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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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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26 ㅣ No.1820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할 때 떨림과 가슴 벅차오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아멘”하고 응답하며 성체를 받아 모시던 그 첫 기억. 하지만 그 첫 마음을 간직하며 성체를 모시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잃어버린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금 성체의 삶으로 나아갈 때 낡은 것을 벗어버리고 새 생명으로 옮아가는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늘 합당치 않지만

 

미사 중 성체를 영하기 전 우리는 모두 한 목소리로 이런 ‘고백의 기도’를 바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고백에서 비롯됐다. 종이 중풍으로 병들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하셨지만 그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공대했다.

 

이런 겸손함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1)고 하셨다. 요즘 표현으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폭풍칭찬’을 들은 셈이다.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이라고만 하셨어도 극찬인데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라는 칭찬을 하셨다.

 

백인대장의 이런 고백을 왜 교회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바치도록 했을까. 합당한 영성체를 위해서는 하느님 은총 안에 있어야 함을 간과해서 안됨을 이 기도는 일러준다. 즉 죄의식을 잃어버리면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사 예식 안에서 개인의 죄와 하느님 자비에 대한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이 ‘고백의 기도’는 바로 그런 마음을 담고 있다. ‘합당치 않사오나’는 죄의 고백이며 ‘제가 곧 나으리이다’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요청과 감사가 담겨 있다. 이렇듯 신자들이 성사적 친교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사제는 먼저 “그러므로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이처럼 ‘합당치 않은’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깊은 자기성찰과 회개를 통한 완전한 자기 낮춤과 겸손,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의탁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체는 그런 우리의 겸손과 믿음과 결합해 우리의 불완전한 삶을 채우고 치유하며 일으켜 세워주시는 ‘모든 것’이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직접 가지 않고도 기적을 행하셨듯이, 성체는 물리적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이미 와계신, ‘살아 계신’ 그분과의 만남임을 보여준다.

 

 

구경꾼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내적 준비

 

「전례 헌장」은 신자들이 성찬 전례에 “마치 국외자나 말 없는 구경꾼처럼” 있지 말고 “거룩한 행위에 의식적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아울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님 몸의 식탁에서 기운을 차리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중개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이 갈수록 하느님과 일치하고 또 서로서로 일치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사랑의 성사」, 52항 참조).

 

능동적 참여자가 되려면 우리 모두는 먼저 ‘내적 준비’를 갖춰야 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권고 「사랑의 성사」에는 능동적 참여자가 되기 위한 내적 준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55항). 무엇보다 지속적인 회개를 꼽는다. 앞서 백인대장의 겸손은 입에서 나온 겸손이 아니다. 깊은 자기 성찰과 회개 없이는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백인대장이 병든 이들을 고쳐주셨던 예수님의 기적에만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저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시는 일에만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대장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종을 고쳐주고 싶은 선의에서 출발했음에도 그는 철저히 겸손했다. 그래서 차마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기에 ‘합당치 않음’을 고백했다. 이런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능동적 참여를 하려면 무엇보다 전례 시작 전에 잠시라도 묵상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거나 단식을 통하여 자신을 깊숙이 돌아보고 통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고해성사를 자주 하며 성체성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스스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사랑의 성사」, 55항 참조). 아울러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고 성인들의 훌륭하고 거룩한 모범들을 본받도록 이끌어 주는 성무일도와 묵주기도 등 꾸준히 기도생활을 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 뿐이 아니다. 공동체와 하느님 교회 전체를 위해 평신도가 받은 시종(복사를 포함해)과 독서자의 직무, 제병을 준비하고 제대보를 세탁하는 등 제대봉사를 통해 전례 거행을 돕는 평신도의 역할에 충실한 자세 역시 거룩한 미사에의 적극적 참여라 할 수 있다(「구원의 성사」, 36-47항 참조).

 

 

하느님과 화해를 이룬 마음이 진정한 참여 가능케

 

이런 ‘내적 준비’와 노력은 결국 우리를 하느님과의 화해로 이끄는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일그러지고 헝클어진 관계의 회복이야 말로 그분을 우리 안에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밭을 다지는 일에 해당한다. 이런 마음의 준비는 등불을 켜고 신랑을 맞고자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도 잘 드러난다(마태 25,1). 누구는 등과 기름을 다 준비하고 기다리지만 몇몇은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잠에 빠져 버려 때를 놓치고 만다. 성체를 모실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당한 준비 없이 성체를 모신다면 그 안에 담긴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수동적인 ‘국외자’ 혹은 ‘방관자’에 머물 수도 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에 응답해 그분과 일치하는 성사이다. 이런 일치와 희생 제사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 낮아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례해야 마땅하다.

 

루카 복음에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빵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과 함께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 30-31).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보게 한 빵의 기적은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자리 성체성사 안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깊은 의미를 깨달은 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다그치기 때문이다(2코린 5,4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합시다!”라는 사제의 파견에 기꺼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며 응답하게 된다. 이제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분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외침, 2017년 5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최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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