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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생활사 - 운명의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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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15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생활사

 

운명의 주인공들

 

 

천주교를 금지하던 시대에 천주교를 신앙하는 일은 국가에 대한 범죄행위였다. 이때문에 신자들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평가되던 죄인들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의 신자들은 신앙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면 자신의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잠시 박해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한테 최하천(最下賤)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지냈다. 그들은 이러한 현세적 어려움을 익히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의 운명을 택하여 스스로 개척해 나간 사람들이었다. 박해시대 교회사는 우리 역사에서 운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박해시대 신앙인의 삶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세워질 당시 천주교 신앙은 최신의 지식이요 가르침이었다. 천주교 신앙은 18세기 후반기 조선 양반 사회의 최고급 지식인들이 받아들였고 실천해 갔다. 이 과정에서 청년 지식인들 상당수는 서학 또는 천주교에 관한 책자 한두 권쯤은 읽어보았고 이를 서가에 자랑스럽게 갖추어 두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천주교는 전도가 양양한 ‘잘 나가던’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세워진 다음 곧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 문제로 인해서 공식적인 금지령이 내려졌다. 정조 대왕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을 “선비의 반열에 끼워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천주교는 더 이상 선비 곧 지식인의 학문으로 자리 매김할 수 없었다.

 

18세기 말엽 이후 조선왕조 사회에서 천주학은 ‘올바른 학문’[正學]인 유학의 가르침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그릇된 가르침’[邪學]으로 규정되었다. 천주교는 불학무식한 사람들이나 멋모르고 믿게 되는 종교로 낙인 찍혔다. 조선왕조는 이 ‘그릇된 가르침’인 천주교 신앙을 용납하지 않았다.

 

1791년 이후 천주교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고, 천주교 신앙은 본격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신앙인은 ‘나라님의 명령을 어긴 죄인’[御命罪人]이 되었다. 신자들은 현세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각오한 다음에야 천주교를 신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왕조국가의 체제 아래에서 살던 일반인들은 더 이상 ‘어명죄인’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숨겨야 했다. 이처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신자들은 점차 일반사회에서 고립되어 갔다.

 

조선왕조 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다. 죄수들은 상놈보다 신분이 더 낮은 천인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존재였다. 어명죄인인 ‘천주학쟁이’들은 집단으로 신분이 강등되는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이들은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인이 살던 촌락을 ‘속촌’(俗村)이라고 부르며 거룩한 교우촌과 구별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당시 신앙에서 강조하던 성(聖)과 속(俗)의 대립개념을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까지 확대 적용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도 결코 안온하지는 못했다.

 

교우촌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빈한했다. 1815년의 박해 때에 경상도 안동 우련밭에서 살던 김종한 안드레아의 생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일상 양식은 조밥에 소금을 얹어 먹는 것이었고, 그것을 장만하지 못하면 나뭇잎이나 도토리, 풀뿌리 산나물 같은 것을 먹고 지냈다.” 물론 이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하던 교우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침 없는 체포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고, 지방아전들의 수탈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신고에 찬 삶의 현장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막내동생 최신정 델렌신포로는 송 아가타와 결혼하여 과천 수리산에 살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1849년 이후 3-4년을 지내다가 경기도 광주 함박동으로 옮겨 갔다. 그 고을의 아전들은 제멋대로 교우들을 잡아다가 돈푼을 바치면 풀어주었다.

 

최신정의 가족들도 함박동에 옮겨 살기 시작한 이듬해 이런 일을 당했다. 그들은 몹시 가난했건만 돈 100냥을 빚내어 마련해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젊은 신혼부부가 집과 세간과 벌어먹을 땅뙈기를 준비하는 데에 200냥 정도가 들었다. 이에 견주어보면, 100냥이라는 돈이 가난한 그들 가정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본격적인 박해가 일어나면 교우촌은 깨지고 교우들이 풍비박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1866년의 박해 때에 송 아가타는 광주 함박동에서 포졸의 습격을 피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최신정과 송 아가타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막내는 1865년 12월 18일 생이었으니 아직 핏덩이나 다름없었다. 이들 가족은 “어즐없이 내외가 걸식의 길을 떠날 때에 어린 두 딸을 내외가 하나씩 업고 7세 된 어린 아들과 12세 된 아들은 걸려서 문전마다 걸식하며 향방 없이 다니다가 춘천군 물은다미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 ‘속촌’에서 수재민으로 가장하고 집을 얻어 살면서 비밀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지방의 무뢰배들도 수시로 교우촌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재물약탈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경기도 용인 땅 병목골에 살던 김 도미니코 회장은 1866년에 박해를 당해서 열세 식구를 데리고 산중으로 피신하여 여섯 달 동안 근근이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그 부근에 있던 외인들 10여 명이 작당하여 17세 된 그의 딸을 탈취하여 겁탈하고자 했다. 도미니코의 셋째 아들 요한은 본디 근력이 있는지라 제 누이를 데리고 뒤로 물러가며 말하기를 “만일 덤비는 자가 있으면 이 돌로 쳐 죽이리라.”고 했다. 외인들은 “이 여자를 내주지 않으면 포교를 불러 너희를 몰사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김 도미니코는 이들에게 할 수 없이 자신의 딸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김 도미니코는 밤낮으로 탄식하며 “내가 치명하여야 이 죄를 벗겠다.”고 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충청도 목천 베장골로 이사해서 살다가 1869년 10월 7일 경기 죽산고을 포졸들에게 잡혀가 순교했고, 그의 집안은 흩어졌다.

 

물론 모든 교우촌에서 이런 일들이 늘 되풀이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교우촌에 살던 그들의 삶은 신고(辛苦)에 차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스러움’을 추구하면서 삶의 신고를 극복해 나갔다. 모든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다. 특히 박해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눈에 뻔히 보이는 세속의 불행까지도 감수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한 사람들이 되었다.

 

 

남은 말

 

우리 교회사의 첫 장면은 최고의 지식인들이 열어갔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당시 지배층에게 배격을 받아 격리되자 신자들은 급격히 몰락되어 갔다. 박해시대를 살아가던 신자들 대부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어처구니없는 처사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부당한 처우에도 묵종해야 했다. 신앙의 자유, 신체의 자유, 생존의 자유마저 깔아뭉개던 그 야만의 시대를 살면서 그들은 미치지도 않았고 배교하지도 않았다.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이 하느님의 존귀한 자식이 되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신앙이었다.

 

이 신앙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의 것이었고, 이 때문에 자신은 존엄한 존재로 변해갔다. 온갖 어려움에도 교우촌의 삶을 통해 함께 격려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삶 자체는, 존엄한 인간성에 대한 극도의 표출이며 자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믿음은 인간의 존엄성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그 빛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개벽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희생을 터전으로 삼아 이땅에서는 근대의 여명이 밝아왔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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