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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한 선교사의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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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7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한 선교사의 행방불명

 

 

1839년 9월 21일 서울의 새남터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주교와 함께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의 칼날을 받았다. 그날로부터 꼭 111년 하고 하루가 지난 뒤 충청도 서산에서 대전에 이르는 어느 길가에서도 같은 순교가 재현되고 있었다. 콜랭(J. Colin, 고 요한, 高一郞) 신부의 죽음이었다. 1950년 9월 21일경 충청도 서산에서 선교하던 프랑스인 선교사 콜랭 신부가 인민정권 당국에 체포되어, 다음날 대전으로 연행되어 가던 도중 행방불명되었다. 전쟁 통에 일어났던 그의 행방불명은 틀림없이 죽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한 소년의 기억

 

1950년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948년 이 좁은 한반도 안에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되었고 전쟁을 예감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여 나라가 온통 뒤숭숭했다.

 

그때는 서울에 살던 소시민들도 전쟁을 걱정하게 되었다. 1948년 10월 하순경, 당시 서울 후암동에 살던 한 소년의 집에서는 곧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가느다란 인연을 찾아 충청도 서산으로 어린 자식들을 내려보냈다. 그곳은 오늘날 서산 동문성당 앞에 있던 동네이다.

 

이때 서산으로 피신했던 소년은 동네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성당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다. 호기심에 달뜨던 그는 성당의 주임신부인 서양인을 만났다. 그뒤 성당 마당은 소년의 놀이터가 되었고, 비신자였던 소년이지만 사제관을 무상출입하게 되었다. 서양인 신부는 서울에서 내려온 소년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고, 이를 전해들은 소년의 집에서도 서양인 신부에게 감사의 예를 잊지 않았다.

 

1949년 여름이 되자 소년의 집에서는 이제 전쟁의 위험이 수그러들었다고 판단하고 소년을 올라오게 했다. 그러나 소년의 부모님과 서산성당의 그 선교사는 이후에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번은 그 선교사가 서울에 있던 소년의 집을 직접 찾아가 소년을 반갑게 안아주기도 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피부가 흰 선교사는 그렇게 소년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공 치하에서 서울에 머물던 소년의 가족들은 그 해 8월 뒤늦게 피난길을 떠나 서산으로 향했다. 서산에 도착해서 그 피난민들은 쉴 곳을 찾다가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소년은 본당신부를 보자 반가움에 뛰어갔지만, 본당신부는 소년을 밀쳐내고 그 식구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성당에서 내쫓아버렸다. 어른들은 당연히 그 본당신부의 문전축객(門前逐客)에 분노했다.

 

그러나 소년은 놀이터였던 성당과 그 선교사를 잊지 못했다. 서산에서 머물던 어느날 몰래 성당에 숨어들었다. 갑자기 소년 앞에 그 선교사가 우뚝 섰다. 선교사는 놀란 소년의 손을 잡고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나누었고, 얼마 있다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소년은 선교사와 나눈 대화의 내용은 잊었지만 그 눈물을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선교사의 돌변한 행동들에 대한 의문을 풀 재간이 없었다.

 

 

전쟁과 서산성당

 

한국전쟁 당시 서산성당은 충청도 지방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큰 성당이었다. 1917년에 창설된 이 성당에 제7대 신부로 콜랭 신부가 부임한 때는 1948년이었다. 서산성당의 1949년도 교세통계표에 신자수가 2,372명으로 나오고 있음을 보면, 전국에서도 큰 성당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콜랭 신부는 이곳에 주임으로 부임한 뒤 해방의 감격에 들뜬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로서 본당에 상주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키기로 결심했고 이를 실천했다.

 

인공 치하에서 대전교구는 남다른 수난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충청도가 인민군에게 지배되던 7월 중순 이후부터 감시와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8월에 접어들어서는 선교사를 체포하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콜랭 신부가 있던 서산성당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콜랭 신부도 그해 8월경부터 지방 인민정권으로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와 접촉하던 사람들도 또한 공산당국으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이때 서울에서 온 일단의 피난민들이 들이닥쳤다. 콜랭 신부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팡이를 휘둘러 쫓아내는 일밖에 없었다.

 

한편,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단행된 이후 인민군은 총퇴각을 결정하고 점령했던 지역에서 마지막 ‘정리’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콜랭 신부도 이 과정에서 체포당해 연행되던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때 충청도 지역에서는 모두 9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본당을 지키다가 인민정권 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들 중 7명은 대전을 포기하고 후퇴하던 좌익 세력들에 의해 9월 23일에서 26일 사이에 학살당했다.

 

 

남은 말

 

국군이 서산을 수복한 1950년 9월 하순경부터 신자들은 콜랭 신부의 행방을 찾아 헤맸으나, 그의 시신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콜랭 신부를 기리는 마음을 돌에 새겨 성당 마당에 세우는 일밖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없었다. 가난했던 시절 신자들이 세웠던 그 초라한 돌 비석은 지금도 서산 동문성당 입구 부근에 숨어있다.

 

그 소년은 후일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고, 역사를 공부했으며, 교회사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어느 날 그때의 소년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을 풀어보고자 했다. 역사를 뒤적여 자신을 쫓아냈던 선교사가 콜랭 신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의문을 서산의 현대사인 동문성당의 역사가 풀어주었다. 뒤늦게 그는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를 쫓아냈고, 그래서 내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었구나.” 하며 다시 콜랭 신부를 그리워했다.

 

1990년 서산 문화원에서는 서산에 소재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도했다. 그때의 소년이 이 일의 일부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사 사적의 하나로 그 초라한 ‘고일랑 신부 추모비’를 추가해서 자신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올해 9월은 그가 한국의 보드라운 대지 위에 자신의 몸을 뉘어 영원한 안식을 취한 지 53주기에 해당된다. 올해에도 그때의 소년은 어렸던 시절처럼 그를 그려본다. 나 또한 그 선교생활의 열매가 아닐까?

 

[경향잡지, 2003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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