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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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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8 ㅣ No.851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국문 초록

 

이 땅의 천주교는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과 달리 정약종은 도교(道敎)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후에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온 그들은 복음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아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권일신은 적극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했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여러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명도회장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정약종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천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은 부친의 박해를 받아 집안에 감금되어 1785년 죽음을 당하였다. 1791년 권일신은 정조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지만, 유배 도중 죽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 이후 1801년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1801년 박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闢異文)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되었고, 1795년에는 <유혹문>( 惑文)을 지어 교회를 떠났으나,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정약종은 1801년 박해를 받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하셨는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1.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평신도 지도자 5위인1)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1785),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1),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등은 믿음의 문을 통하여 교회에 들어왔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살았고,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고통과 죽음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이들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정약종2)을 제외하고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신앙에 대한 연구보다는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3)

 

‘신앙의 해’(2012. 10. 11~2013. 11. 24)를 지냈고 순교자 124위의 시복(諡福)이 다가오는 이때,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들 5위의 신앙의 동기와 실천, 그리고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의 신앙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신앙의 고백과 실천을 통해서 신앙을 성장시켰으며, 박해와 시련을 당할 때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항구한 모습을 지녔다. 이들의 이러한 신앙의 특징은 상대주의, 물질만능주의와 세속주의 등으로 신앙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제시할 것이다.

 

 

2. 신앙의 동기

 

1770년대 말과 1780년 초에 이르러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신앙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의 집안은 전통적인 유학을 고수해 오고 있었는데, 이들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학통을4) 이어받았다. 이러한 성향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케 해 주는 실마리가 되었고,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꾸어 준 극적인 전환의 정점에는 이벽이 있었다. 그는 안정복(安鼎福, 1712~1791)과 권철신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774년에 권철신의 스승으로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중시하던 이병휴(李秉休, 1710~1776)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중용》(中庸)에서 상제(上帝), 귀신의 실체, 천명(天命)의 실천 등을 강조했던 것은 유학 자체에서 윤리를 보장하는 초월적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5) 특히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이 정약전(丁若銓, 1758~1816) 등과 함께했던 강학에 참여하였다.6) 이승훈은 이벽에 대해 “그 사람은 이미 우리 종교에 대한 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무익하지가 않았으니, 천주교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열성은 그의 지식보다 더 했습니다. 그는 나를 가르치고 격려했는데, 우리는 천주님을 섬기고 또 다른 사람들이 천주님을 섬기도록 서로 도왔으며”라고7) 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종 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 세례자라는 이름으로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8)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영향을 받아 서학의 천문, 역상(曆象), 특히 수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9) 그의 신앙 동기는 이벽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즉 1783년 10월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 이동욱(李東郁)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이벽이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선비로 전교하는 사람이 있다. 그대가 가서 만나보고 신경(信經) 한 부만 구해 달라. 더불어 세례받기를 청하면, 선교사들이 분명 그대를 매우 사랑하여 기이한 물건과 패물(玩好)을 많이 얻을 것이다. 반드시 그냥 돌아오지 말게”라고10) 하였다. 이에 그는 이벽의 권고와 수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성당을 찾아갔다. 북당 선교사들에게 다과를 대접받고 《천주실의》(天主實義) 수질(數秩), 《진도자증》(眞道自證), 《성세추요》(盛世芻?), 《기하원본》(幾何原本), 《수리정온》(數理精蘊) 등과 시원경(視遠境), 지평표(地平表) 등을 받았다.11) 당시 예수회 선교사 방타봉(Ventavon) 신부는 “27세의 이승훈은 박학하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고 거기서 진리를 발견하고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고12) 하였다. 1784년 2월 무렵 북당 성당에서 그라몽(Grammont, 梁棟材) 신부는 “천주님께서 그를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주었습니다”고13) 하면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귀국한 그는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14)

 

이벽은 1784년 3월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갖고 온 책들을 읽어 교리를 터득한 후, 가까운 친구들을 설득하여 교화시켰다.15) 그해 9월 “감호(鑑湖)에 사는 그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에 사는 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며 그의 집을 찾아가 10여 일을 묵으며 교리를 전하였다. 이에 그의 동생 권일신이 입교하여 열심히 믿기 시작하였다. 그는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성인을 주보(主保)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16) 그는 “대저 그 학술은 천주(天主)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는 의리가 고서(古書)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습니다”고17) 하였다. 여기서 천주를 공경한다는 것은 《서경》(書經) <상서태갑>(商書太甲) 상편(上篇)에 나오는 임금이 덕을 밝히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노력했다는 뜻과 통한다고 밝힌 것이다. 즉 그는 《서경》에 나오는 상제천(上帝天)에 대한 관념을 원용함으로써 천주에 대한 공경을 논하는 천주교를 동양고래의 사상과도 합치되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18)

 

권철신은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 온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었을 때 믿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받아들일 결심을 하였다. 그는 신앙 동기에 대해 “제 동생이 인천에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그 학문에 대해 처음에 들었을 때는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 책을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주재하는 이를 흠숭한다는 말과 생(生), 각(覺), 영(靈) 등 삼혼설(三魂說), 화(火), 기(氣), 수(水), 토(土)의 사행설(四行說)은 참으로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책을 깊이 이해한 뒤에 공격해야지, 뭇사람을 따라 대충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보았습니다”고19) 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적 신앙 이해의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고,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이해하며 그 신앙의 타당성을 말했던 것이다.20) 이를 대학자로서 세례를 받은 신자라는 사실을 더하여 생각해 보면, 그런 단순한 서술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숨어있는 핵심적인 진술, 바로 ‘영과 진리로써 주재자를 흠숭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다’라는 ‘신앙고백’으로 볼 수 있다.21)

 

이벽의 방문과 동생의 권유로 입교한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의 한 분인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를 주보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때 실학자 안정복은 1784년 그에게 보낸 셋째 서한에서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지금 세상에 사문이 기대를 걸고 친구들이 믿고 소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후배들의 종주가 될 사람이 공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라고22) 하였다.

 

유학자였던 권철신이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탈주자학적 학풍에 기인한다. 그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순자(荀子) 사상의 중심인 선진유학(先秦儒學)을 학문의 궁극적인 표준으로 삼아 주자학에 구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유롭게 해석했고,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도덕적 실천 공부를 극단적으로 강화해 나갔다.23) 또한 서명(西銘)과 서학 사상과의 연관성을 볼 수 있는데, 주어사 강학 때에 정약전, 김원성(金源星), 권상학(權相學), 이총억(李寵億) 등과 함께 해 질 녘에는 서명을 외었다.24) 정약용은 이 서명의 실천을 학문의 기본이라고 하면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火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와 전원(田園),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 것 네 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고25) 하였다. 이를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백성은 나와 한 핏줄’의 정신을 집안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독실하게 실천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학을 공부한 대학자의 실천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정신 그대로 받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나 마찬가지이다.26)

 

정약종은 그의 형제들과 남인 계열의 다른 인물들보다는 늦게 입교하였다. 그는 과거 시험에 뜻이 없었고 선도(仙道)를 배워서 불로장생(不老長生)하고자 했으며, 천지개벽설(天地開闢說)을 믿었다. 그러나 개벽이 되면 신선도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 끝에 신선설 및 개벽설 자체에도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를 통해 지상천국적 현세나 미래 사회에 대한 갈망을 천주교 신앙 안에서 용해시켜 나가게 되었다. 즉 도교(道敎) 신앙 내지는 후천개벽설에 대한 비판과 청산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가 초기 교회의 입교자들과 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유학보다는 도교가 종교적 성격이 더욱 강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는 초기 입교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보다 강렬한 종교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27) 그는 1786년 3월 중형(仲兄)인 정약전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었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아우구스티노(Augustino, 354~430)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생각하면서, 이 성인을 주보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28)

 

세례받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29) 구베아(Gouvea, 1751~1808) 주교가 표현한 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그렇게 허약한 도구를 사용하여, 세례에 필요한 것을 간신히 배운 그 젊은이가 그의 동포들의 사도와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힘을 지니게 하는 전능의 큰 기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 복음이 전파된 기원과 그 발전은 분명히 하느님이 하신 일이었다”라고30) 하였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유로이 응답한 이가 바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벽이었다. 그의 권유대로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한국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전교로 인해 신앙을 받아들인 권일신과 강렬한 종교적 지향을 갖고 있다가 개종한 정약종 등 초기 교회 지도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자유로이 응답하여 세례를 받았다. 초기 지도자들의 신앙 동기는 다양했다. 스스로 혹은 권유에 의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신앙의 출발이 필요한 것이다.31) 이렇듯 초기 교회는 사제 없이 평신도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힘의 원동력은 세례성사였던 것이다.32) 세례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의 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그 사람들 중에서 다시 전도사들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이승훈) 베드로보다 더 열심해져서 머지않아 천 명이 넘은 남녀 동포들이 세례를 받고, 새 조선 교회를 세웠습니다”고33) 하였다. 이어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로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로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된 신입 교우들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리하여 5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수가 약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고34)하였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거룩한 교회가 널리 확산된 것이다.

