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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우리 역사 속의 동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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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우리 역사 속의 동정녀

 

 

동정은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신체적 순결성을 지키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금욕적 삶의 형식은 이미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독신생활을 격려하기도 하였다(마태 19,10-12).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초기부터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고, 주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는”(1고린 7,32-34)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한국교회사에는 초창기부터 신체적 순결성을 존중하는 동정에 관한 적지 않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오로지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스스로 동정서원을 발하고, 이를 실천하는 동정생활을 택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동정녀의 길을 걸으며, 수도회가 없던 사회에서 수도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리하여 동정생활은 박해시대 이래 교회 안에서 중요한 삶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교회사에서 동정과 동정녀

 

1835년 조선에 입국하고자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을 안내해 준 중국인 신자 왕(王) 요셉을 통해 조선 교우들과 한문으로 글을 써서 문답을 나누었다. 왕 요셉은 조선 교우들에게 “조선 교우들 중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분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의 뜻을 조선인 신자들은 정확히 알아듣고 “여자들 가운데는 수절한 사람들이 많으나 남자 교우들 가운데는 그보다 적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대화를 통해 박해시대 당시 조선인 신자들은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분들”로 이해하였고, 남녀 수절 교우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박해시대 우리 교회사에는 여러 명의 동정녀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정녀들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유박해(1801년) 때 윤점혜(아가타), 문영인(비비아나), 이순이(루갈다) 등을 비롯한 여러 명의 동정녀들의 기록이 있다. 을해박해(1815년) 때에는 동정생활을 그리다가 좌절된 이시임(안나)의 삶이 돋보이며, 기해박해(1839년)에서는 김효임(골룸바)과 김효주(아녜스) 자매를 비롯하여 그 밖의 동정녀들이 순교했다.

 

동정을 지키고자 하던 원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신도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순이와 함께 지내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중철(요한)을 남성 수절자로 먼저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1815년 대구에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도 한때 동정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김시우(알렉스), 최 마르티노도 동정서원을 발하고 수절자의 삶을 살았다. 조숙이나 정하상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들이 동정생활을 택하게 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하느님의 사업에 전념하여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1801년 당시 강완숙이 지도하던 여성공동체에서 같이 생활하던 동정녀들에게서도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동정녀 김효임의 증언을 통해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신문하던 관장에게 “천주교인들의 눈에는 동정이 더 완전한 지위로 생각되며, 자기들은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려고 동정을 지키기로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편, 당시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나 성 요셉을 비롯한 로마 시대의 박해에서 순교한 동정녀들에 대한 신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교회 내에 감돌던 이 같은 정서적 배경도 그들의 동정생활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동정녀들의 생활

 

교회사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들은 기도와 금욕생활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동정생활은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다. 정약종의 딸 정정혜(엘리사벳)의 경우에는 동정을 서원했지만, 30세쯤 되었을 때 2년 이상이나 강력한 유혹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반발하는 육체를 끊임없는 극기와 금식기도[大齋]로 공격하고, 주야로 하늘의 배필이신 예수께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눈물은 마침내 승리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동정녀들 가운데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대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편, 동정녀들은 그 긴 기도문들을 외웠고, 기도의 정신이 가득해서 밭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곤란을 덜어주려고 필요한 것까지 포기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갖도록 권고하였다. 그들은 굳은 신앙을 가지고 순교에 임해서도 다른 이들을 격려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 고통과 보람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동정이라는 삶의 방식은 당시 사회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유교 문화는 나이가 차면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고 떳떳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방에 부임한 수령들도 의지가지 없는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고 과년한 사람들의 혼인을 주선하는 일에 힘써야 했다. 이러한 유교적 문화풍토에서 동정생활이란 이해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1839년에 발표된 ‘척사윤음’에서는 “음양이 있으면 반드시 부부가 있음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인데, 저들은 시집가고 장가들지 않은 것을 망녕되이 정덕이라 가탁하니, 이로 말하면 인류가 소멸될 것이다.” 하고 지적했다.

 

정부에서 동정을 거부하던 것과는 다른 이유로 당시의 교회에서도 동정생활에 신중을 기하도록 했다. 물론 18세기 말엽 교회 창설 초기에는 주문모 신부 등에 의해 동정생활이 인정되고 축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1857년 신자들에게 사목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성교회법에 동정 지키고자 하는 자가 혼자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법이라. 마땅히 탁덕과 자세히 의론하여 할 것이니, 그 허락 없으면 아니 되며, 수정(守貞)하고자 하는 부부도 이 법과 같이 할지니라.”

 

 

남은 말

 

19세기 중엽의 교회에서 동정허원과 동정생활을 제한하고자 했던 일은 하느님께 대한 허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교리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의 그 말은 당시의 문화풍토를 감안한 말이었다. 곧, 당시 조선의 문화풍토에서 동정생활이란 유별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동정생활은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박해를 자초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정녀를 둔 신자 가정에서는 적지 않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신도들에게 동정생활은 새롭게 터득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동정생활을 결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절을 중시하던 유교적 문화풍토나, 독신생활을 기본으로 한 불교적 수행의 전통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동정생활은 이러한 전통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기존 문화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도전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실험하고 있었고, 새로운 삶이 통할 수 있는 새 사회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경향잡지, 2002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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