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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혼인성사 - 결혼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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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14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혼인성사 (2) 결혼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라

 

 

전근대 우리나라 양반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문의 미래와 관련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혼인은 당사자의 의견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으며, 양반가문의 과부는 재가를 할 수 없도록 강제당하였다. 천주교 신앙이 전래되기 시작하던 19세기 전후 우리나라 상층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강제력으로 결혼이 이루어지거나 금지되었다. 물론 19세기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양반집 과부들의 재혼사례가 증가하였고, 평민출신 과부의 개가는 사실상 묵인되던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규범은 초혼이나 재혼을 가리지 않고 결혼에서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결혼

 

19세기 조선에 들어왔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의 결혼 관행을 관찰했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결혼할 때 결혼 당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 현상을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면 그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그들의 취미는 상관하지도 않고, 또 흔히 그들이 싫어하는데도 정혼을 하고 결혼을 시킨다. 쌍방에서 염두에 두는 것은 다만 한 가지, 두 집안의 지체와 지위가 어울리겠느냐 어떠냐 하는 것뿐이다. 장래 부부될 사람들의 재능이나 성격, 신체적 장점이나 결점, 상호 간의 혐오 같은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물론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부모가 자신의 배필을 정해주는 일에 별다른 이의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풍속이 점차 바뀌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도 변해갔고, “춘향전”과 같은 소설을 통해서 그 변화된 감정이 노출되기도 했다.

 

한편 교회는 전통적으로 결혼에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왔다. 그리고 ‘결혼장애’ 또는 ‘혼배조당’에 관한 규정을 두어 억지 결혼을 무효화하였다. 1857년 베르뇌 주교는 결혼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부모들에게 명하고 있다. “성교회 법에 자식을 강박하거나 모르게 정혼을 못 하느니, 부모가 그 뜻을 통한즉 착한 자식이 자연히 따를 것이다. 혹 별고가 있거든 부모께 고하여 한가지로 의론하여 할 것이니라.” 여기에서 그는 자식 모르게 정혼하거나 억지로 강박하여 결혼시킬 수 없음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결혼 문제는 부모가 자식과 충분히 상의해야 하고, 자식의 경우에도 특별히 의도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부모와 함께 상의해야 함을 강조했다.

 

결혼할 때 당사자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태도는 각종 교리서나 양심 성찰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곧 1864년에 간행된 “성찰기략”에서는 자식에게 알리지 않고 혼인 상대자를 정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박해시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서”에는 결혼을 하는 데 교회법으로 금지하는 13개 조항의 ‘혼배조당’을 제시한다. 이 조당 가운데 여섯 번째 조항이 ‘핍박조당’이다. 이는 결혼을 하도록 위협하거나 강요하고 꾸짖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다.

 

이에 따라 신자들이 자식을 결혼시킬 때에 연고 없이 강박하는 일은 대죄로 규정되었다. 결혼을 강박하는 일을 대죄로 규정한 까닭은 “천주께서 혼인을 세우실 때 사람이 원함과 원치 아니함을 각각 자기 의향대로 하고 다른 사람의 강제함을 허락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서 결혼할 때에 당사자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당시 교회에서는 결혼 당사자의 동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회적 교육을 통해서만 강조하지는 않았다. 조선교구의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 이하 그의 후배 주교들은 결혼을 할 때에 당사자의 동의가 중요함을 계속해서 강조해야 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사회의 관습대로 신자들이 자식의 동의를 받지 않고 결혼을 추진하는 일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1884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반포한 “조선교회 지도서”에도 결혼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조항이 거듭 수록되어야 했다.

 

 

과부들의 재혼

 

결혼에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본 것은 과부들이 재혼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양반 사회에서는 과부의 재혼을 금기시하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일반 서민층의 경우 과부의 재가가 일반적 현상이었다 하더라도 이를 당연하고 떳떳한 일로까지는 내세우지 못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 전근대 사회에서 과부의 재가는 사회적 강제력으로 억압당해 왔다. 과부의 개가를 금지하는 관행은 양반 중심의 조선왕조 사회를 계속해서 유지시키려는 데서 나온 전근대적 발상의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는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관습에 과감히 도전했다.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조선과는 다른 사회배경에서 그와 같은 관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조선의 신자들도 과부 개가를 금지하는 이 관행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게 되었다. 그 대표 사례를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부들은 비록 결혼한 지 단 하루 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수절을 해야 합니다. 개가를 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과 가족에게 불명예의 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들도 같은 예절을 지켜야 하며 별로 자유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과부의 개가를 금하는 당시 조선의 관행을 비판했다. 그는 이미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한쪽 배우자가 죽으면 결혼 계약이 해지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1857년 베르뇌 주교의 사목서한에도 과부의 개가 문제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베르뇌는 “과부 된 사람이 개가하지 아니하는 것은 원래 이 나라 풍속이 아니라 새로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성교회 규구가 아니니, 여러 번 영육에 크게 해로운 것이라. 과부 된 사람이 그 풍속을 좇지 말고 다만 영육의 이익을 돌아보아 원의대로 개가하기를 권하고 권하노라. 친정이나 시집이나 조금도 말리지 못할 것이니, 누구와도 의논하지 말고, 혹 말로나 특별한 방법으로 말리려 하면 양심에도 걸리고 벌도 면하지 못할 줄로 알리라.”고 선언했다.

 

한편 1884년 9월에 제정되어 반포된 “조선교회 지도서”에서도 “아이가 없는 젊은 과부는 타락한 남자들의 노림수에 늘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재가하기를 명한다. 이에 부모나 시부모가 이유 없이 또는 소위 체면 - 이는 마귀가 만들어낸 것임 - 을 핑계로 하여 반대한다면 이들은 처벌받아야 한다.”라고 수록했다.

 

당시 교회는 과부의 개가를 금지하는 일은 원래 조선의 풍속이 아님을 말하면서, 과부의 개가는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하고 떳떳한 일임을 강조했다. 특히 과부의 개가를 막는 일은 범죄행위로 규정지으며 이를 금지했고, 아기가 없는 젊은 과부들은 반드시 재혼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남은 말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초혼이거나 과부가 재혼할 경우를 가리지 않고 결혼할 때 당사자의 의사가 중요함을 수시로 강조했다. 당시의 교회가 이를 강조한 까닭은 하느님이 결혼 제도를 세우실 때 당사자의 동의를 존중하도록 했다고 가르치셨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박해시대 교회는 신분이나 사회관습을 떠나 본인의 판단에 따라 결혼을 하여야 함을 강조했다.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일은 여성들 특히 과부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이는 당시 양반가문 중심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으로 사회적 강제력을 가진 잘못된 규범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누가 과부의 재혼을 막는 이를 단죄하고 나무랄 수 있었는가? 그 용기는 하느님이 결혼제도를 만들었으며, 결혼 당사자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천주학쟁이들의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과부의 개가는 양반이나 천인을 논하지 않고 자기의 의사에 맡긴다.”는 개혁안을 만드는 데 보이지 않는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었고, 우리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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