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서울 도심 속의 성지순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14 ㅣ No.1631

[순교자성월 특집] 도심 속의 성지순례 (1편) 홀로 걸으면 묵상이 된다

 

 

명동대성당 (사진: 굿뉴스갤러리/김명중).

 

 

햇살이 우리를 유혹한다. 바람이 옷소매를 잡아끈다. 휴일 한나절의 짧은 외출, 도심 속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볼까? 때마침 순교자성월이다. 버스를 타고 멀리 갈 것 없다. 한국 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순교성지들은 의외로 서울 한복판에 있다. 

 

홀로 걸으면 묵상이 된다. 함께 걸으면 친교와 나눔이 된다. 마음으로 걸으면 기도가 되고, 눈물로 걸으면 회개와 보속이 된다. 삶의 무게 앞에 휘청거릴 때, 모든 것을 그만 내려놓고 싶을 때, 성지순례는 위로가 되고, 은총이 된다.

 

9월 어느 날, 명동대성당에서 출발했다. 대성전에서 기도하고, 지하 소성당을 참배했다.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참배했다. 그분은 이 땅 곳곳에 기도의 흔적을 남겼다. 솔뫼의 성 김대건 생가에서, 꽃동네 태아동산에서, 서소문 성지에서 …. 그 기도의 깊이를 닮고 싶다.

 

명례방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첫 신앙집회가 열렸다. 을지로2가 장악원터(외환은행 본점 앞) 부근이었다.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첫 세례식이 열렸다. 청계천 수표교 북쪽에 있다.

 

 

명동을 나서면 한국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된다. 가까운 곳에 김범우(토마스)의 집터가 있다.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 앞 장악원 터 표석이 기준이 된다. 집터는 이 부근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곳에서 1784년 처음으로 신앙 집회가 열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교리를 공부하고 기도를 했다. 그들을 `명례방 공동체`라 부른다. 1년이 채 안 돼 발각됐고,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 북쪽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터`가 있다.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터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한국 천주교의 첫 세례식이 열렸다. 정조 8년(1784년) 겨울이다. 북경에서 세례 받은 이승훈(베드로)이 신부 노릇을 하며 세례를 주었다. 이벽과 김범우, 정약용, 권일신 등이 그때 세례를 받았다. 평신도가 세례 뿐 아니라 미사와 고해 같은 성사(聖事)를 집행했으니, 이를 가성직(假聖職)제도라고 한다.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이 시기가 2년이나 이어졌다. 세례 받은 신앙공동체는 곧 교회이다. 그래서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터`가 된다. 최근 연구 결과 이벽의 집터는 청계천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표석도 곧 수표교길 서남쪽 끝자락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포도청은 서울 최대의 순교터이다. 종로성당은 좌포도청에서 5백미터 떨어져 있는 '포도청 순례지 성당'이다.

 

 

길은 이제부터 형극으로 이어진다. 100년 넘게 지속된 박해의 길이다. 좌·우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전옥서에 갇혔다. 형조가 다스리고, 의금부에서 추국을 당했다. 그 기관들이 세종로(형조/우포도청)부터 종로1가 종각역(의금부/전옥서)을 거쳐 종로3가역(좌포도청)까지 흩어져 있었다. 지금 그곳들은 보도블록으로 뒤덮인 채 표석으로만 남아 있다. 곤장을 치고 주리를 틀었던 그들은 이제 잊혀졌다. 매를 맞다 장살로 죽어간 이들은 성인(聖人)이 됐다. 역사는 그렇게 반전으로 인간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포도청(옥터)은 사실 서울의 최대 순교터다. 서울의 첫 순교자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 모두 포도청에서 나왔다. 성 김대건 신부가 이 세상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 순교자다.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을 종합하면,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1879년 기묘박해 때까지 14년 동안 대략 1600~170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 중 서울 지역 순교자는 약 576명, 순교 장소를 알 수 있는 순교자 149명 가운데 106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했다. 약 70%가 포도청 순교자인 셈이다. (차기진, 조선후기의 포도청과 천주교 순교사)

