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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1세기의 사회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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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회교리
1. 시작하면서
인류가 살아내야 할 21세기의 시대정신과 삶의 양태가 어떤 모습일지는 열려있는 도전이다. 교회는 인류와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해 왔던 “인간 문제에 대한 전문가인 교회”(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13항)는 앞으로도 계속 인류의 조언자요 스승이고, 어머니이며 동반자로 그 삶과 운명을 함께 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신의 소명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을 인간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14항 참고).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3천년기의 첫 세기이지만, 제2천년기의 마지막 두 세기와 더욱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계몽주의라는 거대한 전환점이 있었던 17세기 이후, 인류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모든 반경에서 그 이전과 전혀 다른 면모를 띠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시민사회의 형성과 그에 따른 정치체제의 다양화, 자본중심 혹은 사회중심의 경제이론과 체제의 등장, 세계대전과 국지전의 빈번한 발발과 군비경쟁, 교통과 통신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좁아진 세계의 거리, 지구를 넘어선 새로운 공간의 탐구, 삶의 모든 영역을 관장하는 기술문화가 가져온 효과와 도전들, 인류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가치와 윤리적 잣대들에 대한 재평가, 미래에 대한 이상의 다양성, 마지막으로 다양한 인간관의 상대화는 21세기를 시작하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공감하여야 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이 엄청난 인류의 유산을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유산을 일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시대적 원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21세기의 방향등으로 켜고 있는가? 어떤 설렘과 희망으로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대하여 가졌던 관심과 21세기를 살면서 언표한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본 소고는 이 가르침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8회 동안의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2. 21세기를 위한 화두 한 가지 - 자유
21세기는 다원화가 계속될 것이다. 다원화는 가치의 상대화를 유발하고, 가치의 상대화는 그릇된 인간 개인의 존엄성 주장과 더불어 인류를 분열시키고 파괴할 수 있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은 한 가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쓰느냐이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2016년 7월 3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3. 21세기를 위한 정치
현존하는 모든 국가는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표명한다. 민주주의라는 표현 속에는 국민 스스로가 주권자가 되어 모든 의사결정을 하고, 결정에 따라 합의된 행동을 한다는 전제가 함의로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각 국가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상황과 감수성을 고려하여 정하는 열려있는 공간이다.
21세기가 시작된 최근 10여 년 동안 교도권은 정치의 반경에서 두 가지 성찰 주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진리”와 “자유”이다. 이미 1991년에 발표된 회칙 “백주년”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정치가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는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인식의 오류가 있으며, 이런 경우 자유라는 이름으로 주장하는 개인과 공동체(가정, 사회, 국가 등)의 권리의 사용이 무분별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13항 참조). 자유가 참된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인간에 대한 진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종교가 근대이전까지 했던 국가의 정치를 이끌어 나갔던 인간에 대한 사고와 성찰은 사실 지난 세기부터는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다양한 이념체계의 출현으로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볼 수 있던 유럽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아시아 대륙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적인 인간관과 그리고 18세기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빛으로 등장한 천주교의 인간관이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인 양심 안에서 적어도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영원한 진리”라고 여겨지던, 비록 모호하고 애매하여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의 심성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이상적인 확신들은 유물론적 시장 자본주의에 의해 상대적 가치로 여겨진 지 오래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단락을 발견한다. 첫째는 “나는 진리이다.”(14,6)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자기 인식이다.