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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9) 일본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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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18 ㅣ No.962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9) 일본 선교


동료 비웃음 뒤로한 채 ‘미지의 땅’ 일본으로

 

 

- 일본 선교 현장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콜베 신부(왼쪽에서 세 번째).

 

 

콜베 신부는 온 세상에 성모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졌으며, 그 실천적 목표로 ‘니에포칼라누프(성모의 마을)’를 폴란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건설하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폴란드에서 시작한 공동체와 사업이 큰 성공을 거뒀고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선교 열망이 늘 새롭게 타올랐다.

 

이러한 열망은 당시 교회의 상황과 절묘하게 결합한다. ‘선교의 교황’이라 불린 비오 11세 교황의 재위 시기로, 교황의 출신 수도회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역시 교황의 뜻에 부응해 선교 사도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특히 총장은 젊은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칸 회칙 정신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교하도록 열성적으로 권고했는데, 콜베 신부는 이 요청에 기꺼이 응답한다.

 

 

안락한 수도원 담장을 넘다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수사들이 수도원 담장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을 늘 경계했다. 그는 수사들이 가능한 한 수도원 밖으로 나가 현재의 세상을 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체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이들도 가능한 한 자주 선교나 여행 등을 통해 다양한 영혼과 접촉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와 해야 할 일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 뒤에는 다시 니에포칼라누프로 돌아와 세상의 체험 중에 묻었던 먼지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더러는 세상의 가시덤불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며 자신의 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곧, 니에포칼라누프는 세상이라는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니에포칼라누프 안에 수사들을 위한 공동묘지를 만들면서 그 터의 크기에 관해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우리 수사들의 뼈가 세계 도처에 흩어질 것을 예견하기에 묘지의 터는 그렇게 넓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30년 니에포칼라누프가 가파른 성장의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일본 선교를 결정한다. 1927년 고질적인 폐병이 악화돼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며 두 번째로 쟈코파네 요양원에서 1년 반 동안 요양을 했으나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정상적인 생활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미 성공한 공동체의 창설자로 존경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안락함도 어떤 병고도 선교를 향한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마침내 그해 2월 26일 4명의 형제와 함께 미지의 땅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선교를 떠난다는 의미는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고 수도회의 충분한 지원도 보장받지 못했다. 선교지에서 사용하게 될 언어에 대한 교육이라든가 그 외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다. 세상은 20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선교 조건과 여건은 800년 전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알프스를 넘어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가던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가 폴란드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일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정적인 어려움, 처음 접하는 문화와 언어의 어려움, 여러 법적 문제들, 수도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문제는 공동체 내부에도 있었다.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선발된 선교사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환경의 변화와 고국에 대한 향수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때때로 이들은 콜베 신부의 조력자라기보다 방해자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콜베 신부의 폐병은 덥고 습한 일본의 환경으로 더욱 나빠졌다. 특히 왼쪽 폐는 치명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는 절대 안정을 요구했으나 일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굳건한 믿음을 가진 그도 나약한 육신에 갇힌 인간이었기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오는 어려움 앞에서 갈등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총장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고백한다. ‘때때로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나 자신의 일에 시간을 바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저의 양심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일하라고 말합니다.’

 

 

시련을 ‘사탕’이라 부른 성인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한결같은 믿음과 긍정적 생각으로 형제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갖가지 종류의 시련을 일컬어 ‘사탕’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시련의 도가니였지만 콜베 신부는 그 도가니 안에서 더욱 정화되고 단련됐다. 어떤 인간적인 지혜나 계획도 무용지물인 상황이었기에, 그는 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계획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의 사업을 걱정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성모님, 따라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어떤 일이 매우 어렵게 진전되거나 아니면 전혀 성공하지 못했을 때도 영혼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잘 풀려갈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콜베 신부는 한결같았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한 분이신 하느님뿐이며, 오로지 우리를 이끄시는 성모님의 계획에 따라 일이 진행되기에 인간은 성공과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손안의 도구로 주어진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는 따로 마음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본 선교 중에 닥친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함께한 수사들이 불안해 하고 있을 때 콜베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일은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모님의 뜻에 달려 있으니 성모님께 맡기려 합니다.” 주님 손안의 도구로서 최선을 다하며 주님의 종으로서 겸손되이 결과를 의탁하던 콜베 신부에게는 놀랍게도 항상 풍성한 열매가 허락됐으며 그것은 일본 선교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으로 떠나는 콜베 신부를 향해 “삽자루로 달을 치려고 하는 격”이라며 무모함을 비웃던 폴란드의 수사에게 한 장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오늘 우리는 일본어판 ‘성모의 기사’지를 발송한다. 우리는 인쇄소를 가졌다. 성모님께 찬미! 막시밀리아노.” 그가 폴란드를 떠난 지 석 달, 일본에 도착한 지 한 달째 되던 1930년 5월 24일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18일, 최문기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유대철 베드로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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