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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복 대상자 약전: 오이근 에우제니오 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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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대상자 약전] 오이근 에우제니오 수사
덕원 수도원,
1885년 9월 17일 생, 독일 뮌헨 대교구 출신
1929년 봄, 오 에우제니오 수사는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의 지시를 받고 독일로 돌아가 머물면서 덕원 수도원 성당 건축 기금을 모금했다. 장상이 선교활동 홍보사업을 맡길만큼 그의 언변은 뛰어났다. 1930년 10월 30일, 에우제니오 수사는 새로 선교파견된 수사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연길 지목구 돈화 본당에 파견되었다가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1931년 6월, 그는 청진 본당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또다른 재능이 빛을 발했다. 청진 본당 주임인 마르코 바인거(Markus Bainger, 方仁建, 1891-1945)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목수일을 하며 제의방과 사랑채를 지었다. 그는 건축분야에도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그는 건축일을 도우러 여러 본당으로 파견되었다. 1932년에는 영흥으로 가서 언덕을 깎아 새 성당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했으며, 고산에서는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수녀들이 첫분원으로 쓸 작은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1933년에는 북간도로 영역을 넓혀 용정 본당에 가서 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 사이에 덕원 수도원에 새로운 포도밭을 일구고 미사주의 생산량 증가와 품질 향상에도 힘썼다. 1939년 8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그가 더 이상 일을 못하므로 젊은 포도 재배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가 한국에 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946년까지 그는 수도원 포도밭에서 미사주를 생산하여 한국 전역에 공급했다.
- 청진 성당 봉헌식(1931년, 청진)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탄압으로 질식할 것 같은 시절을 보내고 해방을 맞이했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6년 3월, 토지개혁으로 수도원 포도밭은 사라졌고 포도 압착장도 가동이 멈추었다. 그러다가 1948년, 국영 조합의 위탁으로 다시 가동되었으나 포도주 생산은 수도원에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빌미가 되었다. 다고베르트 엥크(Dagobert Enk, 嚴光豪, 1907-1950) 당가 신부가 1948년 12월 1일, 밀주 제조 혐의로 체포되어 원산 내무서로 압송되었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폐쇄되었다. 그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체포된 후 평양 교화소로 압송되었다가 자강도 전천군에 있는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64세의 고령인 그는 강제수용소의 고된 노동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동체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싶었는지, 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에서 사금을 찾는다며 사금 채취용 체를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장 질환이 급속히 악화되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그가 임종하기 이틀 전, 수용소에 함께 수감된 원산 수녀원 수녀들이 그가 누워 있는 방 앞에서 성모성가를 불러 잠시나마 그를 기쁘게 했다. 1949년 9월 14일, 성 십자가 축일에 그는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겼고 이틀 뒤 먼저 세상을 떠난 수도형제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0 2,76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