 채워가는 것’이 인간 삶과 행동의 목적이라고 심리학에서는 이해하고 있죠.

 

그렇다면 신학의 관점에서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원죄로 인해 모상의 지위를 잃고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창세 1,26-3,24 참조)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원죄론’의 내용이지요. 하지만, 이처럼 원죄의 결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타고난 존재’로만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았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으며,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 끊임없는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으로서의 ‘은총론’입니다. 결국 신학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비참함의 상태에서 구원의 상태로 넘어가는 여정에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여러 학문들의 이해를 이 짧은 내용 안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어떤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건너가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핍 때문이든 아니면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 때문이든 간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더 나은 상태’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쁘게 살고 싶은데 늘 기쁘지 못한 우리 삶의 현실, 그리고 그래서 갖게 되는 ‘나는 왜 이럴까?’라는 질문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시겠죠?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7월 16일, 민범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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