 

 

3. 신앙의 실천

 

이벽은 1784년 4월 15일 누이(丁若鉉의 첫 부인)의 기제(忌祭)를 지낸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마재에서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오면서 그들에게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였다. 이때 정약용은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그 후 서울로 찾아온 그들에게 《천주실의》, 《칠극》 등을 보여주었는데, 정약용은 1787년 이후 4~5년간 천주교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35)

 

1784년에서 1785년 무렵에 이가환에게서 ‘한문서학서들은 식견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어찌 생사의 도리를 깨달아 내세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자, 그가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가환에게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성년광익》(聖年廣益)을 빌려주었는데, 이가환은 정독한 후 “이것은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라고 하면서, 비밀리에 그와 왕래하였다.36) 이 사실은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요즈음에 정조(庭藻, 이가환), 자술(子述, 이승훈), 덕조(德操, 이벽) 등이 서로 긴밀히 언약하고 신학(新學)의 학설을 익힌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네”라고37)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어 그는 찾아온 실학자 이기양(李基讓, 1744~1802)에게 천지의 존재 이유, 세상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의 아름다운 질서, 4원소(元素)의 조화와 하느님의 섭리의 다양한 원리,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영혼에 대한 교리, 상선벌악 등 한마디로 견고하고 공략할 수 없는 원리들에 기댄 천주교의 진리와 명확성의 명백한 증거를 갖고 설명하였다. 이에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38)

 

명례방에 사는 역관 출신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도 공동체 모임이 이루어졌다. 이벽은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전했고, 그는 입교 후 온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을 가르쳐 입교시켰다.39) 이벽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공동체 기도 모임에 대해 “이벽이라는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 있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라고 하면서 책을 옆에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여 깨우쳐 주는 것이 유가의 사제 간 예법에 비해 더욱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모이는데 약 두어 달이 지나니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인가 의심되어 들어가 보니,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해괴하고 이상스러웠다”고40) 하였다. 이렇듯 그는 정약전 형제와 권철신 형제를 찾아가서 전교하고 이가환 등 찾아오는 이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켰고, 신앙을 적극 전파하였으며, 거룩한 전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그를 ‘사당(邪黨)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괴(巨魁)가 되는 자’41)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훈이 저술한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수록된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한문본 《성교요지》(聖敎要旨, 협주 첨부본)와 임신년(1932년)에 ‘뎡 아오스딩’이란 이름으로 필사(전사)된 한글본 《셩교요지》 등은42) 이벽의 저술로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저술되거나 전사된 자료라는 측면에서, 또 이 자료들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그의 저술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43)

 

이승훈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었다. 그는 교회에서 물러남과 다시 나옴을 거듭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신앙에 대한 입장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명했다.44)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했던45) 그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 시 부친이 천주교 서적을 불사르는 동시에 칠언율시(七言律詩) 두 편을 짓자,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 1728~1803)에게 보내었으며, 벽이시(闢異詩)를 지었다.46) 그런데 이는 일시적으로 신앙이 흔들렸던 것에 불과하였다. 즉 그는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러는 동안 박해가 일어나서 우리 가족은 어느 가족보다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나의 형제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세를 중단시키지 않기 위해 다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라고47)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권일신과 함께 교회를 이끌었는데, 정약용은 “서양의 호인 베드로를 칭하고 다녔다”고 하였고, 최창현은 “신부로서 활동하였다”고 하였으며, 정약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48) 이렇게 그는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훈도 여러 차례 을사년(1785) 이후에는 배척했다고 진술했지만, “과연 을사년 이후에 한 번 이 천주학을 믿었으며, 몇 년 동안 단념할 수 없었다”고49) 고백하였다. 그래서 황사영은 “그 후 그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회를 봉행하였습니다”고50) 하였다. 그가 외형적으로 배교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외척내수(外斥內守) 내지 외배내신(外背內信)의 이중적 모습으로 자신의 내면적 천주 신앙을 지킨 것이다.51)

 

1786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심과 선교열을 북돋우려 가(假)성무집행제도52)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1787년 이 제도가 잘못된 일임을 알고 중단하였다. 그리고 1789년 북경에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파견하면서 보낸 서한에서 이 제도의 실시로 인한 잘못 때문에 이승훈은 깊은 죄의식에서 나온 절박한 구원 의식을 드러냈다. 즉 “나는 완전히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또 자진하여 마귀의 종이 되어, 성사들을 집전하는 일에 관여하기까지 엄청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영혼까지 잃어버리게 하였으므로 나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53)고 하였다. 그는 1787년 겨울 반촌(泮村) 김석태(金石太)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기경(李基慶)은 “정미년 10월 무렵부터는 승훈의 무리들이 다시 천학(天學)을 숭상한다는 말이 귀에 시끄러울 정도였습니다”고54) 하였다.

 

1790년 4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은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결정하였다.55) 그해 7월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보내며 쓴 서한에서 “결국 우리를 직접 가르치고 우리에게 보다 효력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제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떨어진 깊은 구렁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56)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밀사의 파견과 이승훈의 서한은 북경 교회뿐만 아니라 교황청까지 크게 감동시켰다. 구베아 주교의 요청에 따라 비오(Pius) 6세(1717~1799) 교황은 1792년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를 특별히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위임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교황청과도 간접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그것은 이미 5년간에 4천 명의 신자를 갖게 된 조선 교회 발전의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57)

 

1791년 11월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평택 현감이던 이승훈은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때 홍낙안(洪樂安, 1752~?)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장서>(長書)를 보내 윤지충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 사교의 무리를 일망타진할 것을 촉구했다. 형조 신문에서 이승훈은 구서(購書), 간책(刊冊), 반회(泮會)를 모두 모함이며,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삭직(削職)을 당했다.58) 정약종도 “신해 이후에는 이승훈이 서학에 전심하지 아니했으므로 그를 심복하지 않았다”고 했고,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올 당시 지황(池璜, 사바)은 이승훈의 서한을 휴대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때 이승훈은 이미 반교를 하고 있었다”고59) 하였다. 그럼에도 미약하게나마 교회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즉 홍익만(洪翼萬)은 “저는 갑인년(1794)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고60) 하였다. 이에 대해 황사영은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는 성교회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그것은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고61) 하였다.

 

1795년 4월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실포(失捕) 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7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승훈은 예산으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 <사학 가운데서 가장 요상하고 도리에 어그러진 말들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깨부수고 미혹됨을 깨우치는 글>(?惑文)을 지어 천주교를 배척하였다.62)

 

이처럼 1785년, 1791년, 1795년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승훈은 그 사건의 관여자로 지목되었는데, 그의 한문서학서 구래(購來)가 천주교 관계 사건의 원인 내지는 원죄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63) 그는 1785년 박해에 <벽이문>을 짓고, 1791년 박해에 삭직을 당하였으며, 1795년 박해에 귀양가서 <유혹문>을 지었다. 즉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마다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거나 공동체를 보호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신앙을 배척했다. 그러나 박해가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세례를 주고, 가성무집행제도를 만들어 활동하며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등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가운데 있는” 교회의 모습이기도64) 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신앙의 동태에 대해 “을묘년에 신부님이 이 나라에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얼마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자 두려워 다시 움츠렸습니다”고65) 하였다.

 

권일신은 장인 안정복에게 천주교는 참으로 진실한 학문이고 천하의 큰 근본과 통달한 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거듭 권유하기도 하였다.66) 1785년 아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과 함께 김범우의 집에서 있었던 신앙공동체 모임에도 참석하였고, 사건이 일어나자 형조에 아들, 이윤하(李潤夏), 이총억, 정섭(鄭涉) 등을 데리고 가서 압수한 서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요구였다.67) 이 사건 이후 그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과 함께 용문산에 있는 절에 가서 8일 동안 피정을 하였다.68)

 

1786년 봄 가성무집행제도하에서 신부로 활동하다가69) 1787년 봄 성무 활동을 중단하고 윤유일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70)을 담은 사목 서한을 받고 이승훈 등 일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책자 간행에도 참여했고,71) 1791년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에게 교리를 가르쳤다.72) 충주 공동체를 세웠던 이기연(李箕延)의 결안에는 “권일신과 연결되어 사학에 깊이 홀렸다. 집안의 제사에 참석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부터 가까운 동네에 이르기까지 남녀들을 속이고 꾀어내어서 한 고을을 미혹시켰다.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즐겨 사학의 괴수가 되었다”고73) 하였다. 그는 최창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유항검 등과 더불어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열성을 배가하던 중, 1791년 11월 3일 교주(敎主)로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총회장 최창현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르는 사람이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이고,74) 정약전도 “가장 존경하여 믿은 자는 권일신”이며,75) 이존창도 “자신과 최필공과 권일신”을 사학의 괴수로 지목하였다.76) 이처럼 교회 지도자로서 활동했던 그는 신앙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해지자 책임을 지려고 했을 정도로 공동체를 보호하려고 했고, 구베아 주교의 가성무집행제도 금지령에 따라 교도권에 순명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교회 내에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권철신이 신앙을 받아들이자 온 가족이 믿고 따랐고,77) 그는 양근 일대에 살던 이들에게도 전하였다.78) 신유박해에 그에게 천주교를 배운 죄로 양근 조응대(趙應大)는 강진으로, 윤지겸(尹持謙)은 진해로, 윤학겸(尹學謙)은 사천으로, 며느리 숙혜(淑惠)는 순천으로, 행랑에 살던 순덕(順德)은 칠원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회장 강완숙(姜完淑)의 서찰을 받기도 하였다.79)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과 친인척들이 앞장서서 천주교를 수용하여 지방 각지에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하였다. 즉 광주(廣州) 공동체의 정약전 형제들은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여주 공동체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여러 차례 찾아와서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강생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며, 내포의 이존창은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문하로 옮겼다. 포천 공동체의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고종사촌이고, 충주의 이기연, 권상익(權相益), 이재섭(李載燮) 등은 그의 사돈, 조카, 사위이다.80) 특히 충주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 및 양근, 광주 등의 지역과 밀접히 연결된 곳이었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양근의 권일신 일가는 충주를 통혼권(通婚圈)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 관계를 통하여 충주에 천주교가 전해졌던 것이다.81) 그리고 호남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은 천주교를 연구하려고 찾아오기도 하였고, 진산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은 정약전을 통해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82)

