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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근대음악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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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근대음악의 수용

 

 

근대음악의 수용

 

음악은 소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예술을 말한다. 시간이 흐르듯이 소리가 흐르며, 시간이 지나가듯이 소리도 지나간다. 그러나 음악은 일회적이요 한번 흘러가면 되풀이 될 수 없는 시간과는 다르다. 음악에는 색깔이 있다. 그 태어난 고향과 이를 만들어내고, 연주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뚜렷이 있다. 우리 나라에는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우리 음악이 있으며, 또 서양에서 전래된 음악도 있다.

 

우리에게 도입된 서양음악도 우리 음악의 한 부분을 이루어 우리의 인간성을 풍부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우리는 이 서양음악이 우리에게 도입되는 과정에서 천주교의 역할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서양음악 수용의 역사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흔히 서양적 요소를 근대성과 일치시켜 생각해 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서양화와 근대화는 같은 말이 아니다. 서양화는 근대화의 일부이며 한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음악의 성립에 관한 문제를 따져보는 경우에 흔히는 서양음악의 수용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수용의 계기가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르친 찬송가에 있다고 보는 설이 줄곧 제기되어 왔다.

 

개신교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1884년에 입국한 이후 신교육에 착수했다. 그들이 세운 배제학당의 교과목 가운데에는 1886년 ‘창가’라는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써 서양음악이 교육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1893년,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악보가 수록되지 아니한 가사집의 형태로 [찬양가]를 간행했다.

 

그러다가 가사와 악보를 수록한 [합동찬송가]가 1905년에서 1908년 사이에 간행되었다. 이로써 찬송가는 전통적 노래의 형식을 대신하여 자리잡아 갔고, 찬송가식 곡조는 근대음악 또는 신음악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찬송가의 수용은 개화기 이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음악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각종 창가들이 새로운 물결을 이루며 번져나갔다.

 

한편, 서양음악의 수용과 관련하여 서양식 군악대의 창설을 주목하기도 한다. 구한국에서 서양식 군악대는 1901년 2월 독일인 에케르트(Eckert, F., 1852-1916년)의 지도로 창설되었다. 에케르트는 작곡가인 동시에 오보에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는 독일 프러시아 왕국의 궁정악장을 역임하였고, 조선에 입국하기 직전 일본 해군 군악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던 조선의 군악대는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발표회를 자주 가졌고, 서양의 음악을 조선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는 조선인들에게 서양음악의 연주법을 가르쳤다. 조선인 군악병들이 서양음악의 연주자였다. 이로써 조선인들은 상대적으로 능동성을 가지고 서양음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서양음악을 수용하기 시작한 때는 이미 삼국시대 초기까지로 소급되어 올라간다. 고구려가 건국되던 당시 이미 공후라는 서역의 악기가 전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원나라를 통해서 고려인들이 서양음악에 접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양금과 같은 서양악기가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서양음악이 좀더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된 계기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에 서 간행한 서적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의 북경에 있던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음악을 직접 관찰하고 이를 조선에 소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덕무는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1795년)를 통해 서양음악의 기초이론을 단편적으로 소개하였다.

 

이규경은 서양음악의 보표, 음자리표 등을 소개하였다. 한편, 18세기의 실학자였던 홍대용은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관찰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박지원도 천주당에서 서양음악을 들었던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처럼 중국에 진출했던 가톨릭 선교사들은 조선에 서양의 음악을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와 서양음악

 

서양음악과 본격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계기는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인 선교사의 입국을 들어야 하겠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한 때는 1836년이었다. 이때 입국했던 엥베르 주교나 모방, 샤스탕 신부는 서양음악의 훈련을 받은 인물들이었고, 조선에서 가톨릭 전례를 집전하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서양의 음악을 가창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한편, 이때 입국했던 선교사들은 김대건, 최양업 등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하여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노래를 시켜보고 그 음정이 불안정했다고 평가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이 이후 김대건 등은 전례의 집전에 필요한 그레고리오 성가를 중심으로 하여 서양음악에 대한 훈련을 받아 제대로 노래를 불렀음에 틀림없다. 이는 최양업 신부의 사례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되어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선교에 종사했다. 그는 마카오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3일자 편지에서 “서양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 하나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그의 요구대로 이 악기가 조선에 전해졌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마카오에 요청했던 물품들이 대체적으로 그대로 조선에 들어왔음을 감안하면 이때 서양의 악기도 조선에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악기의 연주자는 최양업 신부 자신이었으리라.

 

한편, 개항기 이후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많이 입국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서양음악의 수용은 더욱 빈번해졌다. 1876년 조선에 들어와 선교에 종사했던 드게트(Deguette) 신부는 감사의 노래 ‘떼 데움(Te Deum)’을 소리 높이 부를 수 있었다. 1888년 조선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속한 프랑스인 수녀들도 서양음악의 뿌리인 교회음악의 보급에 일정한 노력을 더해주었다.

 

또한 맛뮈텔 주교의 일기맜를 통해 검토해 보면, 1892년 6월 30일 이후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의 소녀들로 성가대가 편성되어 성체강복식의 전례음악을 맡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이 소녀 성가대 이외에 소년 성가대가 별도로 구성되었다. 소년 성가대의 활동은 1898년 이후 1903년 사이에 여러 차례 확인되고 있다.

 

 

남은 말

 

이러한 기록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그 소년 소녀 성가대는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서양식 합창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01년 조선에 입국하여 군악대를 지휘했던 에케르트도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딸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사람 마르텔(Martel, 1874-1949년)과 혼인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원산에 있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다.

 

조선에 근대음악을 수용하는 데에 일정하게 기여했던 에케르트의 외손녀 임마쿨라타 수녀는 조선땅에서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투신하다가 조선의 수녀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전해주었던 서양의 음악이 이땅에 뿌리를 내렸듯이 임마쿨라타 수녀가 전한 복음도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경향잡지, 2003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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