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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 - 조약문서의 원본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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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9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

 

조약문서의 원본을 지켜라

 

 

구한말 조선왕조는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박으로 단행된 이 조약에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대를 외국의 지원에 걸고 있었다. 1880년대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었던 조약문에서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특히 1882년 체결한 ‘한미조약’의 조문에서는 일종의 연맹국적 성격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약문에 기대를 걸고 고종은 이 조약문들의 원본을 지키고자 했다. 을사조약 이후 이 조약문들은 뮈텔 주교의 서고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치사한 매국노들의 제보로 이 조약문의 소재지가 밝혀졌고 일제는 이를 압수해 갔다,

 

 

고종과 을사조약 무효화 시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토 히루부미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 관료들과 이완용 등을 비롯한 조선 관료들은 옥새를 위조하여 이 조약문을 공포했다고 한다. 물론 고종은 이에 저항했지만 고종의 주장은 친일파 관료들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종은 조선의 외교권을 회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방책을 마련하여 실천해 나가고자 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미국, 러시아, 영국 등에 호소하여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관철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중도에 좌절되었고, 1907년 5월에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파견하여 국제회의에서 이를 호소하고자 했다. 물론 이 일도 실패했고, 이 사건으로 고종은 퇴위를 강요당했다.

 

한편 고종은 을사조약 직후 대한제국이 외국과 체결했던 조약문의 원본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고 이를 지켜나가려고 노력했다. 이 조약문의 원본은 조선의 독자적 외교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외교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서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토 히루부미는 고종에게 이 조약문의 원본을 인도하라고 강박했다.

 

고종은 이 조약문들이 을사조약 직전인 1904년 4월 14일에 일어났던 경운궁 화재 때에 소실되었다고 둘러대고 원본 인도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관료들과 친일파들은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조약문서의 원본들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은 1906년 6월 11일에는 김조현 요한을 시켜 이 조약문서를 담은 궤짝을 뮈텔에게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궤짝은 밀봉되어 있었지만, 김조현은 이 상자에 조약문서의 원본이 있음을 뮈텔에게 알려주었다.

 

뮈텔은 1895년 이래 이미 고종에게 필요한 경우 황제를 돕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는 이 약속을 지켰고 상자를 받아서 주교관의 문서고에 보관했다. 이때 뮈텔은 상자 안에 든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겠으나 상자를 맡아주겠다고 말했다. 뮈텔은 상자 하나와 열쇠 세 개를 인수한다는 인수증을 써주며, 이 인수증을 제시할 때에만 보관물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밀사로 파견하였던 직후 고종 황제의 조카였던 조남승이 인수증을 가져와서 뮈텔이 보관하고 있던 서류의 일부를 찾아가기도 했다. 고종 황제가 퇴위한 다음인 1909년 5월 28일에도 그는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힌 친서를 가지고 와서 문서의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나 서류 상자는 뮈텔 주교의 문서고 안에 비밀리에 계속해서 보관되어 있었다.

 

 

고종의 비극

 

그런데 이때 문제가 터졌다. 고종은 1898년 미국인 콜브란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에 일본 돈 100만 엔(50만 달러)을 투자한 바 있었다. 고종이 미국계 회사에 서울의 ‘전차부설권’을 주며 왕실도 직접 투자했던 까닭은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이려던 의도 때문이었다.

 

이 투자건에는 한일합방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을 비롯해서 이준용과 조남승 등 6명이 함께 관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종에게서 투자금으로 일본 돈 100만 엔을 받았으나 콜브란에게 60만 엔만 투자하고 40만 엔을 횡령했다. 투자금의 전달과정에서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그리고 이완용 등은 100만 엔짜리 영수증을 위조하여 고종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 이후 미국은 조선의 이권에서 점차 발을 뺐고, 콜브란도 1909년 7월 전차부설권을 ‘일본가스회사’로 넘겨주었다.

