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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무엇을 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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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7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무엇을 먹었나?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먹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에 먹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요소이다. 그래서인지 먹거리는 각 민족의 지리적 특성이나 문화전통과 특히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한 나라에서도 지방에 따라 독특한 음식이 있다. 자연환경은 먹거리를 제한하고, 먹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양식을 규정해 왔다.

 

그러므로 나라에 따라서 음식이 다르다는 사실은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음식은 그 민족이 형성한 독특한 문화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입맛은 어려서부터 이어온 신앙이나 특정 사상만큼 머리에 굳게 남는다.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 맛을 늙어 궂길 때까지 잊지 못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고대 로마의 속담 가운데 “입맛을 가지고 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각자의 입맛이나 취향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문화상대주의적 발상이었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 나라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도 과연 이와 같은 원칙을 알고 있었던가?

 

 

쌀의 문화와 선교사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맛들여 왔던 음식과는 다른 새로운 음식문화에 접해야 했다. 조선에 도착한 직후부터 그들은 새로운 음식문화에 직면했는데 그들의 식생활에 대한 기록들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우선 ‘쌀밥’을 먹고 지냈다. 베르뇌 주교(1814-1866년)나 칼레 신부(1833-1884년) 그리고 페롱 신부(1827-1903년)는 고국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들은 “하루 세 끼 쌀밥만 먹는다.”고 표현한 바 있다. 물론 19세기 중엽 조선사회에도 밀가루가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밀가루로 빵을 구워 먹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선교사가 밀가루로 빵을 구웠던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칼레 신부가 1867년 1월에 정리했던 베르뇌 주교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교님께서 혼자 계실 때에는 밥과 소금에 절인 야채 몇 가지만을 드셨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이 그분을 방문했을 때는 고기·생선 심지어 달걀 등과 같이 자신의 식탁에서는 매우 드문 것들이 나왔다. … 베르뇌 주교는 혼자 있을 때에는 일반적으로 결코 한 조각의 빵도 없었다. 조선에는 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을 방문하러 온 선교사들에게 주려고 아주 즐겁게 손수 밀가루를 반죽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갈 때는 그 빵을 선교사의 봇짐 안에 넣어주었다. 지방에 나가있는 동료들에게까지 보낼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씌어지던 19세기 중엽, 당시 우리 나라의 일반 서민들에게는 하루 세 끼 식사의 관행이 정착되어 있지 못했다. 또한, 당시 농민들의 주식이 쌀밥만은 아니었다. 박해시대 선교사들이 먹었던 하루 세 끼의 쌀밥은 당시 수준에서는 중류 이상에 속하던 조선인의 식생활이었다. 당시의 신도들은 선교사들에게 자신들보다는 좀더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던 것 같다. 신도들의 이러한 우정과 선교사의 소명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쌀의 문화’에 새롭게 적응해 가고 있었다.

 

 

밥상에 차려진 반찬

 

선교사들이 조선의 음식에 대해서 관찰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통 음식은 쌀밥과 고추와 몇 가지 야채이다.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은 거기에 고기 약간이나 자반을 곁들인다. … 서울이 아니면 쇠고기는 구하기가 힘들다. 양고기는 없고 그 대신 개고기가 있는데, 선교사들은 그 맛이 조금도 나쁘지 않다고 일치하여 말한다. 야채로 말하면, 무와 중국 배추와 질경이 잎과 고사리 외에 별로 없는데 고사리는 매우 많이 먹는다.”

 

박해시대 선교사들이 높게 평가했던 조선의 음식은 ‘맑은 고깃국’인데, 조선사람들은 이를 요리하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먹고 있는 조선의 독특한 부식으로 우선 김치를 들었다. 그들은 김치를 ‘배추나 무와 같은 채소를 절여서 고춧가루로 버무린 음식’으로 묘사하거나 단순히 ‘소금에 절인 야채’로 표현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필수 영양소 가운데 그들이 취했던 단백질은 쌀을 통해서 섭취했던 식물성 단백질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선교사들은 대체로 조선의 음식이 서양사람들의 위장에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아마도 주식인 쌀밥보다는 부식에 대한 언급이었던 듯하다. 그들은 육류를 포함한 영양가 높은 고급 조선음식에 실질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다양했던 음식문화를 서술하기보다는 서민들이 늘 먹는 수준의 음식을 조선음식의 전부로 인식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들은 부식문제를 해결하려고 ‘서양 미나리’의 씨앗을 가져와 파종하여 이를 먹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지난날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지역에서 그들이 파종했던 서양 미나리가 거의 야생 상태로 자라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우유나 치즈의 맛을 못내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음식에 적응하여 나갔고, 조선의 음식만 먹으면서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남은 말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개인 서신들을 통해 조선의 음식문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은 식생활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확연히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고국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일종의 ‘반찬투정’을 했을지언정 고국의 음식을 조선의 선교지에서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된 자신의 미각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함을 일찍부터 터득했기 때문이다.

 

미각에 대한 선교사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가톨릭 신앙은 조선민중들에게 새로운 깨우침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향수병(鄕愁病)과 같은 고국의 음식 맛을 스스로 포기했던 이들이었다. 이 포기와 비움을 통해서 그들은 새로운 신앙으로 이땅을 채우고자 했고, 우리의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경향잡지, 2003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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