 

- 종로성당 지하에 마련된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 포도청 감옥에 갇힌 리델 주교의 기록과 각종 형구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굿뉴스자료실)

 

 

그 피 흘림의 역사는 종로성당으로 모여든다. 좌포도청 표석에서 5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서울대교구가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한 곳이다. 성당 지하에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이 있다. 제6대 조선대목구장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의 감옥생활 기록을 접할 수 있다. 그는 1877년 조선에 입국했다가 6개월간 포도청에 갇혔다. 1878년 10월 20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은 이 현양관 개관의 토대가 되었다. 순교자들을 문초하는데 사용했던 각종 형구들도 전시돼 있다. 목에 씌우는 칼(枷), 곤장을 치던 곤(棍)과 장(杖), 발목을 붙들어 맨 착고(着錮), 단근질하던 인두, 주리를 틀던 원장(圓杖) 등이 있다. 

 

명동대성당에서 종로성당까지, 그 길은 한국 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밟아가는 길이다. 길은 이제부터 북촌으로, 서소문으로, 절두산으로 이어진다. 그 길은 패배를 승리로 바꿔놓은 길이다.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진 길이다. [가톨릭평화방송, 2015년 9월 10일 취재 Talk, 김소일 기자]

 

 

도심 속의 성지순례 (2편) 우리의 삶 또한 길 위에 있다

 

 

가회동성당은 한옥과 양옥이 어울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건축미를 보여준다.

 

 

순례는 원래 걷는 것이다. 멀든 가깝든 걸어야 한다. 성지순례는 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성지를 향해 타박타박 걷는 길, 그것이 순례다. 걷는 과정을 생략한 순례는 자칫 관광으로 떨어지기 쉽다. 아는 만큼 보이는가? 아니다. 성지순례는 걷고 묵상한 만큼 느낀다. 서울 도심의 성지들은 그래서 좋다. 4대문 안에서 만나는 신앙의 유산…. 걸음마다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다.

 

서울 북촌은 600년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 지역이다. 이 전통의 공간에 가회동성당이 있다. 한옥과 양옥, 전통과 현대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이 성당은 어느덧 북촌의 새로운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과 건축미를 감상하려는 일반인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2013년 준공된 새 성전은 단아하고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동서양의 이질적인 건축 양식을 뒤섞지 않은 채 따로 지어진 한옥과 양옥 건물이 아무런 시각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화이부동(和而不同), 군자의 도리라는 이 단어가 잘 어울리는 걸작이다.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과 서울시건축상 일반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 주문모 신부.

 

 

건축의 아름다움에 취하다보면 본래의 목적을 잊는다. 북촌 일대는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가 봉헌된 곳이다. 또한 오랜 박해 끝에 신앙의 승리를 확인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이곳 북촌으로 숨어들었다.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감격적인 첫 미사를 드렸다. 장소는 ‘북촌심처(北村深處)’ 최인길(마티아)의 집이었다. 지금 가회동 성당 관할 구역이다. 불행하게도 밀고자가 나오면서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다. 주문모 신부는 ‘등잔 밑’에 숨었다. 같은 동네 강완숙(골롬바)의 집에서 무려 6년을 숨어 지내며 은밀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붙잡혀 순교했다. 그때 조선 교회는 이미 신자 수 1만 명을 헤아리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955년으로 가보자. 그해 8월 16일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사망했다. 이를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경향신문 (1955. 8. 18)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망자를 위한 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 시포 앞에 조그마한 상이 마련되어 있고, 상 위에는 가톨릭 식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7,8인의 천주교 신자들이 ‘주는 망자 비오를 긍련히 여기소서’하면서 기구를 할 뿐이었다.”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신자였을까? 그렇다. 그는 사망 1주일 전에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의친왕은 천주교 탄압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의 손자가 된다. 선조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입교 동기였다. 세례식은 가회동 성당 주임 박우철 신부가 집전했다. 무려 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이 땅의 순교자들은 하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진심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순교의 피는 그렇게 신앙의 꽃으로 피어난다. 역사는 그렇게 뒤척이며 진리를 감싸고 흐른다.