 

이때 콜브란은 고종이 투자했던 60만 엔을 이완용 등을 통해서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완용 등은 이 반환금의 전달과정에서도 배달사고를 냈고, 그 일부만을 돌려주었다. 이에 고종은 자신이 투자한 100만 엔 전액의 반환을 요구하다가 영수증이 위조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고종은 탐관오리들에게도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이는 고종의 비극이었고 조선의 절망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치안을 담당했던 일제 통감부의 경찰에서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잡아넣을 수는 없었지만, 조남승을 공금 횡령혐의로 구속하게 되었다. 물론 이완용도 일제 당국에 큰 약점을 잡히게 되었지만 벼슬이 낮았던 조남승은 이를 혼자서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완용이나 조남승은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꾀를 썼다.

 

고종의 인척이었던 조남승은 조선왕국이 외국과 맺었던 조약문서 원본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완용과 조남승 등은 이 사실을 일제에 알려주고 자신들의 횡령죄를 사면받고자 하였다. 이로써 뮈텔이 이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파악한 통감부 당국에서는 뮈텔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서울 이사청(理事廳)에 부이시관으로 근무하던 다카하시를 뮈텔에게 보내 그 문서상자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옷차림으로 뮈텔을 방문했던 그는 조선인보다 조선어를 더 잘했고, 뒷날 식민사관적 시각에서 “조선유학사”를 써서 한국사상사의 연구방향에 나쁜 영향을 크게 미쳤던 ‘다카하시 도루’였음에 틀림없다.

 

뮈텔을 방문한 다가하시는 뮈텔에게 어떻게 그런 물건을 맡기로 수락하여 정치문제에 말려들 수 있느냐고 힐책했다. 이때 뮈텔은 그 문서가 조남승과는 다른 인물이 자신에게 맡겼고 그 뒤에 조남승이 이를 부분적으로 찾아갔음을 말했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요구한 전체문서의 반환에는 응하지 않았다.

 

뮈텔은 이 문제를 서울에 주재하던 프랑스 외교관과 협의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는 을사조약으로 프랑스 공시관은 이미 철수하고 프랑스와 조선의 관계가 단순한 영사관계로 전환되었던 때였다. 서울에 주재하던 프랑스 외교관 파이야르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뮈텔을 만나러 온 바 있었다.

 

이를 보면, 일제는 이 사건을 프랑스 정부 측에 통고하고 항의했음에 틀림없다. 뮈텔을 방문한 피아야르는 뮈텔이 이 상자를 맡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건네기를 거부한 행동이 합법적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1910년 5월 6일 경찰의 인도를 받은 조남승과 김조현이 일본인과 함께 와서 고종 황제가 1906년에 맡긴 상자의 반환을 뮈텔에게 요구했다.

 

이에 뮈텔은 당연히 이들에게 고종 황제의 청구서류를 요구했다. 이때 조남승은 1907년 11월에 이미 고종 황제가 물건을 모두 돌려달라는 친서를 보낸 바 있음을 상기시켰다.

 

뮈텔은 서류를 뒤져서 이 친서를 다시 확인하고 물건의 반환에 동의했다. 이들은 버들고리 안에 든 봉함된 상자를 뮈텔 앞에서 개봉했다. 그 안에는 과연 ‘중요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남은 말

 

이렇게 일제는 1910년 5월 6일 조선왕국이 미국, 프랑스 등 열강과 맺었던 조약문의 원본을 회수해 갔고, 계획대로 ‘한일합방’을 위한 절차를 밟아가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10년 5월 하순에 일본에서 간행되던 신문과 서울에서 발간된 영자신문 ‘서울프레스’에도 실렸다.

 

그해 6월 러시아 정교회 신부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파벨 선부는 이 사건을 러시아 페체르부르크에서 간행되던 선교지에 기고했다.

 

이 글의 말미에서 파벨 신부는 “불쌍한 고종은 황제였지만 기실은 수인(因人)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의 총리대신이나 조카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며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됨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렇게 망해갔고 뮈텔은 그 멸망의 증인이 되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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