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고,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척도이시며,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수렴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기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리는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시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의 태도이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답변에 견디지 못한 그는 내뱉듯이 한마디를 하고 그 자리를 모면한다. 길고 지루한 진리에 대한 논쟁 끝에 그는 “진리가 무엇인가?”(18,38-40)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에피소드는 정치가 인간에 대한 진리를 보장하고 담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인간관을 가지고 행하는 정치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의 표현인 자유를 지향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이런 인식 속에서 21세기에는 “새로운 인본주의의 종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진리 안의 사랑, 21항)하다고 지적하시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치 분야에서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 우리의 인간적 양심에 대한 진리도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것”(34항), 이를 근거로 하여 “경제, 사회, 정치적 발전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되려면 형제애의 표현으로서 무상성의 원칙”(같은 항)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신다. 즉, 정치의 의무는 세계화라는 경제우선의 세계 질서를 인본주의와 형제애라는 가치로 재편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직을 맡으신 직후부터 일관되게 21세기의 시대상의 단면을 “낭비의 문화, culture of waste”라고 지적하시면서(참고 2013년 6월 5일 일반 알현, 2016년 1월 11일 외교사절과의 만남), 약한 이가 강한 이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맞고 있는 도전은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형제애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정치는 사랑과 애덕의 최고 표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정치는 경제가 가장 우선이 되어 있는 유물론적 논리를 극복하고, 인간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고, 그 영원한 진리에 수긍함으로 양심과 영이 자유로워지는 가운데, 숭고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도록 국민과 세계인을 이끌어 가는 영역으로 거듭나야 한다. 유일하고 존엄한 인간과 인간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면서. [2016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4. 21세기의 가정과 결혼을 위하여
천주교 사회교리는 전통적으로 결혼 · 가정 · 출산 · 생명 · 자녀 - 노인 문제를 하나의 연계선상에서 이해해왔다. 사실 이런 이해 방식은 당연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어디에다 강조점을 두는지에 따라 가르침의 색채가 조금 달랐다.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사안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리고 상황이 요구하는 새로운 제안들을 이해하고 수렴하면서 그 시대에 필요한 가르침을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발표하신 마지막 회칙 “인간 생명 Humanae vitae”(1968년 7월 25일)은 출산의 문제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정의한 “결혼” 문제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헌은 가정은 거룩한 결혼 소명을 통해 부부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인식하면서 부부의 가장 숭고한 권리이며 의무인 출산문제를 통해서 생명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보고 있다. 부부의 사랑은 두 사람만의 유일하고, 출산을 위한 것으로, 출산을 사랑의 결과로 가르친다. 그러기에 사랑을 전제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와 출산을 방해하는 모든 요인을 거부한다. 당연히 이 회칙은 교회 내외로 엄청난 찬성과 반대의 논의를 일으켰지만, 이에 대한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변화가 없다. 대신 복자 교황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양심적인 판단들에 대한 연구를 연구하도록 명하셨다. 이 문헌은 복음이 직접 언급한 사안이 아니라 자연법과 자연적 이성이라는 인간들이 공유한 문제이며, 사회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출산에 관한 논의를 교회의 반경에서 하도록 초대한 예언자적 문헌인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5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생명과 관련된 문제들을 통합적이고 세부적으로 언급하신 새 회칙 “생명의 복음 Evangelium vitae”를 발표하셨다. 이 문헌은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의 “인간 생명”에서 시작하였던 생명과 부부, 가정과 출산 그리고 자녀에 대한 문제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심화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는 “문화의 위기”가 세상에 팽배하고 있는데, 그 근본에는 영적이고 이성적이며 양심적인 지식과 윤리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사회적 삶이 빈곤, 폭력,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식별한다(11항). 그리고 이런 도덕적 불확신이 가져온 생명에 대한 도전들, “생명에 대한 음모들”을 열거한다. 피임과 낙태(12-13항), 인공생식기술과 태아 실험(14항),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에 대한 안락사(15항) 등 생명에 대한 위협과 공격이 상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사형에 대한 유혹도 언급하고 있다.