 

그는 1791년 동생 권일신의 죽음 이후 드러내놓고 신앙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83) 그럼에도 그는 도량이 크고 헌신적인 사람이어서 여러 사람의 신임을 얻고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서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고문으로 변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가엾은 사람들 같으니! 그로 인해 그들이 반평생 거둬들인 노고를 헛되게 하고 아무 보상도 없는 형벌을 받으니 참으로 유감스럽구나!”라고 한탄하였다.84) 이는 저명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벗어버리지 않았고, 자기 삶의 원칙을 공부한 대로 실천한 독행자로서의 명망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퇴거(은수)의 삶은 성리학 신봉으로 인한 삶의 선택이라기보다 천주교 신봉으로 인한 삶의 선택이었다.85)

 

당시 교회 안팎에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즉 강세륜(姜世綸)은 “그 소굴 속에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을 말하자면, 조정의 벼슬아치로는 이가환이 있고 경기에는 권철신과 정약종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은 “서양의 천주교를 하는 사람 중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로는 양반의 경우 저와 권철신, 정약종 무리들이다”고86) 하였다. 이가환은 사학의 괴수로 호중(湖中)의 이존창, 양근의 권철신, 서울의 최필공이라고 하였다.87) 이처럼 그는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실천적 삶과 가르침은 친인척들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존경을 받았고, 여러 지방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1791년부터 그의 드러나지 않는 삶은 복음적인 퇴거(은수)로 볼 수 있다.

 

정약종은 입교한 이후 항구한 열심으로 신앙을 실천하였다. 특히 그는 재혼한 아내 유(柳) 세실리아와 금욕을 하며 살 생각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던 정덕관(貞德觀)에 따라 재혼한 이후에도 금욕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환과(鰥寡)의 정(貞)’을 지향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그의 엄격주의적 신앙을 나타내며, 개인 윤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88)

 

그는 1794년 홍익만과 한문서학서를 가지고 교리를 토론하였고, 1795년 이후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여러 신자, 즉 양반 황사영, 중인 최창현, 현계흠(玄啓欽), 손인원(孫仁遠), 이합규(李?逵), 손경윤(孫敬允), 홍필주(洪弼周), 강완숙, 그리고 양인(良人) 김계완(金啓完), 백정(白丁) 황일광(黃日光)과 황차돌(黃次乭),89) 각수(刻手) 송재기(宋再紀), 포수(砲手) 김한빈, 고공(雇工) 임대인(任大仁, 토마스), 총모장(?帽匠) 장덕유(張德裕), 김일호(金日浩) 등과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90) 그는 임대인에게 십계명과 칠극을, 황차돌에게 십계명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91) 이렇게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던 그의 실천적 사상은 종교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는데, 양반 지배층 중심의 기존 질서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와 사상이 이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92)

 

그는 주일에 첨례할 때 최창현이 만들어 보내준 금장단선(錦帳緞?)으로 된 휘장을 천주상(天主像)에 걸고 무릎 꿇고 앉아서 경문을 외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였다.93) 그는 천주교의 전파와 보급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으로서 주문모 신부와 자주 연락하면서 자신의 집에 여러 번 맞아들였고,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며 교리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황사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속 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회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였고,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고통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혹 한 가지 조그만 도리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자고 밥 먹는데 맛이 없었으며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굳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싫증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를 하고 나서는 곧 강론을 펴기 시작해서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으므로,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혹 자기가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알아 깨닫게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말이 술술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놓아도 가려내는 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고,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습니다.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고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94)

 

그는 1799년 선교사 영입을 위한 서양의 큰 배를 청해오려던 계획에 동참하여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95) 또한 당시 한문서학서는 한글로 많이 번역되었는데,96) 그는 번역에 그치지 않고, ‘교인 가운데 우매한 사람’(敎中愚者)을 위해 한글로 된 교리서 《쥬교요지》(2권)를97) 저술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이 《성세추요》보다 더 우수하다고 평가하면서 인준하였다. 또한 교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성교전서》(聖敎全書)의 편찬을 시도하였다가 박해로 중단하였다.98) 이 책의 저술을 통해서 그는 조선 교회에서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해 주었다.99)

 

이처럼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면서, 복음의 권고대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제적 친교로 신앙을 실천하였다. 명도회장으로서 주문모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복음 전파에 온갖 열정을 다했다. 그는 주보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 신앙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듯이, 그도 믿음을 통하여 스스로 강해졌다. 또한 성인이 방대한 저술들을 통하여 믿음의 중요성과 믿음의 진리를 설명하였듯이,100) 그도 교리서를 저술하여 당시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 신앙을 굳건히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4.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 시 이부만(李溥萬)은 아들 이벽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면서 목에 끈을 매달고 죽으려고 하였다. 그는 부친의 박해를 받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부인하겠는가? 또 어떻게 부친을 죽도록 내버릴 수 있는가?’라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친에 대한 효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101) 그는 명시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는 배교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회의 말을 사용해서 닥친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그는 부친에 의해 감금된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다가 병102)에 걸린 지 8~9일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부친과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신앙을 선택한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등과 같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과 부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즉 묵언의 거룩한 행동으로 신앙과 효를 증거한 것이다.103)

 

그는 부친을 위시한 다른 가족들로부터 갖은 수단으로 ‘범주적(範疇的)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극심한 위협을 당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범주적 신앙’도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말’로 부친의 죽음을 저지시킴으로써 효를 실천하는 ‘초월적(超越的) 신앙’도 아울러 성취하였다. 그는 극도로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범주적이고 초월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믿고 증거한 신앙으로 처신하였던 것이다.104)

 

1791년 목인규와 홍낙안은 권일신을 ‘교주’라고 고발하였다.105) 그는 그해 11월 3일 체포되어 7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천주교에 대한 금령이 내려진 이후 서학서를 보기가 어려워 보지를 못했다고 했다. 3차 심문에서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지은 안정복과 입론(立論)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5차 심문에서 “제가 만약 그것이 사학(邪學)임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요사스럽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겠습니까. 그 책 가운데 ‘밝게 천주를 섬긴다’든가 ‘사람들에게 충효(忠孝)를 느끼게 한다’는 등 몇 구절의 좋은 말 외에는 다른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억지로 요서(妖書)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6차 심문에서 《직방외기》(職方外紀)와 《천주실의》를 읽었다고 하면서, “예수의 사람 됨의 사정(邪正)은 비록 그 책의 전체적인 대의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으로 ‘엄숙 공경하고 삼가 두려운 모습으로 천주를 받들면 법이 없어도 자연 임금에게 충성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 그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람 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치에 벗어난 사설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이 삿되다고 배척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7차 심문에서 “그 학술은 대체로 공(孔) 맹(孟)의 학문과 달라 인륜에 어긋날 뿐더러 나아가 제사를 폐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게 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사학(邪學)입니다”고106) 하였다. 11월 5일 비변사는 “을사년 이후라도 그가 만약 회개하여 자책하고 정학으로 돌아왔다면, 온 세상이 어찌 이렇게까지 지목하겠습니까”라고107) 하였다. 또한 형조는 “그가 교주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뜬소문으로 돌려 극구 변명을 하면서도, 유독 예수에 대해서는 끝내 그가 사특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한 매를 치면서 묻는 데도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그가 그 학문에 빠져 미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108) 하였다.

 

이처럼 1, 3차 진술로 볼 때, 신앙을 실천하지 않은 것처럼 진술하였고, 7차 진술에서 제사 폐지를 언급하면서 이 점에서는 사학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5, 6차 진술에서 요서라고 할 수 없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척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그해 11월 11일 그에 대한 회유를 직접 지시했기에, 집중적이고 집요한 회유를 받았다. 16일 형조는 그가 15일 옥중에서 <회오문>을 작성했다고 보고하였으며, 이에 정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호서로 이배(移配)토록 하였다.109) 결국 그는 유배지 예산으로 가는 도중에 엄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11월 11일부터 집중적인 회유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15일에 지은 <회오문>을 보면, “다만 이전의 잘못됨을 고치고 뉘우침으로써,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80세 노모께서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형제들은 무고하게 잡혀 들어오니…”라고110) 하였다. 이 글은 자신이 배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천리(天理)의 공(公)에 입각한 삶과 인욕(人慾)의 사(私)에 입각한 삶을 각각 2조목씩 들고 있다. 보통 사대부의 글이라면, 하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임금의 뜻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사람 되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 앞에 상위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 특징적이다. 이 부분에 그가 말하고자 했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사적인 삶으로는 자식 된 도리로서 노모의 임종까지는 지켜야 한다는 보은을 강조했지만, 공적인 삶으로는 하늘이 사랑하여 살리려고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를 당시 교회 상황에 비춰본다면, 초기 교회의 지탱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성직자 영입이 실패한 직후였으므로, 이를 성공시킬 때까지는 자신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111) 이처럼 임금의 지시에 의한 집중적인 회유를 받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공권력이 아닌 압제로 변질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고,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112) 결국 그는 신앙에 관한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범주적 그리스도 신앙’을 간직하면서 받게 된 귀양 판결 후 하늘의 뜻에 따라 팔순 노모께 대한 효도를 다하며 살 것을 종용한 임금의 뜻에 순응하였다. 그는 익명(匿名)의 양식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신앙’도 성취한 뒤에 감형을 받고 나서 즉시 닥친 죽음을 맞았다고 보기에, 순교로 신앙적 삶을 마쳤다고 볼 수 있다.113) 그렇지만 이러한 내밀한 심정을 추론할 수 있지만, 정조의 회유지시에 의해서 외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114)

 

그런데 당시 유생들은 권일신이 천주교를 버렸는지 알 수 없고, 또 나오자마자 다시 믿었다고 하였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진술로 보이지만, 1795년에 관학유생 박영원(朴盈源)은 “경기 지방의 권일신과 호서의 이존창 같은 무리들로 말하면 전의 형옥에서 모두 자복했었는데 옥문(獄門)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예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고115)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는 “근년 이래로 불순한 학문이 날로 성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일신의 무리는 지금 이미 죽었으나 그 이웃 마을에 점점 물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다시 이전과 같으며, 호남까지도 선동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고116) 하였다. 그리고 이만채(李晩采)는 “일신이 유배되기 전에 도중에 죽어서, 진정한 감화 여부는 알 수 없게 되어 애석하다”117) 하였다.

