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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한국교회 창설 이전에는 - 어떤 선교사의 조선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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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10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한국교회 창설 이전에는

 

어떤 선교사의 조선 방문

 

 

17세기 이후 조선왕국은 서양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위해서 중국이나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 선교사들은 주변 나라들에게도 관심을 가졌고, 조선에 대한 정보를 본국에 전했다. 당시 일부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물론 16세기 말엽 임진왜란 때 스페인 계통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따라 조선에 잠시 들어왔던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하멜’과 같은 난파선의 선원이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써서 조선을 서양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1747년을 전후하여 두 명의 서양인 선교사가 중국을 통해 조선에 직접 입국했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기록을 남긴 이는 들라포르트(Delaporte) 신부였고, 때는 조선에 천주교회가 세워진 1784년보다 대략 4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들라포르트 신부의 입국

 

서양의 역사를 보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이르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서양의 출판계에서는 신구 대륙에 대한 각종 여행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저명한 여행가는 들라포르트 신부였다. 그는 “프랑스의 여행가 : 신구 세계에 대한 견문”을 엮어냈다. 프랑스 파리의 셀로 출판사에서 1768년에 간행된 이 책의 제6권, 266쪽부터 298쪽 사이에는 그 자신이 경기도(당시 서울의 이름)에서 작성한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들라포르트 신부는 예수회 회원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는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여행가’로서 중국과 조선 그리고 만주 등지를 방문한 뒤, 이 지역에 관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으리라 추정한다. 물론 신세계와 구대륙을 여행하던 과정에서 현지에서 선교하던 동료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청국에서 파견한 사신 일행을 따라 조선을 방문했다. 그때가 l747년경이었다. 중국의 북경에는 아담 샬과 같은 예수회 선교사가 청국 조정의 신임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었다. 여행가였던 들라포르트 신부는 중국여행의 과정에서 아담 샬 등 동료 예수회원의 도움으로 청국 관원들과 접촉했고 조선 방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카푸친회 선교사 한 명과 함께 청국 사신에 동반하여 조선에 입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들라포르트 신부와 또 다른 카푸친회 소속 유럽인 선교사 한 명이 교회가 세워지기 40여 년 전 조선에 입국했다는 말이 된다.

 

당시 청국에서는 명나라 말엽 이후 중국에 나와있던 선교사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병자호란에 참패한 다음 청국으로부터 각종 압력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정황을 감안하면 서양인 선교사가 청국인 사신과 함께 조선에 방문할 수 있었던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는 1747년 2월 15일자로 조선의 수도 ‘경기도(京畿道)’에서 편지를 발송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 편지에서 조선의 풍속과 특성 등을 비교적 자세히 수록했다.

 

 

들라포르트가 본 조선 사회

 

들라포르트의 편지에는 조선에 관한 여러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당시 조선에 관해 언급한 바 있던 뒤알드 신부나 레지스 신부보다 더욱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편지에는 조선의 관리 또는 선비들과 대화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상당 부분은 당시 조선의 상황과 일정하게 부합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직접 방문자가 아니고서는 언급하기 어려운 관찰 내용을 수록하기도 했다. 한 예로 조선 불교계가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 수 있다. 그는 종교인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방문한 지역의 타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고 이를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에는 상당 부분 과장되거나 잘못 본 부분도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정절을 중시하는 조선의 풍습을 논하면서, 그는 간통이 남자에게도 중대한 범죄가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유부녀와 간통한 총각은 얼굴에 회를 칠해 시장에서 조리돌림하고 곤장을 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간통한 부녀의 사형집행은 그 부친이나 가까운 친척이 집행한다고 했다. 이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보편적 관행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조선에서는 ‘면화’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조선의 북쪽지방을 통해서 서울에 왔고, 이 지역에서는 면화가 재배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이와 같이 부분적 관찰을 조선 전체의 상황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조선에 악어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은 l7세기 초엽 서양의 일부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런 기록을 읽은 듯하다. 그는 이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편지에 함께 포함시켰다고 생각된다. 물론 조선에는 악어가 없고, 그의 이러한 언급은 전적으로 잘못된 부분이다. 또한 그는 조선에서는 봄과 가을에만 죽은 사람을 묻는다고 했다. 아마도 이는 일부 지배층에서 죽은 뒤 수십 일이 지나서 장례를 지내기도 했던 것을 일반적인 관행으로 파악하여 서술한 듯하다.

 

그의 책에는 이와 같은 오류가 드러난다. 오랫동안 조선에 거주했던 하멜의 표류기에도 적지 않은 오류가 있다. 이를 감안하면 들라포르트 신부의 기록에 비록 일부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해의 범위 내에 드는 것으로 너그럽게 보아줄 수도 있다.

 

 

남은 말

 

들라포르트 신부가 ‘조선의 수도 경기도’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1747년 2월 15일은 양력이므로, 이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747년 1월 7일이다. 그러나 청국 사신이 조선에 1747년 1월을 전후하여 입국했다는 사실은 조선측 자료를 통해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들라포르트가 편지를 보낸 날짜는 어떠한 착오로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편지가 조선에서 발송되었고, 그 시기는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이었다는 점에는 동의를 할 수 있다.

 

한편, 들라포르트 신부의 조선 방문사실을 확인한다 하더라도, 그 방문은 그리스도교 선교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행위와 관련된 내용도 그 편지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한국 천주교회사나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전개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해 줄 수는 없다.

 

이 자료의 진실성을 규명하려면 더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곧, 들라포르트 신부의 다른 기록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와 함께 조선에 입국했다는 카푸친 수도회의 선교사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기 이전의 교회사도 보완해 나가고, 당시 조선과 유럽 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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