성인 교황께서는 이러한 유혹의 근저에는 개인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생명에 대한 인식과 함께 강자가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인권비보호와 연대성의 거부가 있음을 경고한다. 이런 비참한 상황을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사이의 투쟁”(21항)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상황에서 결혼과 가정이 우선적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오늘날 생명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들을 수립하는 데에 중요한 한 부문은 인구성장문제입니다. 국민의 인구 조절 방향을 주도하는 것이 공권력의 의무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언제나 부부와 가정의 우선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의무를 고려하고 존중하여야 합니다.”(90항) 개인과 가정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떠한 공동체적 인격체, 예를 들어 사회와 국가와 같은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교도권은 성경과 자연법, 인간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여 가정과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2016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개인적으로 가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간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20세기 사회교리는 인간을 “통합적인 존재”(intergral existence)라고 정의하는데, 이에 대해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분명한 전통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선출된 두 번째 교황님이 말씀하시고 행보하시는 것을 듣고 보면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과 자비로운 이해가 지극히 예리하셔서, 하느님 백성을 대하시는 외적활동이 가끔 파격적이지만 그분께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기에 그분이 가진 인간에 대한 관점과 확신은 늘 묵상과 성찰거리가 된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어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점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로망일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버지의 날로 지내는 성 요셉 대축일에 교황님께서 시노드의 후속 문헌이며 자비의 특별 희년의 선물로 세상에 내놓으신 사도적 권고인 “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2016년 3월 19일)는 결혼에 대한 교황님의 연민의 가르침이며 사목적 수상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단죄와 판단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동반함 그리고 참여와 함께함의 색채가 확연하다. 이 문헌을 통해 교황님께서는 21세기에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인류가 사랑이라는 놀라운 힘을 통해, 결혼문제만이 아니라 가정, 생명에 대한 영감을 받기를 바라신다. 또한, 인간 삶의 개인적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영역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기를 바라신다.
제임스 마틴 신부가 요약한 이 문헌의 열 가지 핵심적 가르침을 소개한다. 1) 개인과 가정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전체성으로 이해할 것이지 획일화된 논리적 척도나 도덕적 규율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 것; 2) 양심은 도덕적 결정을 위한 기반이며, 이 양심은 요즘 시대가 주장하듯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늘 가르침과 성찰을 통해 영원한 도덕률로 나아가야 함; 3) 이혼자와 재혼자들이 교회 안에서 보다 더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목자들과 이들과의 내적인 대화와 관계가 중요하며, 이들이 교회의 일부임을 느끼도록 해야 함; 4)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늘 격려를 받아야 하며, 특히 사랑의 생활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도록 하며, 이 역동적인 사랑의 행보가 결혼이어야 함; 5) 사람들이 “죄” 속에 살고 있다는 차원으로만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 속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단죄가 아니라 가능성을 놓고, 즉 희망을 놓고 사람을 바라볼 것; 6) 모든 국가와 지역은 고유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토속적인 필요성을 존중하면서 발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부유하고 강한 한 지역이나 국가가 다른 약한 지역이나 국가에 자신의 것을 강요하여 대체해서는 안 됨; 7) 결혼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히 변화가 없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사는 이들에게 실천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초대하는 자비가 중요; 8) 자녀교육은 각 성(性)에 맞게 성성(性性)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문화가 건강해야 함; 9) 동성애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부당한 차별이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됨; 10) 교회는 모든 이를 환대해야 하며, 모든 이가 다 불완전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늘 격려하여 “사랑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해야 함.
21세기의 가정과 결혼… 당사자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 늘 희망이고 기쁨이면서 두려움이고 복잡함이지만, 복음적이고 건강한 사랑이 있다면 늘 하느님의 선물일 것이다. [2016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3면, 정연혁 베드로니오 신부(광남동본당 주임)]
5. 환경
2007년 4월에 “환경 변화와 발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교황청 정의 평화 위원회에서 주재하는 국제 세미나가 있었다. 이 세미나에는 80여 나라에서 온 정치가와 학자들 그리고 글로벌 기업의 관계자들이 모였는데, 여기서 논의된 문제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의 환경문제를 전부 열거한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지구의 온난화, 이산화탄소의 무분별한 방출, 온실효과, 숲의 열대화, 에너지의 남용과 무분별한 생산, 정치가들의 책임 등이 주제였다. 이 세미나를 주재하기 위해 UN, 유럽연합과 힘겹게 협상을 한 교황청은, 한순간에 환경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의 전통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때임을 양심적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하겠다. 교회의 예언직은 이처럼 교회 안의 신자들만이 아니라 지구촌에 산재한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운명의 책임”(복자 바오로 6세 교황, 80주년 21항)인 환경보호는 21세기의 교황님들에게서 더욱 절실하게 예언자적 호소로 표현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의 노력에 대해 한 가지만 소개하면, 2010년 평화의 날 주제를 “평화를 성장시키려면 피조물을 보호하라.”라고 정하신 것이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환경보호에는 “피조물, 선물, 부르심”이라는 세 단어가 항상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6. 미래를 위한 약속 0 3,60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