 

교회 측 기록은 그의 배교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달레는 “그의 생애 중에 그렇게도 위대하였고, 형벌 중에서 그렇게도 위대한 것을 보아온 그 사람이 이렇게 그의 최후 순간을 비겁한 나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을 보게 되니 이 무슨 광경인가. 그러나 또 얼마만한 교훈인가. 물론 기록들이 별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굴복 행위의 정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을 공공연한 배교로 규정지을 수도 없지만 하나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 풀 수 없는 의문 앞에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안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고118) 하였다.

 

권철신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고, 의금부에서 2월 11일 두 차례, 18일, 19일, 21일에 각 한 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양근 일대를 천주교에 물들게 만든 괴수임을 자백하라고 하자, “이러한 비방은 동생과 함께 이 책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책을 보았습니다. 신해년(1791) 제 동생이 이 때문에 형벌을 받았으며 나라에서 금지하는 일도 매우 엄했습니다. 또 그때 제 동생이 살아나왔습니다. 임금님의 은혜가 한이 없어서 문을 닫아걸고 감읍(感泣)하였습니다. 저는 자청해서 제 동생이 베껴놓은 사서(邪書) 오십여 권을 감영에 바치고 감영 마당에서 불태웠습니다. …이 뒤로는 집에 한 권의 책도 없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제 허물을 자책했습니다. …사학(邪學)에는 오륜(五倫)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한두 명의 교주를 고발하라고 하자, “시골구석에 처박혀 지낸 6년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의 혐의도 벗지 못하는데, 누가 교주임을 무슨 이유로 알 수 있겠습니까? …천주학 패거리에 대해서는 조무래기들이나 우두머리를 막론하고 참으로 정확히 지적하여 아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또한 최필공을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그리고 가까운 고을에 사는 정가(丁哥, 정약종)가 이 학을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눈으로 보지 못한 내용이라고 하였다. 정약종이 했던 학문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기와 같은 비방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날 신장 5대를 맞았다.119)

 

18일 3차 심문에서, 신해년 이후에 신부가 된 이가 바로 권철신이라고 여러 사람이 지적했다고 하자, 그는 “제 동생 권일신의 일로 숱한 지목이 모두 저에게 씌어졌으나, 저는 지금 이미 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하여 끊고 믿지 않습니다. 배척하여 끊은 사람에게 어떻게 신부와 대부의 칭호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9일 4차 심문에서 “윤유일의 흉악스럽고 비밀스런 일(1790년 북경 방문)에 대해서는 과연 알았으나 관아에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정황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죄’라는 것을 늦게나마 자복합니다”고 하였고, 신장 30대를 맞았다.120)

 

위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그는 1791년 이후 교회와 관계가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그런데 1차 심문에서 국은이 망극하여 이에 보답하려 노력했다는 것은 정조에 대한 모반죄에 걸려들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이 모두 지목한다는 물음에 동생 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퇴거’(은수) 상태에 대한 일관된 설명이지만, 다른 교우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는 심문을 받을 때, 체포되지 않은 신자들에 대한 고발을 하지 않았다. 1차 심문에서 최필공, 정약용 형제를 아느냐는 질문에 안다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2차 심문에서는 우두머리 및 일반 신자들을 고발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달리, 1791년 이후에도 그는 교회 활동을 드러나지 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경기 감영에 갇혀있는 이중배가 “천주교를 믿는 권철신을 찾아가 만나보았습니다”라고 하자, 마마의[痘醫]로서, 또 동네의 잔칫집에 왔다가 방문한 것이라고121) 하였다. 그리고 김건순(요사팟)이 양부가 세상을 떠난 18세(1793) 이후부터 22세(1797) 사이에 권철신을 밤에 찾아가서 하느님의 존재와 삼위일체, 강생의 신비를 듣고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122) 또한 황사영은 “교우 중에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자 중에 쓸 만한 자로 양반에 있어서는 자신, 권철신, 정약종 등”이라고123) 하였기 때문이다.

 

3차 심문의 진술 자체로만 보면, 교회를 배척하여 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791년 이후 신부든, 대부든 이를 인정하게 되면 계속적으로 연루자가 생겨나게 되는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답변은 배교한 것이라기보다는 본인과 관계없음을 진술함으로써, 다른 교우들을 계속해서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의 진술일 것이다.124) 그가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배교했다고 겉으로는 진술한 것과 달리, 속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문관 앞에서 배교하고, 그것을 믿게 하려고 한 것은 단지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꾸며댄 것이지,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변하여 진실로 그것을 버리거나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125)

 

교회 측 기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배교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즉 황사영은 그가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선사(善死)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고126)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체포되어 판관들 앞에 서자, 그는 상세하고 조리 있게 천주교와 신앙 실천을 설명했으며,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답변하여, 직책상 심문에 참석했던 가장 악착스러운 적들 중 한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서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심문을 받는 다른 죄인들을 보면, 모두가 정신이 나간 듯 보이나, 권철신만은 고문을 받는 가운데서도 잔칫상에 차분히 앉아있는 사람처럼 답변한다.’ 심리가 끝나기도 전인 음력 2월 21일 권 암브로시오는 66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어떤 이들에 의하면 매를 맞고 사망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에 의하면 상처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감옥 밖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정황이 그들로 하여금 그의 항구심에 약간의 의혹을 품게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떠한 자료에도 근거하지 않은 단순한 의혹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토록 수많은 세월 동안 형벌을 받기까지 감정과 행동에 있어 의연함을 보여준 이 교우에 대한 우리의 추억을 얼룩지게 하지는 못한다”고127) 하였다.

 

그는 주재자의 존재를 진리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흠숭을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서학에는 오륜(五倫)이 없다고 유학과 천주교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결정했던 제사 금지령을 거부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실천했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순교적’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128)

 

1801년 2월 9일 사헌부에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사학치성(邪學熾盛)의 원흉으로 주벌(誅罰)할 것을 청하면서, 이승훈이 “구입해 온 요서(妖書)를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하기를 달갑게 여겨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고129) 하였다. 이승훈은 그다음 날 체포되어 2월 18일까지 6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 여정에 대해 추궁을 당하자, 1791년 이후에 천주교를 떠났고, 1795년 예산 유배 시 지은 <유혹문>을 필사하여 각 면리(面里)에 일일이 돌려서 예산 일대가 다시는 물들지 않도록 했다고 하였다.130) 또한 자신이 주자학에 전념했다고 하면서, ‘주자백록동연의’(朱子白鹿洞衍義)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척사인(斥邪人) 이기경도 자신의 척사 사실을 알고 있었고, 척사론자이며 혼척(婚戚)이 되는 심유(沈?)와 교류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증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정학(正學,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사학을 물리쳤다고 하였다.131)

 

그럼에도 그는 이가환이나 정약용을 집권층 내부로부터 제거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줄 수 있었던 ‘구서전법’(購書傳法)한 사실을 집중적으로 추궁받았으며, ‘자위교주’(自爲敎主)가 되었음을 비난받았다. 그는 천주교를 조선에 전파한 원흉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던 것이다.132) 2월 25일 이병모는 “이승훈은 당초에 사서를 구입해 가지고 와서 온 세상에 전하여 배포하였으니 인심이 함닉되고 세도가 어그러진 것은 진실로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가 작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문서에 적발된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신부 등의 말은 명호를 만든 것인데 신과 같이 앙모하는 자를 신부라고 일컬으니 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요, 아비를 대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양인들과 난만하게 왕래하고 있는데 그 실정을 구명해 보면 지극히 흉참하였으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133) 하였다. 결국 그는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순교 여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즉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회를 해쳤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믿음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가까운 옛 친구를 만나면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우므로, 그것이 선사(善死)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고134) 하였다. 그러나 달레는 배교자로 죽었다고 단정하였다. 즉 “이승훈의 죽음은 이가환의 죽음보다도 훨씬 더 비참하였다.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는데,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로도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듭되고 고집스러운 비겁이 하느님의 인내심을 지치게 한 모양이었던지 그는 자기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고 통회한다는 조그마한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다. 맨 먼저 영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성세(聖洗)와 복음을 가져왔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으되,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라고 참수당하였으나, 배교자로 죽었다”고135) 하였다.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갈망하던 구도의 과정에서 이 땅에 천주교가 전해졌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조상 제사 거부를 통해서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가치 인정에 매우 인색했다. 그는 보유론의 입장에서 천주교에 입교하였지만, 그 보유론이 당국과 교회로부터 모두 부정되던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천주교 신앙과 전통적 문화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이때 그가 드러내었던 행동은 천주교회를 떠나고 전통문화로 회귀해 가는 것이었다. 그는 기교자(棄敎者)였지 이른바 배교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영예와 함께, 18세기 지식인 중 하나로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와 새 시대의 도래를 예시해 주는 새로운 문화와의 사이에서 무수한 갈등과 고뇌를 겪었던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136)

