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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25년 한국 교회 최초의 복자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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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19 ㅣ No.909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25년 한국 교회 최초의 복자 탄생

 

 

1925년 7월 5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한국 교회의 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諡福式)이 거행되었다. 79위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등 70명과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 9명이다. 이들은 1984년 5월 6일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시복은 거룩한 생을 살았거나 순교한 사람에게 교황이 ‘복자’ 칭호를 허가하는 것이며, 복자에게는 특정한 교구나 지역에서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설립 141년 만에 복자를 탄생시킨 것은, 한국 교회의 영광이자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79위 복자의 탄생 과정

 

1925년 시복식의 단초는 1838년으로 소급된다. 당시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는 박해의 조짐이 보인 1838년 말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박해 일기인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에 관한 보고’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도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841년 4월(음력)이후에 78명의 순교자 전기인 「기해일기」가 완성되었다.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과 함께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수집되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페레올 주교는 프랑스어로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하 ‘행적’)을 작성하였다. 「행적」에는 「기해일기」에 수록된 72명과 1841년에 순교한 김성우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9명 등 총 82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행적」은 1847년 봄에 홍콩 대표부로 전달되어 최양업 부제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졌다. 그리고 1847년 10월 로마의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접수되었다. 페레올 주교가 「행적」을 작성한 것은, 조선 신자들의 순교 행적을 세상에 알리고, 이를 통해 시복 시성을 추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결과 1857년 9월 24일, 비오 9세 교황은 「행적」에 수록된 82명의 조선 순교자를 가경자(可敬者)로 공포하였다. 

 

가경자의 공포 이전은 교구에서 시복을 준비하는 단계이며, 공포 이후는 교황청에서 심사하는 단계(교황청 수속)이다. 그런데 ‘교황청 수속’은 일반적으로 해당 교구장에게 위임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교황청의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82명의 시복 작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시복 작업이 재개된 것은 1882년이었다. 당시 교구장 대리였던 블랑 신부는 1882년 4월 26일에 뮈텔 신부를 판사로, 로베르 신부를 공증관으로 임명한 뒤, 5월 11일에 ‘교황청 수속’을 시작하였다. 교황청 수속은 1899년 5월 19일에 종결되었고, 관련 서류는 1906년 3월 14일 교황청에 제출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09년 11월 12일부터 예부성성의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82명 가운데 3명이 제외되었고, 나머지 79명은 1925년 5월 12일 최종 회의인 투토(Tuto) 회의에서 시복이 결정되었다.

 

 

베드로 대성전의 시복식

 

시복식은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되었다. 시복식에 참석한 한국 교회 관계자는,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용산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 경향잡지사 주필 한기근 신부, 장면 · 장발 형제였다.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1925년 3월에 한국을 떠났고, 조선 성직자 대표인 한기근 신부는 5월에 서울을 출발했다. 그리고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에서는 5월 10일 시복식에 참석할 대표로 미국에 체류 중인 장면을 뽑았다. 장면은 동생인 장발과 함께 미국에서 로마로 갔다. 기낭 신부는 1925년 2월부터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누이들과 함께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로마에 모인 한국 교회 대표는 프랑스 선교사 3명, 한국인 성직자 1명, 평신도 2명뿐이었다. 로마는 거리가 멀고 여행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가난한 교우들이 시복식에 참석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한기근 신부도 서울을 떠나면서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해외 성지 순례에 참가하는 것을 볼 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 세 명 가운데 결국 시복식에 참석한 사람은 한기근 신부와 장발 두 사람뿐이었다. 장면은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하였다. 1925년 7월 5일 오전 10시, 추기경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대성전에 입장하였다. 이어 예식이 시작되자 고위 성직자 한 사람이 제대 왼쪽에 마련된 높은 단에 올라가서 79위를 복자로 선포하는 교황의 칙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제대 뒷벽에 걸어 둔 복자들의 큰 상본이 공개되었다. 이것을 ‘영광’이라고 칭하는데,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 뮈텔 주교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복자들의 상본은 다섯 가지로 그려져 제대 뒷벽, 제대 앞 양편 기둥, 성당 정문 위, 성당 입구의 강복대 등 다섯 곳에 걸려 있었다.

 

영광이 발현된 뒤 성가대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사은 찬미가 ‘테 데움’(Te Deum)을 합창하고, 복자 기도문을 노래했다. 그런 다음 장엄 미사가 거행되면서 시복식은 끝났다.

 

오후 6시에는 같은 장소에서 성체 강복식이 열렸다. 여기에는 비오 11세 교황이 참석하였다. 시복식 당일의 성체 강복식은 교황이 직접 거행하지만, 이날 행사에서는 특별히 뮈텔 주교가 거행하도록 허락되었다. 시복식에는 1만여 명, 성체 강복식에는 2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였다.

 

 

목숨을 바쳐 의로움을 따르다

 

「맹자」의 고자(告子) 편에는 다음과 같은 맹자의 말이 있다. “사는 것[生]과 의로움[義]은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생취의’(捨生取義), 곧 목숨을 바쳐서라도 옳은 일을 하겠다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맹자는 왜 목숨 대신 의로움을 취한다고 했을까?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 않으며, 죽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맹자에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움이었고,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불의(不義)였다.

 

1925년에 복자의 반열에 오른 79위는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감수하며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분들이다. 이들에게 신앙은 사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었고, 신앙을 버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었다.

 

79위 가운데 한 분으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 루치아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죽기가 무섭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려면 천주를 배반하라고 하시니,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김 루치아는 죽음이 무섭고 두려웠지만, 이보다 더 싫은 것이 천주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 루치아는 ‘사생취천주’를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의로움’은 하느님이었다.

 

서울대목구의 드브레 보좌 주교는 1925년 5월 5일, 신자들에게 79위의 시복식 소식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했다. “사람이 다 치명의 은혜를 입지 못하되, 사람이 종신토록 악한 삶을 억제하고, 가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대군대부(大君大父)인 천주를 섬기면, 실로 자기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것과 거의 같다.”

 

박해 시대가 아닌 만큼, 악한 삶을 억제하고 본분을 지키며 천주를 섬기는 것이 1925년 당시의 순교자적 삶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착하게 사는 것’, 어찌보면 대단히 평범한 삶이다. 79위 순교 복자가 목숨을 버리고 취했던 의로움의 ‘현재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사는 신자가 많다. 드브레 주교의 기준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순교자적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착하게 사는’ 우리의 평범한 삶에 자부심을 갖자.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 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6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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