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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안중근의 두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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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8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안중근의 두 동생

 

 

한국 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가족적 유대가 남달리 강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전통사회는 부계 혈족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가족 내지 가까운 친족들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과정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 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시영의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함께 안중근의 집안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안중근의 독립의지는 그의 두 동생들과 조카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안정근과 그의 자녀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안중근의 동생들에게 딱 들어맞았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 치릴로와 안공근 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의 학교에 입학해서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북한 사회에서 각기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안중근의 손아래 동생인 안정근(1885-1949년)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려고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노령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무오독립선언문’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1919년 10월경 샹하이로 이주한 그는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뒤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그 뒤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949년에 샹하이에서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정근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남 4녀 가운데 안원생은 1943년 한독당 계통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 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안진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차녀 안미생은 중국 서남연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이들의 혼인으로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공근과 그의 자녀들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공근 요한(1889-1940년?)은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에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을 확보하려고 활동하였다.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하였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였고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뒤 이사직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한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또는 영국대사관에 통역사로 근무하였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서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와 연결되었다. 그는 임시정부를 중국을 비롯한 외국정부기관 및 조선인 좌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안공근은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 시절 김구와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안공근에게는 안우생 등 두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뚱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이때 광뚱에서 하룡과 섭정이 주도했던 공산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에는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비롯해서 40여 명의 조선인 청년학생들이 참여했다가 대부분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안우생은 이에 참여하지 않고 몸을 피해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후일 김구의 영문비서가 되어 해방 조국에서 봉사하다가 김구가 암살된 직후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과 함께 홍콩으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안공근의 둘째 아들 안낙생은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결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안공근의 사위 가운데 하나가 한지성이다. 한지성은 장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43년 충칭에서 사촌 매부인 안원생이 총간사로 있던 한국청년회의 간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북쪽으로 가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내려와서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9·28 때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남은 말

 

안중근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우들은 안중근의 뜻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신고의 길 위에서 땀과 피를 아끼지 않으며 해방의 그날을 위해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신병을 얻었거나 암살의 비운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한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좌우로 대립되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어나가고자 했다. 그들의 염원은 좌나 우가 아닌 대한독립에 있었다.

 

안중근 가문이 없었다면 일제하 천주교도의 독립운동은 매우 미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훈도를 받은 동생들의 독립운동이 있어 해방이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민족과 교회 문제를 생각할 때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범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안중근 형제들의 독립운동은 우리 교회사의 귀중한 자산이다.

 

[경향잡지, 2003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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