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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 개혁과 정화를 추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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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149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 - 개혁과 정화를 추구하며

 

 

그리스도는 잠들어 계시고

 

교황 레오 3세가 칼 대제(샤를 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았지만, 프랑크 왕국의 몰락과 함께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은 독일지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부족 대공령(大公領)의 합성체라는 구도 속에서 탄탄한 왕권을 확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오토 1세는 교회를 국가 통일의 지주로 삼아 제국교회 정책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주교를 봉건영주로 삼아 국가 통치의 주요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특히 하인리히 3세는 교회 개혁 운동을 주도하며 교황권 확립에 공헌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융성기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전제로 하여, 세속의 권력다툼에 성직자들이 휩쓸려드는 교회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주교 임명이 일종의 성직매매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를테면 영주들 사이에서 주교좌성당을 사고파는 것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교황권 또한 황제나 로마 귀족들이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교회라는 배 안에 그리스도께서 잠들어 계시는 시대였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각성에서 각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세계 공의회들은 물론 여러 차례의 지역 공의회에서도 이미 평신도(세속 권력)의 성직자 서임을 단죄하였다. 성속의 이러한 대립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저 유명한 카노사 굴욕 사건(1077년)이었다.

 

 

서임권 투쟁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년 재위) 성인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주교 선출에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황제는 보름스에 주교들을 불러 모아 제국의회를 열고 교황을 폐위시킨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교황도 황제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제후들과 주교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황제에 대한 교황의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새 황제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새 황제 선출을 주재하러 독일로 가는 도중에 카노사 성에 머물렀다. 황제의 자리를 지키려는 하인리히 4세는 참회자로서 사흘 동안을 꼬박 맨발로 눈 속에 서있었다. 교황은 마침내 그를 사면해 주었다. 황제가 다음 공의회에 출두하여 그 결정에 따른다는 조건이었다.

 

독일 제후들은 루돌프를 새 황제로 선출하였다. 교황은 중립을 지켰지만 양편에서는 불만이었다. 양측이 모두 공의회 소집을 방해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무력으로 새황제 루돌프를 패퇴시키고, 성직매매로 파문당한 라벤나의 대주교를 대립 교황으로 뽑아 클레멘스 3세로 내세우고, 로마로 진군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축출하였다.

 

바닷가 살레르노 성에서 숨을 거두며,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죽는다.”

 

수도자 알도브란도(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의 시종으로서 그가 쾰른으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모셨다. 그 뒤로 여러 교황을 모시며 사도좌 재산 관리부터 시작하여 교황사절로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서 빚어지는 온갖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니콜라오 2세가 교황 선출에 대한 세속권력의 개입을 배제하고 그 선거권을 추기경단에만 부여한 것도, 거기에 대한 반발을 무마한 것도 알도브란도의 노력이 거둔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는 부제 추기경이 되고 로마 교회의 대부제가 되었으며 마침내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상서원장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교회와 수도원의 엄격한 개혁을 추구하며 성직자 기강 확립에 진력하였다.

 

알렉산데르 2세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신자들 사이에서 “알도브란도를 교황으로!”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온갖 만류와 고사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추기경회의에 ‘끌려가’ 민중의 함성 속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황제의 추인을 받은 다음에야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교황이 된 다음에 한 수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막중한 교황직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내며 교회의 불행을 이렇게 개탄한다.

 

“동방교회가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지금 온통 이교도의 공격을 받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거룩한 부르심과는 전혀 다르게 사는 주교들뿐이다. 자신의 야욕이나 이기심에 앞서 하느님의 영광을 내세우는 군주도 없다. 내가 늘 얘기해 왔지만, 나와 함께 사는 자들도 이교도보다 더 못하다.”

 

 

새로운 시대

 

이러한 전환기에서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정화를 힘겹게 추구해 온 결실이 제1차라테란 공의회에서 드러났다. 내란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이른바 서임권 투쟁을 단순히 황제와 교황의 권력 싸움만으로 보면 잘못이다. 그것은 세속 권력을 배제하는 정화를 통하여 교회의 자유를 얻으려는 개혁 운동이었다.

 

어떻든 내란은 보름스 협약(1122년)으로 수습되었다. 이 협약은 황제가 주교 서임권을 포기하여 주교와 수도원장 선출을 교회 자유에 맡기고, 영혼의 문제와 세속 사안을 분리하며, 영적인 권위는 오로지 교회에서만 나온다는 원칙을 인정한 것이다.

 

교황은 그해 12월에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듬해 3월에 로마 라테란 궁전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서방교회 거의 모든 지역에서 300명의 주교와 600여 명의 수도원장과 군주들이 참석한 공의회를 교황 갈리스토 2세가 직접 주재하여, 보름스 협약을 승인하였다.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공의회는 또한 22개 규정을 발표하였다. “거룩한 교부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사도좌의 권위로 금전을 통한 서품이나 승품을 금지한다”(1항). “사제, 부제, 차부제가 여자와 동거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한다”(3항). “평신도는 수도자라 하더라도 교회 재산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영주나 평신도가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거나 가로채면 신성모독이다”(4항).

 

1054년 동서 교회의 공식적인 분열 이후, 세계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서방교회 전통은 독자적으로 이 공의회부터 세계 공의회로 인정해 왔다.

 

[경향잡지, 2007년 11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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