 

가회동 성당 건너편 500m쯤 떨어진 곳에 ‘석정보름우물’이 있다. 돌로 만들어져 ‘석정(石井)’이다. 15일 주기로 맑았다 흐려진다 해서 `보름우물`로도 불렸다. 이 우물은 20세기 초 서울에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났고,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퍼졌다. 인근 궁궐의 궁녀들까지 몰래 떠다 마셨다고 한다.

 

- 석정보름우물, 주문모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가 이 우물물을 성수로 세례를 베풀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여기도 신앙의 역사가 서려있다. 주문모 신부가 북촌에 숨어 살면서 이 물을 마셨다. 세례를 줄 때도 이 물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1845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 짧은 사목활동을 했다. 역시 이 물을 성수(聖水)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마실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북촌에 어스름이 내린다. 일부러 이 시간을 기다렸다. 가회동성당 옥상 하늘정원에 오른다. 숨겨져 있던 한옥의 지붕들이 슬며시 일어나 춤사위를 펼친다. 이미 스러진 빛의 여운과 하나둘 켜지는 도시의 불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순간은 짧지만 느낌은 강렬하다. 고요하고 아늑하면서도, 외롭고 적막하다. 순례자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북촌에 어둠이 내리면 숨어있던 한옥 지붕이 슬그머니 일어나 춤사위를 펼친다.

 

 

그대 오늘 걸었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순례는 쉽사리 답을 주지 않는다. 삶의 고통을 환희로 바꿔주지 않는다. 등이 휠 것 같은 십자가의 무게도 줄여주지 않는다. 다만 길 끝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갈 힘을 줄 뿐이다. 길은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 또한 길 위에 있다. 내일은 또 내일 걸어야 할 몫이 있다.

 

*** 가회동 성당은 ‘봉헌생활의 해(2015년)’를 맞아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또 다른 성당은 명동대성당, 종로성당, 약현성당,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등이다. 가회동성당의 옥상 하늘정원은 금요일 오전 10시 미사 후에 개방된다. 다른 날 다른 시각에 출입하려면 성당 측의 별도 협조를 얻어야 한다. (사진 제공 : 가회동 성당) [가톨릭평화방송, 2015년 9월 17일 취재 Talk, 김소일 기자]

 

 

도심 속의 성지순례 (3편) 흑백사진 속의 저 엷은 미소

 

 

흑백사진 속에서 그분을 처음 보았다. 일흔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다. 한 손으로는 꽃다발을 안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술 달린 지팡이를 짚고 서있다. 묘한 표정이다. 엷은 미소 속에 많은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서린 저 여인은 누구인가?

 

사진의 주인공은 의친왕비였다. 조선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강(李堈))의 부인이다. 사진은 서울 가회동 성당의 역사전시실에 있다. ‘의친왕비 김 마리아(金德修 마마) 영세 기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의친왕과 왕비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이 시리즈 2편에 소개했다.( ☞ 2편 )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던 흥선대원군의 손자 부부가 바로 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랍다. 그 입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 황실의 후손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또 다른 사례도 있을까?

 

의친왕의 세례는 1955년 8월 9일이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8월 16일에 파란 많은 이 세상 삶을 마감했다. 78세. 세례는 죽음을 맞는 준비였다. 가회동 성당 박우철 신부가 세례성사를 집전했다. 세례명은 ‘비오’였다. 장면 박사가 대부를 섰다. 12일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로부터 견진성사와 종부성사를 받았다.

 

- 미국 유학시절의 의친왕 (순천향대 양상현 교수 제공)

 

 

그의 가톨릭 입교 동기를 당시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그는 자기의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이조 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과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 믿는 자를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후 날로 천주교가 번성해가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었다고 한다.”(경향신문 1955. 8. 18) 

 

의친왕 李비오의 장례 미사와 영결식은 8월 20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에서 열렸다. 파이프오르간이 연주하는 레퀴엠(Requiem)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노기남 주교가 미사를 집전했다. 상복을 입은 가족 30여 명과 일반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그는 뚝섬 밖 화양리에 묻혔다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 묻혔다. 지금은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굳이 여기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다만 그는 망국 황실의 자손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항일과 독립의 의지를 품고 살았던 인물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의친왕묘. 서삼릉에서 이장하면서 왕비와 합장했다.