 

정약종은 1801년 1월 19일 임대인을 시켜 책 궤짝을 포천 홍교만의 집에서 아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되었다. 좌포청은 2월 8일 정약종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1일부터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았다. 이때 그는,

 

저는 본래 이 가르침을 정학(正學)이라고 알았을 뿐 사학이라고 알지 않았습니다. 압수한 서책은 과연 저희 집에서 나왔습니다. 교주는 제가 문자를 다소나마 이해했던 까닭에 따로 가르치고 전수하는 자가 없었으며 소굴이나 도당에 관해서는 문을 닫고 홀로 있었던 까닭에 따로 고할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만약 사학이라고 인식했다면 어찌 감히 그것을 했겠습니까? 그 가르침은 대공지정(大公至正)하고, 가장 진실된 지식의 도리입니다. 때문에 몇 년 전 나라에서 금한 이후에도 처음부터 바꾸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비록 만 번 형벌을 당해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삶을 바라고 죽음을 꺼리는 것은 사람의 일상적 감정인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의를 등지고 살고자 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천지간의 죄인이 되어서 살더라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도당을 지적하라고 하는데, 조정에서 정도로 인식하고 현인으로 지목하여 관직을 주고 상을 준다면 어찌 가리켜 고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번번이 형륙을 가하니 어찌 고할 수 있겠습니까?137)

 

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대공지정(大公至正)하며, 자신의 신앙을 정도(正道)로, 또한 배교를 ‘의를 등지고 사는’ 행위라고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우고 가르친 자와 와굴 및 도당은 없고, 체포되지 않은 주문모 신부에 대해서도 서양과 중국에는 신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다며138) 천주교 공동체 보호를 위해 끝까지 함구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남겨둔 기록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즉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이며, 집에도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이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라는 말이었다.139) 당시 ‘십이자흉언’(十二字凶言)으로 불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임금과 부친이 천주교 신앙을 금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임금과 부친의 존재 가치까지 거부하면서, 천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보급하고자 했다.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로의 접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충효일맥의 교화를 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있던 사회에서 충효라는 구래의 가치보다 더욱 중요한 새로운 가치가 있음을140) 주장하고, 자신들에게 적용되는 왕법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써 절대적인 왕권을 상대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당시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말이어서 조정에 박해의 정당성을 확실히 부여해 주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141) 그래서 다른 신자들에게 적용되었던 요언혹중죄(妖言惑重罪)보다 더 무거운 ‘범상부도죄’를 적용받게 되었다.142) 그럼에도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고,143) 그해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순교하러 갈 때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라고 했고, 서소문 밖에 있던 이들에게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서 행하시오”라고 말했다. 칼에 한 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다시 엎드렸다.144) 앵베르(Imbert, 1796~1839) 주교는 그가 “1801년 박해 때에 자신을 천국으로 보낼 칼날이 떨어지는 것을 보겠다고 해서 (관례대로 엎드려서가 아니라 나무토막에 대고 누워서) 눈을 뜬 채 참수를 당하고자 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라고145) 하였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새롭게 받아들인 신앙을 깊게 이해하면서 실천하였으며,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맏아들 정철상(丁哲祥, 가를로)은 1801년 박해에, 둘째 아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과 딸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그리고 부인 유 세실리아는 1839년 박해에 순교하였다.146) 또한 후대의 신자들도 그를 본받으려 했다. 즉 1815년 청송에 살던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은 정약종을 따라 배우고 주문모로부터 전해 받은 뒤에 재를 넘어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는 교우촌을 이루어 교주(敎主)가 되었다고147) 하였다.

 

 

5. 맺음말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대한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응답으로 이 땅에 천주교가 전해졌다.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는 이벽이었고, 그의 권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도교적 기반을 갖고 있던 정약종은 이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세례를 받아 반석이 된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신자 수가 5년 만에 4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한국 교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와 신앙을 간직한 그들은 복음적 가치에 맞는 실천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아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논쟁을 벌였으며, 명례방 신앙공동체 모임을 주도하였다. 이승훈은 박해를 받을 때는 교회를 떠났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와 세례를 지속시켰고, 가성무집행제도를 실시했으며 북경 교회와 연락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하였다. 권일신은 적극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각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특히 1791년 이후의 삶은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약종은 교회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였다. 신분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천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명도회장으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였고, 교리서를 저술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어 누리기 위해 신앙을 받아들이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이처럼 훌륭한 성덕을 남겼던 이들도 1785년, 1791년, 1795년, 1801년의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은 부친의 박해를 받아 집안에 감금된 상태에서 1785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는 하느님과 부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가운데 신앙을 증거한 것이다. 권일신은 1791년 체포되어 7차례의 심문을 받으면서 용기를 내어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11일부터 15일 사이 정조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다. 결국 감형되어 유배 도중에 죽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56세) 이후 1801년(66세)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1791년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진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되었고, 1795년에는 <유혹문>을 지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겉과는 달리 믿음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약종은 항구한 신앙을 보여주었는데, 1801년 박해를 받아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면서도 이에 맞서 용기를 내어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가혹한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을 때,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하셨는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해를 지낸 이때,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의 모범을 통하여 신앙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면서, 신앙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 속에서 이들의 신앙과 순교자적 죽음을 충실히 살아갈 때, 곧 다가올 그들의 시복이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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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祖實錄》

《承政院日記》

《辛酉邪獄推案》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辛酉邪獄 罪人李基讓等推案》

《日省錄》

《正祖實錄》

《推鞫日記》

 

2. 저서 ·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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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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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교단은 2013년 3월 춘계 주교회의에서 ‘창립 선조’, ‘창설 주역’, ‘창립 주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5위 중 정약종은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포함되어 있고, 그 외 4위는 2013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결정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있다.

 

2) 송석준, <정약종과 유학사상>, 한건, <정약종의 신학사상>, 원재연, <정약종 ‘쥬교요지’와 한문서학서의 비교연구>, 서종태,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주명준, <정약종 가문의 천주교 신앙 실천>(《한국사상사학》 18, 한국사상사학회, 2002) 등이 있다.

 

3) 이승훈에 관한 연구는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동>,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이원순, <이승훈 후손의 천주신앙>,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 《만천유고》를 중심으로> 및 이승훈 관계 한문과 서한 자료가 실려 있다(《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02년 2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과 천주신앙’ 세미나에서 차기진, <권철신 · 이벽 ·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서종태, <이벽 · 이승훈 ·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 이성배, <광암 이벽에 대한 신학적 고찰>, 류한영, <이승훈 · 권철신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 견해>, 곽승룡,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등이 발표되었고, 2005년 5월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이벽 세례자 요한’ 세미나에서 류한영, <한국의 시복시성 작업과 이벽연구의 의미>, 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자료의 종합적 검토>, 최선혜,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 여진천, <조선후기의 효사상과 천주교 신앙과의 연관성>, 심상태, <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등이 발표되었다(《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2009년 9월 ‘창설주역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순교사실과 그 평판’ 세미나에서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류한영,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생애와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최인각, <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심상태,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문제 재조명> 등이 발표되었다(《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0).

강원교회사연구소에서 ‘광암 이벽과 포천지역 천주교’라는 주제로 2012년 3월 17일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4) 이익의 문하에 李用休, 李彦 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명학과 公安派의 영향을 받아 파격적 시어를 구사하며 유교적 세계관에서 탈주하였다. 남인학자들의 지향점은 17세기 중반부터 六經 체제 긍정과 성리학 비판, 그리고 실천 윤리의 고취였다. 즉 유학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현실을 비판하는 원리주의 경향이었다. 그 경향이 학문으로의 서학에서 신념으로의 서학으로 넘어가는 단초일 것이다. 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계와 소통 대립 양상>, 《한국사상사학》 34, 한국사상사학회, 2010, 177쪽 각주 65).

 

5) 이벽의 《중용》에 대한 생각은 정약용, 《여유당전서》의 <中庸自箴>(2집, 권3)과 <中庸講義補>(2집, 권4)에 부분적으로 전한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朴齊家는 이벽을 경제의 선비이자 사물의 본성을 깨우친 이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정유고략》(貞 稿略) 권2, <四悼詩 四首>)를 쓰기도 했다(이경구,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푸른역사, 2013, 135쪽).

 

6) 차기진, <권철신 · 이벽 ·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27~45쪽 참조 ;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先仲氏 墓誌銘 鹿菴權哲身 墓誌銘>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300~302쪽.

 

7)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최석우 역주,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2쪽.

 

8) 달레, 앞의 책, 312쪽 ; 김대건 신부는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고 하였다(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184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221쪽).

 

9)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 활동과 정치적 입지>,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39쪽.

 

10) 황사영, <백서> 44행 ; 若鍾供 原初 李蘖聞有西洋學 裝送李承薰 隨其父東郁貢使之行 入往洋人所居之堂 與洋人結識 購得洋書以歸(《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0월 27일 경오).

