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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가를 부른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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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가를 부른 사람들 나는 자신을 소개할 때 단점부터 말하는 습성이 있다. 장점은 차후 발견하면 숨겨놓은 유머 같은 역할을 하지만 단점이 점차 드러나게 되면 마치 속인 것 같은 느낌을 줄까봐서이다. 1991년 관덕정 성지의 일을 시작하면서 당시 대주교님께 소개되었을 때 나는 첫 마디에, “저는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고 집안에 목사가 두 명이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대주교님께서는 “김 선생님은 찬송가 잘 부르겠네요.”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 짓는 큰 특징의 하나가 바로 성가를 부르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100년이나 앞서 들어온 가톨릭이 어찌하여 개신교보다 음악 보급이 늦은지를 질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음악전통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물론 이 천주가사가 과연 노래로 불렸겠느냐는 논란이 있는데, 가사의 특성상 노래로 불리었다고 볼 수 있겠다. 순교자 이중배는 1800년 부활절에 개를 잡고 술을 빚어 동리 교우들과 길가에 앉아서 큰 소리로 희락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다시 노래 부르기를 해가 저물도록 계속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부활절에 불릴 만큼 교리와 관련이 있었을 테고 혹시 천주가사일지도 모른다. 최양업 신부는 1858년 10월 3일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약 30프랑짜리 서양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 견고하고 소리가 잘 나는 것으로 하나 보내 주십시오. 대금은 주교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로 미루어 그가 천주가사를 작사했을 뿐 아니라 여기에 곡을 부쳐 작곡했을 가능성도 짐작할 수 있다. 천주가사는 1930년 박제원의 ‘소경자탄가’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지만 성당에서 대중이 성가를 부르게 되면서 교회행사에서 물러가게 되었다. 어쩌면 오늘날 연도가 천주가사의 곡조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구에서는 1913년에 이미 성직자나 신학생이 아닌 이들이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축제 때 수녀들이 가르친 여학생 성가대가 악대의 곡조와 번갈아서 성가를 불렀다. 1930년대가 되면 지방 성당에서도 성가대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노래했다. 이때 외인들이 성가대에 선 일도 있다. 1931년 드망즈 주교는 경주성당을 강복했다. 이 미사에서 노래를 썩 잘 부른 소녀합창단은 단원 5명만이 신자였고 나머지는 외인이었다. 이들은 영세와 견진 준비까지 했으나 결혼문제로 부모들이 반대해 영세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계산성당에는 ‘명치정성당 성가대’가 구성되었는데, 비음악전공자 청년들이었다. 나중에 남녀혼성 합창단이 되었지만 남녀가 한 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하여 남자는 윗층, 여자는 아래층에서 노래를 부르고 지휘자는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위로 하여 지휘했다는 일화가 회자된다. 이들이 발전적 해체를 거듭하면서 ‘대구 계산동 가톨릭합창단’ 등으로 이어졌다. 전례음악을 듣고 자라서 현대음악을 전공하여 노래를 부른 음악인이 있다. 경주 성동성당 옛 주소는 경주읍 성동리 403번지인데 박말순의 본적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1938년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영수는 선필공소 회장이었으나, 경주공소가 지탱이 안 되어 닫을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자원해서 경주공소로 옮겼다. 박말순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1926년 공소는 성당으로 승격되었고, 그곳에는 귀도(근화)유치원, 근화중학교 등이 세워져 그는 자연스레 성당에서 자란 아이가 되었다. 이때는 젊은이들이 부활절 등 큰 축일을 위해 석달 전부터 성가연습을 했다. 초등학생인 박말순은 언니를 따라가서 피아노를 만지다가 야단맞고 난 뒤 피아노를 전공하리라 마음먹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성가대로 활동했다. 박말순이 한창 배울 무렵, 6.25로 인해 전문 음악인들이 이 지역으로 피난을 와서 고2 때는 석종환 선생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그는 경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한 학기만 마치고 내려왔다. 하대응은 1954년 효성여대에 부임했는데, 박말순은 1960년 이곳 음악과로 편입해 그에게 사사받았다. 대구·경북지역 최초 음악전문교육기관인 효대 음악과는 1952년에 신설되었는데, 당시 이 학교 강당이 대구의 유명한 음악당이었고, 효대 연주회는 제일 큰 연주회였다. 박말순은 1964년부터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1973년 대구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오페라 ‘토스카’의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이를 계기로 영남대에 전임발령을 받았다. 재직 중 잘츠부르크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박말순은 자신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모두 환경적으로 받았다고 하며, 이 받은 것을 갚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성김대건성당이 건립되면서 그 성당의 신자로 성악가가 네 명이나 있게 되었다. 박말순은 성악가들에게 모이자고 깃대를 들었고 이후 다른 이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1991년 대건앙상블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본래 성김대건성당에서 시작된 터였고, 노래를 통해서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처럼 복음을 선포하자는 취지였다. 성가대가 없는 성당이나 시골 공소를 찾아 음악을 통해 소외된 이들을 돕고자 했다. 때마침 이윤일 요한 성인이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선포되고 관덕정에는 윤일제가 시작되어 이들은 관덕정 윤일제와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전례도 맡았다. 또 한티, 가톨릭 피부과 병원, 교도소, 공소 등을 찾아 공연했다. 그러나 대건앙상블은 관덕정 소속 중창단이 아니었고, 여러 곳에 연주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 관덕정 미사를 위한 성음앙상블이 조직되었다. 대건앙상블은 2004년 영천성당 북안공소 축성미사 성가 봉사를 끝으로 휴면에 들어갔다. 활동 멤버는 박말순, 강대식, 백용진, 강희주 등 십여 명이었다. 어느 관상수녀원에서 노래를 못 불러 퇴회한 청원자가 있다. 그 수녀원은 노래로 기도를 드리는데 이 청원자는 음이 자꾸 틀렸고, 조심하기 시작하자 더욱 틀렸다. 급기야는 병이 나서 결국 나가게 되었다. 이는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가톨릭은 일반신자가 부르는 음악과 전례음악이 크게 구분되어 왔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이 다 함께 성가를 부르는 오늘날에도 가톨릭 전례음악의 청순함과 장엄함, 영혼을 울리는 소리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 둘을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일은 가톨릭음악이 안고 있는 숙제이다. 이는 음악이란 전문영역을 김대건 신부가 소집한 봉사자에게만 의지할 수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도움 : 박말순, 조광 「순교의 노래」, <경향잡지>)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7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0 2,58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