 

의친왕비 김덕수는 8월 15일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1964년 1월 14일에 숨졌으니, 8년여를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의 신앙생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저 엷은 미소의 흑백사진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세례 직후에 찍은 그 사진에는 앳된 소녀 두 사람이 곁에 서있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을 찾아낸다면 의친왕비의 신앙생활에 대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가톨릭평화방송, 2015년 9월 27일 취재 Talk, 김소일 기자]

 

 

도심 속의 성지순례 (4편) 지밀 어머니의 준주성범

 

 

사동궁 시절의 의친왕비(앞줄 가운데) 사동궁은 지금 관훈동 196번지 일대이나, 건물은 모두 헐리고 없다.

 

 

이런저런 노력 끝에 그 두 소녀와 연락이 닿았다.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사)대한황실문화원의 도움을 받았다. 두 소녀는 의친왕비의 딸과 외손녀였다.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설명이 필요하다. 의친왕의 자녀는 공식적으로 13남 9녀가 있다. 그 중 의친왕비 소생은 없다. 그녀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친자식은 없었지만 왕비는 첩실 소생을 대부분 거두어 키웠다. 생모가 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동궁(寺洞宮)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황실의 후손들은 왕비를 ‘지밀 어머니’ 또는 ‘지밀 할머니’로 부르며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 (지밀(至密)은 은밀하고 비밀스럽다는 뜻으로 왕이나 왕비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례 사진 속의 소녀는 어느덧 70대 중후반의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사진에 찍힐 무렵엔 중학생이었다고 한다. 두 소녀 모두 안국동 별궁에서 왕비와 함께 살았다. 둘은 이모와 조카 사이였지만 나이는 한 살 차이라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둘 다 왕비보다 먼저 세례를 받았다.

 

의친왕비가 즐겨 읽었던 준주성범(Imitatio Christi), 가톨릭의 탁월한 고전이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답니다. 영세 받고 얼마 안 있어 별궁을 떠나 흩어져야 했으니까요. 다만 늘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기도하셨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준주성범을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학교 갔다 왔을 때 눈에 띄면 그 책을 읽어달라고 하셨죠. 눈이 어두워져 힘들어 하시면서도 늘 곁에 두고 읽으려 애쓰셨답니다.” (이희자 카타리나, 76세)

 

준주성범은 독일의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지은 탁월한 고전이다. 라틴어 제목은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인데, 신앙인을 고결한 성덕으로 이끄는 규범을 담고 있다. 1,2편은 묵상과 기도, 3,4편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1938년 차일라이스(V. Zeileis) 신부의 번역으로 한글본이 나왔으니, 왕비가 읽은 것도 이 책이었을 것이다. 매일 묵주기도를 하고 준주성범을 읽었다는 것은 이미 삶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신앙의 경지를 보여준다.

 

의친왕비의 세례 증명서 (사진 제공 : 가회동 성당)

 

 

"어머니는 무엇이든 열심히 믿으시는 분이셨죠. 가톨릭 영세 전에는 매일 아침 염주를 천 번씩 돌리시고, 낮에 두 시간씩 참선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삶은 가톨릭 영세 후에는 묵주와 기도생활로 바뀌셨죠. 성품이 고와서 투기 한 번 않으신 분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랍니다." (이해경, 86세, 미국 거주) 

 

왕비는 연안 김씨 김사준의 맏딸이었다. 총명하고 단아해 열네 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숙(淑)이었다. 왕비는 이 이름에 특별한 애착이 있었을까? 가회동 성당 세례 장부에는 ‘金 마리아 淑’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례 받았을 때는 이미 76세였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지는 못했다. 가끔 가회동 본당 신부님이 봉성체를 해 주었다. “명동성당의 뽀리나 수녀님이 자주 방문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분을 딸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이희자 카타리나 / 뽀리나는 아마 바울리나(Paulina)일 것이다. 확인 결과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속 수녀로서 이미 선종했다.)