 

11) 西洋人卽將 《天主實義》 數秩 分置各人前 有若茶飯之接待 渠初不展看 納之歸裝 且語及曆象 則西洋人 又以 《幾何原本》, 《數理精蘊》 等書 及視遠鏡地平表等物 贈爲 行(《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40쪽.

 

12) <방타봉 신부의 1784년 11월 25일자 서한>(최석우, 앞의 글, 11쪽) ; 페레올 주교는 “곧은 마음을 가졌고 특히 천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명민한 이성으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쉽게 인정하여 천주교를 믿기로 했습니다”고 하였다(<페레올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1844년 1월 4일자 서한>,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201쪽).

 

13) <그라몽 신부의 1790년 6월 23일자 서한>(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동>, 12쪽).

 

14)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3일 이승훈 최창현 대질 ; 矣身與丁若銓若鏞權日身輩 相會於李檗家 而果有代洗等事 依倣其書而爲之(《推鞫日記》, 1801년 2월 18일 이승훈 공초) ; 구베아 주교는 “그는 천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의 동포들의 전도사가 되어, 몇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영세를 주었습니다”(1790년 10월 6일자 서한), 《교회사연구》 8, 182쪽 ; 而李承薰 稱號晩泉者 自爲神父 與矣兄弟互相往來製給 矣兄弟別號 而矣長兄範禹 爲道摸 次兄履禹爲發羅所 矣身則馬頭(《邪學懲義》, <正法罪人秩>, 김현우조).

 

15) 황사영, <백서> 44행 ; 김대건 신부는 “이리하여 1784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과 관인들이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오류를 떠나 참 하느님에게로 전향하기 시작했습니다”고 하였다(김대건, 앞의 글, 223쪽).

 

16) 始李檗 首宣西敎 從者旣衆 曰鑒湖士類之望 鑒湖從而靡不從矣 遂駕至鑒湖 旬而後反 於是 公之弟日身 熱心從檗 公作虞祭義一編 以明祭祀之義(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鹿菴權哲身 墓誌銘>).

 

17) 大抵其學 以天主爲重 而其寅畏謹事之義 暗合於古書昧爽丕顯 嚴恭寅畏之訓 故其時果爲看閱(《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8)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116쪽.

 

19) 矣弟自仁川 抵書矣身斡 其學之初頭所聞 盧 不可信矣 其後得看其書則其中欽崇主宰之說 生覺靈三魂之說 火氣水土四行之說 誠有至理不可誣者須熟看此書 然後攻之不可隨衆泛斥故矣身亦看此書(《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20)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16쪽.

 

21)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0, 129~134쪽.

 

22) 안정복은 권철신 · 이가환 · 정약전 · 이승훈 · 이벽과 이기양의 아들인 이총억 · 이방억 등이 천주교 교리를 학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안정복, 《覆?稿》 권10, 與權旣明弟三書兼呈士興, 갑진 12월 ; 이만채, 《벽위편》 권2, 安順菴乙巳日記(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 가문과 천주교 수용>, 42~43쪽, 각주 53) 재인용).

 

23)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2010, 101~103쪽.

 

24) 嘗於冬月 寓居走魚寺講學 會者金源星權相學李寵億等數人 鹿菴自授規程···日入誦西銘 莊嚴恪恭(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先仲氏墓誌銘>) ; 영조는 장횡거가 <西銘>에서 말한 ‘백성은 나와 한 핏줄’이란 民吾同胞를 즉위 초에 “諸臣 於國事 或不能視若自己事 則何能有爲也 張橫渠曰民吾同胞 物吾與也爲國之道 要不出此”라고(《승정원일기》 574책, 영조 즉위년 9월 26일조) 강조하였고, 영조 49년의 소회에서도 “喬木世臣 心豈木也 腸豈石歟 莫云只云說弊 若聞救弊 予則曰 體君體先 貞白一心 常誦張子西銘也夫”라고 <西銘>정신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강조했다(박광용, <조선의 18세기, 국가 운영 틀의 혁신>, 《정조와 18세기》, 역사학회 편, 푸른역사, 2013, 67쪽).

 

25) 정약용, 앞의 책, <鹿菴權哲身 墓誌銘>.

26)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1~132쪽.

27) 황사영, <백서> 35행 ; 달레, 앞의 책, 440~445쪽 ; 조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391~393쪽.

 

28) 《辛酉邪獄罪人 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 供曰 若鍾之神父 李承薰 代父權日身 而神父者 領洗之謂也 代父者敎授之稱也(《辛酉邪獄推案》, 1801년 2월 13일 최창현 공초) ; 달레, 앞의 책, 441쪽.

 

2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11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25쪽.

30) <구베아 주교의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3쪽.

31)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3항.

32)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1일자 21면.

 

33) <이승훈이 1789년 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2쪽 ;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앞의 책, 182쪽.

 

34) <구베아 주교가 Sant Martino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앞의 책, 189쪽.

 

35) 정약용, 앞의 책, <先仲氏 墓誌銘> 附見 閒話條 ; 甲辰下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 見一卷書 <자찬묘지명>(集中本) ; 旣上庠 從李檗游 見西敎 見西書 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 <자찬묘지명>(壙中本).

 

36) 황사영, <백서> 47~48행.

37) 안정복, 《覆?稿》 권10, 與權旣明弟三書兼呈士興, 갑진 12월.

 

38) St.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1860), vol. 4, M.E.P, pp. 5~17(《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3쪽).

 

39) 달레, 앞의 책, 318쪽.

 

40) 이만채, 앞의 책, <乙巳秋曹摘發>, 進士李龍舒等通文 回文. 당시 정약종도 참석했다고 했는데, 그는 1786년에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를 들었기 때문에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41) 正言李毅采疏略曰 噫 彼李檗者 最是邪黨中渠魁(《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3월 11일 정해) ; 執義 柳 疏 略曰 若論邪黨之渠巨魁 則李檗是已(《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3월 15일 신묘).

 

42) 《성교요지》, 하성래 · 이성배 공역, 가톨릭출판사, 1976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릭출판사, 1979 ;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1979(수정증보판, 2001) ;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 《만천유고》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 김동원 편저, 《영성의 길 - 광암 이벽의 <성교요지>》, 하상, 2012.

 

43) 차기진은 “<천주공경가>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째, 잡철의 성격을 지닌 《만천유고》의 저자(편자)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천주공경가>에 첨부되어 있는 부기, 즉 ‘기해년(1779) 섣달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이 지은 가사’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문본 《성교요지》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첨부되어 있는 부기, 즉 ‘《천학초함》을 읽고 광암 이벽이 작성하여 주를 붙인 것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는 《성교요지》에 있는 구약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로 구약의 내용이 조선에 알려진 시기는 훨씬 후대로 추정되고 있다”고 하였다(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 자료의 종합적 검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184~186쪽).

 

44)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9~80쪽. 그는 박해와 신앙고백의 거듭된 엇갈림에 대해 7개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했다. 1) 교회창설 전후기(1783년 말~1785년 초) 신앙심과 교회 활동, 2) 최초의 박해 전후기(1785년 봄~1786년 여름) 최초의 배교 선언과 세례성사의 지속적 수행, 3) 반촌 강습회 전후기(1786년 후반~1788년 후반) 가성직제도의 실시와 심적 갈등, 4) 2차례 밀사 파견 전후기(1789~1790년) 회개와 신앙고백, 퇴거의 모색, 5) 진산사건 전후기(1791~1794년) 두 번째 배교 선언과 신자로서의 관직 생활, 6) 예산 귀양살이 전후기(1795~1796년 봄) 세 번째 배교와 성리학자로의 회귀 표명, 7) 신유박해 전후기(1796년 여름~1801년 2월 26일) 죽음을 앞둔 당파적 의리와 死信의 향방 등이다.

 

45) 李承薰諺飜之事 曾所目擊(《邪學罪人 嗣永等推案》, 1801년 10월 11일 황사영 공초).

 

46)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 벽위문에서 ‘천당지옥설’과 ‘위천주횡행설’을 비판했고, “天彛地紀限西東 暮堅虹橋?靄 中一炷心香 書共火遙瞻 潮廟祭文公”이라는 <벽이시>를 지었다(이기경, 《闢衛編》, 서광사, 1978, 84~85쪽).

 

47)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교회사연구》 8, 172쪽.

 

48) 달레, 앞의 책, 322~328쪽 ; 問曰 李承薰招內 乙巳以後改革云 而以矣供觀之 則承薰之稱西洋號 與矣身同遊乃在乙巳之後承薰 豈非誣罔乎(《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3일 정약용 공초) ; 供曰 若鍾旣受領洗於李承薰 則其爲神父之 狀已告於前招 而矣身亦嘗以承薰爲神父(《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6일 최창현 공초).

 

49) 矣身果於乙巳以後 一審爲此術 而數年未能斷念矣(《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3일 이승훈 공초).

50) 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황사영, <백서> 44행~45행).

51)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49쪽.

 

52) 이 제도를 흔히 ‘가성직제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사영은 <백서>에서 ‘妄行聖事’(48행)라고, 달레는 ‘교계제도’(앞의 책, 323쪽)라고, 노용필은 ‘신자교계제도’(《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한국사학, 2008, 237쪽)라고 하였으며, 원재연은 ‘모방성직제도’(<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36쪽), 조광은 ‘가성무집행제도’(《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325쪽)라고 하였다.

 

53) <이승훈이 1789년 말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1쪽.

54) 至丁未十月間 承薰輩 復崇天學之說(《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3일 갑신).

