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강론자료

사순 5 주간 금요일.....20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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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4-07 ㅣ No.704

 

사순 5 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2006. 4. 7. 무악재

주제 : 하느님은 나의 보호자

세상에 사는 사람이 삶에서 확실하게 믿을만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또 한 가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와 같이 길을 가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지 않지요?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아이라고 하더라도 혼자 놀다가 넘어지면 울지도 않고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고  내가 믿고 마음대로 응석을 부려도 좋을 만한 대상이 있는지를 살피고 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이 미사에 와 있는 우리들도 아마 다들 그렇게 어린시기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만큼 내가 마음대로 의지할 수 있는 후원자가 있다면 삶의 행복은 반쯤 완성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대상이 우리의 인생에서 항상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마고르 미싸빕=공포,두려움(새번역의 의미)=사면초가(공동번역)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내 삶의 후원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이 시간에 사용하지만, 우리가 삶의 후원자를 누구로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마음의 자세라는 것이 말 몇마디 한다고 금방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현실 삶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무슨 힘으로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뜻을 계속 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뒷짐지고 가만히 계신듯하고, 사람들은 온통 나를 몰아세울 듯이 덤비기만 하고.....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차라리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과감하게 소리쳤던 욥의 부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우리가 그렇게 충분히 살아온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대했던 것과 같은 모습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대하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는 예수님이 올바른 일을 하셨다는 생각을 갖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마치도 세상일의 잘못된 모든 원인이 신앙인에게 있거나 하느님에게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을 탓하면서 자신은 편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이론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나와 더불어 살아야 할 다른 사람을 내가 사는 세상에서 없애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은 외로움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람은 공동체로 살아야하는 존재이기에 외로움과 고립감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잠시 우리는 어떤 모습을 향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살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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