 

1950년대의 안국동 별궁 모습(앞쪽 기와 간물), 지금은 헐리고 없다.

 

망국 왕족의 삶이 편할 리 없다. 왕비는 이승만 정부의 냉대 속에 안국동 별궁을 떠나야 했다. 한동안은 화양리에 있던 의친왕 재실(齋室)에서 지내다, 5.16 이후 종로구 궁정동 칠궁(七宮)으로 옮겼다. 그곳은 조선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었으나, 격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안정을 찾은 듯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준주성범을 외우다 새소리가 들리면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2년여를 그렇게 살다가 1964년 1월 14일, 85세로 생을 마쳤다. 빈소는 쓸쓸했다.

 

의친왕비가 생애 마지막 2년여를 보낸 칠궁.

 

 

“빈소에는 박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왔고, 방자(方子)여사와 노기남 대주교가 찾아와 명복을 빌었다.” (동아일보 1964. 1. 15) “그의 빈소에는 15일 상오 박 대통령과 고 문교장관이 보낸 조화가 놓여 있었으며, 수녀들 7,8명이 궁정복으로 정장한 김비의 영정을 두고 사도예절을 올리고 있었다.” (경향신문 1964. 1. 15) 

 

장례는 7일장이었다. 20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가 영결미사를 집전했다. 김숙 마리아를 태운 운구차는 신자들의 연도 속에 명동성당을 떠났다. 그는 시아버지 고종 황제의 홍릉과 시아주버니 순종 황제의 유릉 근처인 남양주시 금곡동 묘역에 묻혔다. 지금은 남편 의친왕과 합장되었다. [가톨릭평화방송, 2015년 10월 1일 취재 Talk, 김소일 기자]

 

 

도심 속의 성지순례 (5편) 수녀님이 가져온 계란 한 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부산 금정구 오륜대로)

 

 

애초에 이 취재는 한 장의 흑백사진에서 비롯됐다. 엷은 미소의 주인공이 의친왕비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의 신앙을 추적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진 원본의 소재지는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부산에 있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은 순교자의 유물과 교회사 자료를 수집 전시할 목적으로 1982년에 개관했다. 1955년에 찍은 왕비의 사진은 어떻게 3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내고 부산에서 모습을 드러냈을까?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은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설립했다. 이 수녀회는 1946년에 방유룡 신부의 적극적인 주도로 창설되었다. 방유룡 신부는 가회동 본당의 2대 주임(1950년 5월~11월)을 지냈다. 그때부터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이 가회동 본당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도왔다.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듯 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본원. (서울 청파동)

 

 

의친왕과 왕비는 6.25 피란에서 돌아와 안국동 별궁(현재 풍문여고 터)에 머물렀다. 그곳은 가회동 성당 관할 구역이었고, 성당에서 지척 거리였다. 수녀들은 적적한 노년의 두 부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세례 받기 몇 년 전부터였다. 

 

“수녀님들이 지밀 할머니를 자주 방문하셨어요. 빈손으로 오시는 법이 없었죠. 간혹 계란 한 줄을 들고 오시기도 했는데, 그때 계란 한 줄이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수녀님들이 직접 키운 닭이었지요. 고기를 사 오신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외로운 두 분은 그런 관심에 너무 감동하고 감사해 하셨지요. 두 분도 수녀님들을 그냥 보내시진 않으셨어요. 황실에서 쓰던 소소한 물건들을 선물로 주시곤 했죠.” (이숙경 로사, 75세)

 

의친왕이 세자 책봉 때 썼던 원유관. (중요민속문화재 제274호)

 

 