 

55) <구베아 주교의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앞의 책, 182~183쪽 ; 有一懇請於主敎 以邀出神父爲約 而庚戌春還來之後 與承薰樂敏等 日夜謀議專以 請來神父爲計矣(《邪學懲義》, <移還送秩>, 유관검조).

 

56) <이승훈이 1790년 7월 11일에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8쪽.

57)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 활동>, 22쪽.

58)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0일 · 14일 이승훈 공초.

 

59) 辛亥以後 則承薰不爲傳心此學 故矣身不爲心服(《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3일 정약종 공초) ; 至矣身來時 池璜 不待李承薰之書字 蓋其時彼已叛敎矣(《辛酉邪獄 罪人李基讓等推案》,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공초).

 

60) 至於甲寅年間 又見中國出來冊子···故種種講論於家煥承薰若鍾嗣永等家 而受邪號於承薰 稱以安堂 亦受領洗之法矣(《邪學懲義》 권1, <正法罪人秩>, 洪翼萬).

 

61) 황사영, <백서> 45행.

 

62) 《일성록》, 정조 19년 7월 26일 을해 ;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유혹문>(?惑文)의 내용은 降生救贖, 天堂地獄說, 그리고 위천주횡행설(爲天主橫行說)을 배격하였을 것이다(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78~80쪽).

 

63)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72쪽.

6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새 천년기》 8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14쪽.

65) 황사영, <백서> 45행.

 

66) 向來省吾 權日身之字 力勸此學 余聞若過耳之風 其後又移書勸之 謂此學眞眞實實 天下之大本 達道專在於是(이만채, 앞의 책, <安順菴 乙巳日記>, 答李士興 乙巳春).

 

67) 비변사는 “權日身之溺於邪學 卽親知所共聞知 曾於乙巳年 自秋曹推?金姓中人之際 日身以士夫之子 自入法曹之庭 願與金姓 同被其罪 卽此一款 爲渠斷案, 故親知皆與之相絶”이라고 하였고(《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그는 “則乙巳年間 中人忘其名金姓人 以尊奉西學事 被訊推 而渠與金哥 爲相親之間 伊時以渠與金哥 同看 《天主實義》 之故 頗爲衆口之指目 厭然自諱 有所未安 果挺身自服於曹庭 要爲卞破解紛之計”라고 하였다(《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8) 달레, 앞의 책, 322쪽.

 

69) <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1789년 말에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3쪽 ; 황사영, <백서> 48행 ; 김대건 신부는 “그 당시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즉 이단원, 최창현, 유항검 등이 아주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사제들을 선출하고 세례, 견진, 고해 등 온갖 성사들을 집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들은 북경 주교님은 앞으로는 그 주교와 사제들이 더 이상 성사를 집행하지 말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고 그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223~227쪽).

 

70) 중국 의례에 대한 찬 반 논쟁은 1715년 3월 19일 글레멘스 11세의 칙서 를 통해 중국 의례에 대한 7가지 금지령이 선포되었고, 1742년 7월 11일 베네딕도 14세는 를 선포하여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교황청은 <중국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허용은 아니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하였고, 1958년 한국 주교단은 《한국교회 공동 지도서》에서 제 상례에 관하여 허용 및 금지 의식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허용 의식은 시체나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의식은 제사에 있어서 축문(祝文), 합문(闔門), 장례에 있어서 고복(皐復), 사자밥, 반함(飯含) 등이다.

 

71) 罪人權日身家所藏邪書 使之一一搜來矣 回告內以爲 所有書冊 無遺搜閱 而別無關於邪學冊子 只有辛亥瞻禮爲名長廣數寸一冊書帖冊後面 列錄邪學諸書名目一冊及邪書目錄謄書紙一片(《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72) 辛亥年始學邪書於日身處 受號巴爾納(《邪學懲義》 권1, <正法罪人秩>, 鄭光受).

 

73) 《邪學懲義》 권1, <正法罪人秩>, 各道正法罪人秩, ‘結案 招締結日身 沈惑邪學 不參家祭 先自家內 以至隣里?誘男女?誤一邑 自作窩主 甘心邪魁 眞贓已露 情踪難掩 究其罪狀 萬戮猶輕云云 辛酉十二月 正法’.

 

74) 矣身最所尊仰者 則權日身丁若鍾李存昌(《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공초).

75) 其時尊信者 卽權日身(《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4일 정약전 공초).

 

76) 京中崔必恭爲魁 湖中則矣身未悟之前 得魁萃之名 楊根則權日身爲魁首矣(《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7일 이존창 공초).

 

77) 황사영, <백서> 11~12행 ; 鹿菴之弟日身 首離刑禍 死於壬子之春 盡室皆被指目 鹿菴不能禁(정약용, 앞의 책, <녹암권철신 묘지명>) ; 경기감사 이익운은 “日身罪斃之後 渠之同黨 尙不知改依舊爛漫 往來不絶 則權哲身之全家稔惡 不待輸款而皎然矣”라고 하였다(《순조실록》 권2, 순조 원년 2월 21일 정묘).

 

78) 심문관들이 “到今陽根一境 無非邪學是遣 問其所從來則 皆自矣身之家是如乎矣…又況所謂矣身輩敎友 皆指矣身爲 鄕中之窩窟矣”라고 물었다(《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79) 《역주 사학징의》 1, 조광 역주, 한국순교자현양회, 2001, 262~264쪽 ; 矣身常書札往復處 則丁若鍾丁若鏞及吳錫忠權哲身文榮仁等家…書禮相通處段…哲身及哲身妹家(《邪學懲義》 권1, <正法罪人秩>, 姜完淑).

 

80) 권일신의 동생인 權得身의 아들 권상익은 충주에 살던 이기연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기연의 아들 李仲德은 신유박해에 전라도 장수로 유배되었고, 며느리 權阿只連은 충주에서 1801년 8월 순교하였다. 권상익은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이기연은 12월 충주에서 순교하였다(여진천, <권철신 · 권일신 후손들의 천주신앙>,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3, 234~237쪽).

 

8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49쪽.

82)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99~101, 106~107쪽 참조.

 

83) 그는 “신해년(1791) 이래로 문을 닫아걸고 허물을 자책했습니다. 또 시골구석에 처박혀 지낸 6년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 황사영, <백서> 12행.

 

84) 罪人權哲身 卽日身之兄 而與其弟欽崇邪書 酷信三魂四行之說 及夫日身罪斃之後 迷不知變 致使楊根一境 愚惑訛誤 寔繁其徒(《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6일 임신) ; 달레, 앞의 책, 440쪽.

 

85)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4~136쪽.

 

86) 以窩窟之世所共知者 言搢紳則有李家煥 近畿則有權哲身丁若鍾輩(《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25일 임오) ; 洋敎中表著者 在士夫則矣身及哲身若鍾輩(《邪學罪人 嗣永等推案》,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 공초).

 

87) 湖中之李存昌 陽根之權哲身 京中之崔必恭爲之云(《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4일 이가환 공초).

 

88) 정덕의 세 등급 중 가장 아래 등급은 부부의 정숙함, 중간 등급은 홀아비와 과부의 정조, 으뜸 등급은 동정이라고 하였다(판토하, 박완식 · 김진소 역, 《칠극》, 전주대출판부, 1996, 252~253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394, 441쪽.

 

89) 罪人黃日光 學習邪書於李存昌 移接若鍾隔隣 受洗受號 號以深淵(《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2월 26일 무진 ; 황일광은 “자기에게는 자기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그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하였다(달레, 앞의 책, 474쪽).

 

90) 邪書出自承薰 而若鍾樂敏輩 相與之爛漫討論 有何傳襲之可言乎(《邪學罪人 嗣永等推案》, 1801년 10월 11일 황사영 공초) ; 《역주 사학징의》 1, 162, 170, 190, 199, 203, 215, 222, 230, 235쪽 ; 《辛酉邪獄 罪人 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2월 12일 임대인 공초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2월 26일 무진.

 

91) 丁書房敎誘 矣身先學十戒七克 而被捉臟物…矣兄日光往接于廣州分院若鍾家行廊 矣漢彬爲名漢亦爲來留其行廊 而始學十戒於若鍾處是白遣(《邪學懲義》 권2, <作配罪人秩>, 任大仁, 黃次乭).

 

92)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397쪽 ;  - -,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08쪽.

93)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공초, 2월 12일 정약종 공초.

94) 황사영, <백서> 36~38행.

 

95) 김유산의 1801년 4월 26일자 진술에 언급된 중국 천주당 신부에게 보내는 서찰을 쓴 서울에 사는 丁生員은 정약종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 사학징의》 1, 102쪽 각주 79).

 

96) 1801년 당시 형조에 압수되어 소각된 천주교 서적은 모두 120종 117권 199책이었는데, 한글로 씌어진 책은 83종 111권 128책이었다(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91~95쪽).

 

97) 정약종이 엮은 우리말 최초의 한글 교리서로 상 · 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밝히면서 이단을 배척하는 일종의 호교서이고, 하권은 천주의 강생과 구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조한건, <정약종의 《쥬교요지》에 미친 서학서의 영향>, 서강대 석사 학위논문, 2006).

 

98) 황사영, <백서> 36~38행.

99)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03쪽.

100)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교서, 《믿음의 문》 7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9쪽.

 

101) St.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1860), vol. 4, M.E.P, pp. 26~27(《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7쪽) ; 달레, 앞의 책, 320~321쪽.

 

102) 당시 페스트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다블뤼는 la peste(중국에서는 Jo ping이라고 하는), 달레도 페스트(중국에서 Io ping이라고 불리는 티푸스의 일종)라고 하였다. 리델이 엮은 《한불자전》에 peste는 염병(染病)이라고 하였다.

