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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세례성사 - 내가 너를 씻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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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세례성사

 

내가 너를 씻기되…

 

 

교회는 세례를 통해 결속된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세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가톨릭에서는 일곱 가지 성사 가운데 세례를 첫자리에 두고 있다. 오늘날 이 세례성사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일정기간의 교육을 수료한 다음 전례를 통해서 받는 성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박해시대 때에는 ‘세례’ 대신 ‘성스러운 세례’를 뜻하는 ‘성세’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세를 받다’ 또는 ‘세를 부치다’라는 뜻을 가진 ‘영세’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썼다. 곧, 영세는 일종의 동사이지만 박해시대 이래 이 낱말을 마치 명사처럼 사용하여 왔다. 한때 일반인들은 ‘세례’를 개신교 용어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천주교 용어위원회에서는 영세라는 단어 대신에 세례를 교회의 공용어로 확정했다.

 

 

초기교회의 세례에 대한 이해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초창기 신자들은 세례를 교회의 일원이 되는 예식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17세기 중국에서 한문으로 발간된 천주교 서적들은 박해시대 조선교회의 신도들에게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이 한문교리서들을 기초로 하여 19세기에 간행된 한글 교리서는 세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1864년에 간행된 목판본 “성교요리문답”은 “성세는 예수께서 친히 명하신 성사이며, 입교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원죄와 본죄를 없애주고 그 벌까지 사하여주어서 하느님의 의자(義子)가 되게 소멸하고 아울러 그 마땅히 받을 벌을 사하여 능히 천주와 성교회의 양자가 되게 한다.”고 설명하였다. 또 1884년에 간행된 “성교백문답”은 “입교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통회하고 성수를 영하면[받으면] 천주께서 즉시 성총을 태워주어 영혼의 모든 죄를 씻어 소멸시킨다.”고 했다.

 

세례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교회 창설 초기부터도 발견되고 있다. 이벽은 1783년 북경으로 떠나는 이승훈에게 북경에서 천주교의 세례를 받고 그 예배행위를 깊이 알아오라고 했다.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은 귀국한 다음 1784년 가을 서울 수표교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어 조선 천주교회를 발족시켰다. 당시의 교회는 초창기의 교회 지도자들이 집전한 세례를 통해서 결속된 신앙공동체였다.

 

초기교회의 신도들은 세례를 주는 격식과 경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864년의 목판본 “성교요리문답”에는 “세 부칠 때에는 먼저 본명 하나를 부르고 맑은 물로 이마를 씻으며 이 아래 경을 똑똑히 외우되 물을 부음과 경을 외움이 불가불 함께할 것이요 아울러 가히 한 자이라도 더하거나 덜하지 못할 것이니라.”며 세례를 주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 경문도 “내가 너를 씻기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야 하노라.”라고 분명히 밝혀주었다.

 

 

세례의 집전자

 

교회 창설 직후 일부 신도들은 세례와 관련하여 오늘의 우리와는 약간 달리 이해한 측면도 나타난다. 곧, 1801년의 박해 때에 이승훈을 신문했던 관헌들은 “세례는 신부의 일”로 규정한 바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최창현이 한 말을 통해서 해명될 수 있다. 최창현은 “신부는 세례를 주는 사람을 말하고, 대부는 교리를 가르쳐준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했다. 이는 아마도 교회 초기에 있었던 평신도 성무집전 단계의 상황을 묘사한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교요리” 단계에 이르러서는 세례를 집전하는 일은 ‘탁덕’ 곧 사제의 고유한 일이지만, 위험을 만나면 누구든지 세를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조선교회는 그 창설 직후 성직자를 영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초기의 신도들은 자신이 직접 세례를 집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례의 형식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경우도 발생한 듯하다.

 

예를 들면, 1790년 북경교회를 찾은 윤유일과 지황에게 그곳의 선교사들은 세례를 받은 방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 결과 그들은 “윤유일이 받았던 세례는 세례를 베풀 때 꼭 밟아야 할 형식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조건부로 다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같이 갔던 지황의 세례는 유효한 형식이었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세례는 본격적 형식을 갖추어 집전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집전한 세례성사에 대해서는 유관검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영세는 작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놓고, 죽 늘어앉은 여러 학도가 정수리를 드러내 놓고 단정히 꿇어앉은 뒤 주문모가 그 물을 정수리로부터 흘려 내리는데, 이와 같이 하면 이전의 죄과가 모두 용서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영세 때에도 주교가 축성한 올리브 기름인 성유를 발라야 하기 때문에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하게 되었음을 말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세례성사는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진행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남은 말

 

1784년 교회가 창설되던 때, 청년 지식인들은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교리를 연구했다. 그 밖의 사람들도 한동안 자부심을 가지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박해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1850년대 메스트르 신부는 새로 영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거나 홀아비 과부이고, 50세 이하의 사람들은 세례를 뒤로 미루다가 병이든 다음에야 세례를 청한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시대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일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실 형벌을 눈앞에 보면서 세례 받기를 청하려면 아주 특별한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감옥과 고문과 귀양과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재산과 지위와 친척과 친구를 잃는다는 것도 힘든 일이고요. 이런 생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저하고 뒷걸음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외교인 친구들 여럿이 저를 보러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리문답과 조 · 만과를 배워 정확히 외고 미신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중단하고 세례를 받는 일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이 나중이 언젠가는 오기를 바랍시다. 조그만 자유의 불빛이 있어도 천주의 은총으로 이 국민 모두 복음을 이끌어들일 것입니다.”

 

그 자유의 빛은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점차 밝아오기 시작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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