의친왕 부부가 넘겨준 그 유품들은 지금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그 유품 중에 하나로 원유관이 있다. 의친왕이 세자 책봉 때 썼던 관모로,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원유관이다.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대원군의 친묵과 망건, 의친왕의 흑룡포, 순정효황후의 당의(唐衣), 「의왕·영왕 책봉의궤」, 「추봉책봉의궤」 등 귀중한 유품들이 많다. 의친왕비의 세례 사진 속에 등장하는 술 달린 지팡이 또한 이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유품들은 의친왕 부부가 직접 기증했거나, 후손들이 고인의 뜻을 받들어 기증했다. 의친왕비의 세례 사진도 그런 경로로 박물관까지 가게 되었을 것이다. 의친왕이 남긴 것은 단지 유품뿐이었을까? 광폭한 세월 속에 방탕과 파행으로 감출 수밖에 없었던 그의 진심은 지금 어디에서 한 조각 편린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가톨릭평화방송, 2015년 10월 6일 취재 Talk, 김소일 기자]

 

 

심 속의 성지순례 (6편 · 끝) 담담히 흐르는 부활의 역사

 

 

영친왕 부부 혼례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황실 자손의 천주교 귀의는 의친왕 부부가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의친왕의 동생 영친왕(李垠)은 1961년 일본 도쿄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프란치스코회 석종관 신부가 세례를 주었다. 세례명은 요셉. 그는 1963년 11월에 귀국해 성모병원에서 매일 기도하며 고요하게 살다가 70년 5월 1일 병자성사까지 받고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영결미사를 집전했다. 그의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도 1983년 ‘마리아’라는 영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마지막 황녀’로 불린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77세로 숨졌다. 그 이틀 전에 ‘엘리사벳’으로 대세를 받았다. 고종과 엄상궁 사이에 태어난 또 한 분의 딸 이문용은 1970년 전주에서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다. 전주교구장 대리 김환철 신부가 세례를 베풀었다. 고종의 여섯 자녀 중에 순종과 일찍 죽은 완화군을 제외한 4명, 며느리를 포함하면 6명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셈이다. 

 

놀라운 사실은 또 있다.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이 그 정점을 찍는다. 그녀는 고종을 낳은 뒤 유모로 들어온 박 마르타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접했다. 1863년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박 마르타를 베르뇌 주교에게 보내 감사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박 마르타와 베르뇌 주교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민부대부인도 남편의 서슬 아래 오랫동안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 30여년이 지난 1896년에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청했다. 뮈텔 주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교구 제8대교구장 뮈텔 주교.

 

 

“1896년 10월 11일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청했다. 나는 저녁 7시에 대원군 궁궐 하녀인 이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15분이 지나자 어머니가 가마를 빌려 타고 몰래 그곳으로 왔다. 부인은 나에게밖에 희망을 둘 곳이 없다고 말했다. … 나는 우리의 유일한 의탁처는 오직 천주님뿐이라고 말했다. 또 고령에 궁궐 외출이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견진성사까지 받도록 권고했다.” (뮈텔 주교 일기) 

 

민 마리아는 영세 사실을 오랫동안 감추었다. 1898년 1월 죽음을 앞두고 뮈텔 주교에게 종부성사를 받았다. 그때 병환 중에 있던 남편도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물론 이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 고종은 그녀가 선종한 뒤에야 세례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같은 해 흥선대원군도 숨졌고, 박해도 막을 내렸다.

 

103위 순교 성인화_문학진(토마스) 1977년 (서울 혜화동성당)

 

 

황실의 후손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다만 박해자의 후손을 품어 안은 가톨릭의 그 관용만은 아릿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어려울 때 손을 내밀었다. 치료를 도와주고, 노후를 보살피고, 편안한 임종을 도왔다. 사랑은 위대하다. 1만 명의 신앙 선조들이 그들 선대의 박해 아래 피 흘리며 숨져갔다. 순교자의 피는 황궁으로 번졌고, 그렇게 황궁 안에서 신앙의 꽃을 피워냈다. 보라! 진리가 박해를 이겼다. 사랑이 증오를 이겼다. 죽음을 이겨내고 담담히 흐르는 부활의 역사가 여기 있다. [가톨릭평화방송, 2015년 10월 20일 취재 Talk, 김소일 기자]



2,604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