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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항기 교회재건 운동과 선교정책: 신앙자유 얻었으나 주민과 갈등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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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78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회] (1) 개항기 교회재건 운동과 선교정책


신앙자유 얻었으나 주민과 갈등 심화

 

 

병인박해는 1866년 2월23일 베르뇌(Berneux) 주교와 홍봉주를 비롯한 신자들의 체포로 시작되어 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까지 지속되었다. 7년 동안 대원군 정권에 의해 지속적으로 가해진 박해는 1784년 이후 박해와 탄압 속에 일구어 놓은 신앙 공동체들을 파괴해 버렸다.

 

1866년 2만5000명을 헤아리던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살아남은 신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신분을 숨기고 살거나 신앙을 포기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개항기에 국내 생존 신자들과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피신한 선교사들은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여기에서는 먼저 이러한 문제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개항기 초기에 교회재건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국내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박해가 수그러들자 만주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교회재건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만주 선교사들도 국내 변화를 주시하면서 활로를 찾아 나섰다.

 

이와 같이 신자와 선교사로 나누어 살펴봄으로써 교회 지도자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신자들이 기울인 교회재건 과정과 방법의 특성은 무엇이었는지, 이와 더불어 교회 지도자들의 선교정책 본질은 무엇이었는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제7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블랑 주교가 개최한 제3차 시노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도자들이 결정한 교회 내실화의 내용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교회재건 과정에서 제기되었거나 정리된 선교정책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블랑 주교의 활동 기간이 한불조약 체결이 이루어진 시기인 만큼 그가 추진한 선교정책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셋째, 개항시기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뮈텔 주교의 선교정책에 대해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8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뮈텔 주교는 한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주교이다. 이에 선교사들이 제시한 교구장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의견을 통해 개항기 교회의 기본적 틀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뮈텔 주교의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1890년 주교 성품에서부터 1906년에 외교권 박탈로 주한 프랑스공사관이 한국을 떠나는 시기까지로 한정하여 살펴볼 것이다. 이 기간을 두 시기로 나누어, 1890년부터 1895년까지 첫째 시기에서는 블랑 주교의 선교정책을 계승하는 가운데 뮈텔 주교 자신이 계획해 간 정책은 무엇인가를 주목하였다.

 

1896년부터 1906년까지의 둘째 시기는 뮈텔 주교 자신이 정립한 정책을 추진하는 시기로서 수많은 교안이 발생하였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점적으로 추진된 정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교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교안이 조선사회와 교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개항기 전체를 통해 교회가 추진한 선교정책의 내용을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개항기 한국 천주교회의 최우선적 과제는 병인박해로 파괴된 교회의 조직을 재건하고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며, 신자들 역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즉 신자들과 더불어 교구장과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박해와 탄압으로부터 교회가 온전한 종교자유를 획득하는 길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가장 먼저 기울인 노력은 1876년 5월10일 블랑(Blanc)과 드게트(Deguette) 신부의 입국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들에 의한 성직자 영입운동이었다. 성직자 영입운동에 관여한 신자들은 입국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때 신자들은 교회재건을 위한 방안으로 공소재건과 회장제도 복원을 추진하였다.

  

사실 개항 초기 교회재건운동의 과정을 주목해 보면 성직자 영입운동과 공소재건운동, 그리고 회장제도 복원을 추진해 나갈 수 일정한 신자조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직자 영입운동에 힘입어 입국한 블랑과 드게트 신부는 교회재건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전국에 산재한 신자들을 조직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공소회장의 임명이라고 여겼다. 신자들의 중심인 공소회장의 임명은 교회 기초조직인 공소재건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전국적 공소재건은 박해 후의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신자들을 방문하여 새로운 공소회장을 임명하고, 옛 공소들을 복원하는 한편 새 공소도 세워 나갔다. 이처럼 병인박해 후 187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교회재건운동은 성직자 영입운동에 이어 회장제도의 복원과 전국적인 공소재건 정책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선교정책의 방법은 개항기 내내 교회의 주요한 정책의 하나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주한 프랑스공사관도 자국 선교사들이 전개하는 선교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이미 프랑스공사관은 1886년 한불조약 체결시에도 자국민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보장해 주고자 진력하였었다. 조약체결 이후에도 프랑스공사관이 나서서 자국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선교활동을 지원해 주었다.

 

블랑 주교의 선교정책은 회장제도의 복원과 공소재건을 통해 무너진 교회조직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미 블랑 주교는 주교로 성품되기 이전부터 이 일을 시작하여 왔다. 리델 주교의 체포와 추방이 있던 1878년부터는 동료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지방의 공소를 부흥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2년경에는 상당 부분 진척을 이루어 병인박해 이전과 비슷한 정도의 교회조직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방 교회조직이 재건되고 정부의 개방정책이 확대되자 선교사들은 수도에 선교본부를 정착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더불어 1884년 블랑 주교가 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개최한 제3차 교구 시노드를 통해 서 한국에서의 선교정책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마련하였다.

 

특히 시노드를 통해 그 동안 불안정한 상황에서 선교사들마다 임의로 처리하던 교회 규칙들을 통일하여 선교활동의 체계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1880년대 후반 공소회장제도를 보완하고 발전시켜 순회회장학교를 세우고 제도화하여 교세확장을 추진하였다. 결국 블랑 주교가 추진한 선교정책의 근간은 신자조직의 기초인 공소를 일으키고, 신앙의 내실화를 기하기 위하여 회장제도를 복원하고 시노드의 개최와 순회전교회장 제도를 확립하는 것에 있었다.

 

뮈텔 주교의 선교정책은 1890년부터 1895년에 이르는 첫째 시기에는 선임 교구장인 블랑 주교가 추진한 계획들을 마무리하여 교회의 안정화를 추구하면서 교세확장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한 프랑스공사관과 공조체계를 갖추면서 한불조약체제를 교회에 유리하게 활용해 나갔다. 정부로부터 완전한 선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갈등과 사건들에 대해 한불조약을 발판으로 삼아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도중에 불거져나오는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부각시켜 나갔다. 뮈텔 주교의 목적은 이러한 정책을 통해 천주교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뮈텔 주교는 선교활동의 두번째 시기에 해당되는 1896년부터 1906년까지 선교사의 활동을 확대하면서 신자와 예비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탱시켜주고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기간 동안 뮈텔 주교는 신자 보호정책을 중심으로 지방의 본당 증설정책을 추진하면서 전국적인 교세확장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취한 선교정책은 지나치게 신자와 선교사들을 보호하는 가운데 많은 갈등과 분쟁들을 야기하였다. 특히 신자와 주민 사이의 아주 사소한 갈등에도 신자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교사들이 노골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교회측에 유리한 해결을 얻기 위해 프랑스공사관에 개입을 요구하여 외교적 해결을 시도함으로써 대부분의 사건이 교안(敎案, 외래종교와 토착세력간의 충돌)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사건은 교회에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신자와 주민 사이에 분쟁이나 사건이 발생하였던 지역에서는 양측 사이에 더 깊은 갈등을 가져왔다.

 

이처럼 뮈텔 주교가 추진한 개항기 선교정책의 결과 신자 증가와 전국적인 본당 증설과 정착이 이루어진 반면, 교민 갈등과 분쟁을 더욱 가속화하여 개항기에 수많은 사회문제를 양산하였으며 수많은 교안의 발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평화신문, 2003년 6월 1일, 장동하 신부(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장),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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