 

103) 최선혜,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 이벽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207~226쪽 ; 여진천, <조선후기의 효 사상과 천주교 신앙과의 연관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258~263쪽 ; 곽승룡 신부는 그의 침묵을 심리적 · 상징적 · 사목적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침묵(마르 15, 2-5)과 연관되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곽승룡, <한국천주교 창설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129~143쪽).

 

104) 심상태, <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291~293쪽.

 

105) 亦欲打破其窩窟而偃然 以敎主自處 不畏典章 不避指目 反以爲榮者 自有其人 卽權日身是也(이만채, 앞의 책, <睦進士仁圭 與發通諸儒書>) ; 前都正睦萬中所製通文 及進士睦仁圭 抵書士林 以斥其自作敎主之罪焉 日身(이만채, 앞의 책, <洪樂安問啓>) ; 館學儒生宋道鼎等上疏曰 李承薰之貿冊 乃其作俑之凶 權日身之敎主 卽護法之賊也(《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6일 정축).

 

106) 矣弟當初四五年沈溺之 故浮謗無以得免是白乎 矣第有可證者他邪學者 廢祀而 矣身家則 不廢祀(《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107) 大抵日身之自入秋曹 願被同罪者 大是的贓明驗 其爲妖學之窩主 可以知之 雖於乙巳之後 渠若悔悟自責 復歸正學 則一世之指目 豈至於此乎(《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108) 其敎主之稱 歸之於浮言之科 極口發明 獨於耶蘇 終不斥言其邪妄 嚴訊之下 一辭如前 可見其沈溺迷惑 雖於施威之下 始於邪學二字 遲晩 至於敎主書冊兩段事 不可以其發明 有所準信 請更加嚴刑 期於取服(《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09) 仍命權日身崔必恭等處 曉諭義理 使之自新(《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1일 임오) ; 班之魁日身 中之魁必恭 若痛自尤悔 歸於正學 則其徒不過遇風之鴻毛(《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 移配權日身於湖西 使開誘爲邪學者 日身於獄中 作悔悟書 刑曹以啓 上意其眞箇革心 使之移配於有邪學地方 欲其立跡自?(《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6일 정해) ; 日身始抵死不屈 擬配濟州 旣上論之誨之 日身自獄中作悔悟文上之 流配禮山 出獄未幾而死(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녹암권철신 묘지명>).

 

110) 矣身沈惑異端 不知末流之弊 終至於滅倫亂常 有甚於夷狄禽獸 將使家敗身亡 不免凶禍 矣身之罪百死難贖 而至今假息 國恩罔極 粉骨碎身 無以報答 惟有改悔前非 以副愛欲生之至意 人其人之聖念 八?老母 奄奄號絶 兄弟無辜 竝被?? 矣身於此 眞是得罪於五倫 忽忽念此 不覺叩心而泣血 日前口招 矣身旣以耶蘇之學 妖邪不正…(《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6일 정해).

 

111)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8~146쪽.

112) 《가톨릭교회 교리서》 1787, 1903항.

113) 심상태,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453쪽.

114) 조광, <사료를 통한 권철신 ·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논평, 161~162쪽.

115) 畿縣之日身 湖西之存昌 年前刑獄 渠皆自服 而 出獄門 又復如前(《정조실록》 권43, 정조 19년 7월 24일 계유).

 

116) 近年以來 邪學日益熾盛 所謂權日身之類 今雖已斃 而其隣里鄕黨之間 漸染猶復如前 至於湖南亦不無煽動之慮云(《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5일 임술).

 

117) 日身未及發配而徑斃 未知眞箇感化與否 可惜(이만채, 《벽위편》 권3, <刑曹啓目權日身刑招>).

118) 달레, 앞의 책, 360쪽.

119)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120) 《推鞫日記》, 1801년 2월 18일, 19일 권철신 공초.

 

121) 問曰 李中培被囚於畿營 納供以爲 往見邪學人權哲身云爾 則矣身之到今發明 豈成說乎 供曰 村中過婚家 衆人齊會時 李中培亦來過 而仍訪矣身家而已(《推鞫日記》, 1801년 2월 19일 권철신 공초) ; 供曰 李中培以痘醫 來留村中 伊時矣孫之痘 一二次尋見矣(《推鞫日記》, 1801년 2월 18일 권철신 공초).

 

122) 달레, 앞의 책, 490~491쪽.

123) 《辛酉邪學罪人 嗣永等推案》,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 공초.

124)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47~152쪽 참조.

125) 서종태, <이벽 · 이승훈 · 권철신의 순교여부에 대한 검토>, 68~71쪽.

126) 황사영, <백서> 52행.

 

127) St.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1859-1860), vol. 4, M.E.P, pp. 108~109(《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8~319쪽) ; 달레, 앞의 책, 440쪽.

 

128) 조광, <사료를 통한 권철신 ·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논평, 162~163쪽.

129) 李家煥李承薰丁若鏞之罪 可勝誅哉…承薰 則傳其父所購之妖書 甘心護法 作爲家計(《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9일 을묘).

 

130) 矣身乙巳後 雖未斷意斥絶 辛亥後則 果永斷(《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4일 이승훈 공초) ; 원재연은 매우 중대한 害敎행위이자 비난받아야 마땅한 적극적인 배교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심리적 변화을 일으킨 요인은 첫째, 예산 유배(1795년 7월 하순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그전까지 맛볼 수 없었던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이 있었고, 둘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신자들을 억압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한 정약용과의 교류, 즉 두 사람도 처음에는 갈등을 느꼈을 것이나, 차츰 교회를 탄압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들의 양심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천주교 신앙을 완전히 지워버렸을 것이라고 하였다(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65, 67~68쪽).

 

131)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132)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77~78쪽.

 

133) 李承薰 則當初購來邪書 傳布一世 人心之陷溺 世道之訛誤 苟求其源 莫非渠所作俑 以現捉於文書者言之 神父等說 做作名號 仰之如神者 謂之神父 可代神 父則謂之代父 至與洋人 爛漫往復究厥情跡 至凶至 此亦宜用一律(《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5일 신미).

 

134) 황사영, <백서> 17, 45~46행.

135) 달레, 앞의 책, 448~449쪽.

136)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84~85쪽.

137) 《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38) 至於敎主則 矣身粗解文字 故別無師授 而窩窟徒黨則杜門獨處 故別無可告之人矣…西洋及中原皆有神父 而此地方別無之矣(《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39) 이기경의 《闢衛編》에 작은 細字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窮凶之言云者 搜探文書中 渠之日記有曰 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 十二字 伊時諸臣兩司諸臺請對 施以不待時之律 以不忍筆諸文字之意 漏於公私文蹟. 이기경, 《闢衛編》, 313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11쪽, 각주 105) 재인용.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다. 즉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 35-36).

 

140) 선교사들이 천주를 천지의 大君 · 大父로 소개하고 천주에 대한 공경이 충 · 효를 포함하는 더 근원적인 윤리라고 설명한 것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사회 운영에 대한 큰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천주라는 존재 앞에 군신, 부자는 평등한 존재가 되고 세도 실현은 천주 공경으로 귀속하기 때문이었다. 천주를 대군, 대부로 인정하여 충효를 포괄하는 새로운 가치로 설정하고 이를 신앙의 근거로 삼는 일은 조선 입교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계와 소통 · 대립 양상>, 167~168쪽).

 

14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28~129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11~416쪽 ; 罪人丁若鍾文書日記中 有向父罔測之說 向國不道之說 參鞫時原任大臣金吾堂上 相率請對以爲 若鍾 斷不可晷刻容貸 今旣輸款 當用不待時之律矣(《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12일 무신) ; 권엄 등 63인 상소문 중에 “乃有今番窮凶極惡絶悖不道之言 至發於文書 此誠前古所無之變怪也”라고 하였다(《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18일 갑자).

 

142) 丁若鍾則不但爲邪術之魁 鞫庭嚴問之下 一味頑悍之死 靡悔妖?獰慝 振古所無 而於渠猶屬餘事以渠梟心?腸 至向君親 肆發凶言 臣等憤?之? 已悉於日前請對 而此賊不可但用妖言惑衆之律 當以犯上不道 結案正法(《승정원일기》 97책, 순조 원년 2월 25일) ; ‘天主大君也 大父也 不知事天 生不如死’ 祭祖先拜墳墓 皆謂以 罪過 甚至於謂父爲大仇 向君上 亦作罔測之說 滅倫敗常莫此爲甚 以犯上不道 捧遲晩正法(《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6일 임신).

 

143) 問曰···又向矣身之父 忍爲罔測之說 至於向國家 肆發不道之言 尤萬萬至凶 絶悖 苟有一分秉彛 豈忍崩於心而筆諸書乎 供曰 矣身自知罪 今始追悔矣 問曰 矣身當初何忍爲此等凶言乎 供曰萬死無惜矣(《辛酉邪獄 罪人李家煥等推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44) 황사영, <백서> 39~40행.

 

145)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321쪽.

 

146) 조광, <정약종 가족의 천주교 신앙 실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3, 249~276쪽. 정철상은 1801년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고,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되어 있으며, 유 세실리아, 정하상과 정정혜는 103위 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147) 靑松罪人崔奉漢 從遊於若鍾 師受於文謨 收拾邪贓 暗自踰嶺 轉入深峽 誘集流民 自爲敎主 而押囚營獄之後 旋卽致斃(《순조실록》 권18, 순조 15년 6월 18일 임신).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여진천(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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