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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 -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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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9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

 

 

개항기 우리나라의 역사와 교회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를 들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뮈텔 주교는 1890년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가 교구장에 취임했던 시기는 박해가 미처 다 끝나지 않았던 때였다.

 

조선교회를 책임지게 된 뮈텔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고 조선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과제가 놓여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의 국제관계를 적절히 이용하고자 했고, 조선의 국왕 내지는 고위 관료들과도 긴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조선의 관료들도 뮈텔을 서양세력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하기까지 했다. 이리하여 뮈텔의 역사적 역할은 더욱 커가고 있었다.

 

 

뮈텔이 만난 조선의 고위관료들

 

뮈텔이 조선교구장이 되어 입국한 때는 이미 한불조약이 체결된 뒤였다. 따라서 그의 신분은 조약을 통해 보장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고 선교할 수 있었다.

 

뮈텔은 1891년 2월 서울에 부임한 직후 서울 주재 프랑스 외교관들을 방문했다. 1891년 3월 초에 프랑스 공사의 소개로 조선의 외교업무 최고책임자였던 외무독판 민종묵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만남이 있은 며칠 뒤에 민종묵은 뮈텔을 직접 방문하여 대구에서 발생한 교안 문제를 협의했다.

 

그런데 뮈텔 주교는 1893년 12월 말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 이유인의 방문을 받았다. 이때 이유인과 그의 하인들은 뮈텔 주교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주교관에서 쫓겨났고, 이유인은 이 사건으로 인해 파직당했다.

 

그 다음해 초에 그는 뮈텔을 방문하여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고, 두 사람은 함께 화해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 조선교구장 또는 선교사의 위치가 변해가는 신호탄이었다.

 

1894년에 접어들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국제적으로도 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이 해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기화로 하여 청일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근대적 개혁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전쟁 이후 조선왕국의 운명은 더욱 위급해져 갔다. 그리고 조선의 관료들은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했다. 고종도 조선과 자신의 왕실을 지지해 줄 다른 세력을 찾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들은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는 데에 대한 대비책으로 프랑스를 끌어들이려고 생각했다. 또한 갑오개혁 이후 조선의 고위관료들은 개혁정사의 일환으로 종교자유에 관한 문제를 염두에 두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뮈텔은 1895년 초부터 조선의 고위관료들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이때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과 궁내부 대신 이재면(대원군의 맏아들)이 뮈텔 주교를 예방했다. 그리고 뮈텔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 가운데는 홍계훈이 있었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때 양호초토사로 전봉준과 전주화약을 맺었던 인물이었다.

 

홍계훈은 1895년 4월 20일 극비리에 안내자인 신자 한 사람과 함께 뮈텔과 만나서 청일전쟁 이후 조선외교의 방향을 논한 바 있었다. 그뒤 홍계훈은 자주 뮈텔과 접촉하며 친히 지냈다. 뮈텔도 홍계훈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뮈텔과 고종을 연결해 줄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세월은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고종과 뮈텔의 만남

 

갑오개혁 이후 뮈텔과 접촉을 시도했던 대표적 인물로는 법부대신이었던 서광범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내였던 박 마리아는 1895년 5월 30일 자신의 남편인 서광범이 뮈텔의 고종 알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온 바 있었다.

 

또한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보몽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자 조선에서는 이를 계기로 프랑스와 우호를 다지고자 했다. 이렇게 조건들이 성숙되어 뮈텔은 그해 8월 28일 고종을 알현할 수 있었고, 고종으로부터 천주교의 존재를 확인받았다. 이로써 조선에서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 알현 때 고종은 조선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자신의 몸을 숨기려고 상복 차림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뮈텔은 이 알현에 만족하여 고마움을 표했고, 고종에 대한 선의와 헌신을 약속했다. 이후 뮈텔이 고종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해 10월 8일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8일 뒤인 10월 16일이었다. 이때에도 고종은 자신을 도와달라고 뮈텔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렇게 뮈텔이 고종을 알현한 이후 그는 주요한 개화 관료들을 거의 다 만났고 천주교의 선교와 관련된 문제들을 그들과 직접 협의해 나갔다. 뮈텔은 조선의 조야에서 주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민비시해사건으로 훈련대장 홍계훈이 전사한 뒤 뮈텔과 고종을 연결한 인물은 김조현 요한이었다. 신자였던 그는 궁내부에서 프랑스어 통역관으로 있었다. 그는 1897년 민영환이 프랑스 주재 공사로 파견되자 민영환을 수행하여 파리에 부임했다.

 

이때에도 뮈텔은 유럽의 선교본부에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뒤 그는 귀국하여 1903년 8월 5일에 개최된 교황 레오 13세의 추모미사에 궁내부 참리관의 자격으로 여러 고관들과 함께 참석한 바 있다.

 

그뒤 뮈텔은 1904년 7월 21일에도 고종을 알현하여 교황이 고종 황제에게 보낸 즉위 50주년 경축 전문을 전달했다.

 

이때 뮈텔 주교는 “난국을 맞은 폐하의 걱정거리를 나도 함께 느끼고 있으며, 우리 교우들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폐하와 대한제국을 보호하시고 은총을 내려주시도록 매일 간청하고 있다.”고 통역을 통해 말씀드렸다. 그러나 뮈텔과 조선 교우들의 소망과는 달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요되었고,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남은 말

 

뮈텔 주교는 조선교구장으로 서울에 부임한 뒤 조선인 고위관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세 차례에 걸쳐서 고종을 알현했고, 이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았으며 선교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그가 조선의 고위관료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된 시기는 신앙의 자유을 공인받은 1895년 이후였다.

 

이때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그는 조선의 고위관료들을 만나서 조선의 외교문제 등에 대한 자문에 응해주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무력해 하던 고종을 위로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과 뮈텔의 만남은 민족의 복음화와 신앙자유의 폭을 넓혀주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들 사이의 만남이 가지고 있는 교회사적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하며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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