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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혼인성사 - 결혼의 새로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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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14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혼인성사 (1) 결혼의 새로운 의미

 

 

예나 지금이나 세례 받은 남녀 신자들은 주례사제와 두 증인 앞에서 전례거행을 통해서 일생을 부부로 함께 지낼 것을 하느님께 서약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1866년에 순교한 베르뇌 주교는 결혼을 ‘세속에서는 대사(大事)요, 교우에게는 성사’임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해 주었다. 이 가르침은 당시 조선 전통사회의 관행과 사뭇 다른 내용을 드러내었다.

 

 

우리나라의 결혼 관행

 

오늘날 결혼은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가운데 중요한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관철되던 우리나라 전근대 사회에서 결혼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갖지 않았다. 고대의 기록인 예기(禮記)를 보면 ‘예’(禮)는 윗사람들의 일이었지 아랫것들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경우에도 혼인은 주로 양반을 비롯한 지배층에서 논의되던 윤리나 의례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역사를 보면 결혼과 관련된 많은 기록이 나온다. 그 역사 가운데 고려시대의 결혼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으나 사실은 일부다처제가 시행되어 왔다. 고려의 여성은 대체로 15-16세에 혼인했고, 남자는 평균 20세를 넘어 장가를 갔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조선왕조 때에 이르러서는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 이상이면 혼인할 수 있도록 법규에 규정했다. 물론 그들의 실제 결혼연령은 이 법규의 규정보다 조금 늦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왕조는 신분을 뛰어넘어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양반이라 하더라도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못했으며[同姓不婚], 부모를 여의었을 경우 상중에는 혼인하지 않았다. 또한 사족(士族)의 과부는 재가할 수 없었다. 물론 사대부는 처가 죽은 후 3년 안에는 재혼하지 말도록 규정되었지만, 실제로는 1년 후에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부다처를 공인하면서도 처와 첩을 엄격히 구별하고, 그 소생자인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였다. 당시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은 결혼의 목적을 가문의 계승에 두었기 때문에 혼인관계 법제를 이처럼 대폭 강화시켰다.

 

천주교 신앙이 조선에 전파되던 18세기 말엽 이후 조선왕조 사회에서는 신분제도에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분제도의 변동은 당연히 결혼제도의 변동을 수반하였다. 물론 천주교회가 세워지던 당시 조선의 신자들은 천주교의 혼인성사에 대한 규정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혼인교리에 대한 가르침은 1790년대 중엽 주문모 신부의 선교 과정에서 비로소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혼인교리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른 새로운 인간상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으며, 또한 박해시대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고 강인하게 결속시키는 원리로 작용하였다. 그들의 혼인에 대한 생각은 당시 전통 조선사회와 차별성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혼인성사에 대한 가르침

 

결혼에 대한 박해시대 교회의 기본 태도는 요한복음의 카나의 혼인잔치 내용을 설명하는 “성경직해”를 통해서 드러난다. 곧 “천주 친히 이 의례를 세우셨음”을 먼저 강조하였다. 그리고 “오주 예수께서 친히 혼인잔치에 가심은 이 의례가 천주께서 세우셨음을 드러내시어 의심치 못하게 한 일”로 평가했다. 박해시대 우리나라의 대표적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에서도 혼인을 “예수께서 친히 명하신 성사이니 바른 지아비와 바른 안해에게 성총을 태워주어 종신토록 화목하게 하고 자식을 타당이 가르치고 기르게 하는” 성사로 규정했다.

 

또한 17세기 중국에서 간행되어 박해시대 조선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읽히던 “성교요리서”에서는 결혼이 가능한 연령으로는 남자 15세, 여자 13세 이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결혼은 “개벽하신 처음에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배의 정결함을 회복하시어 성사를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천주교 신자들에게 결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제도이며, 예수께서 세우신 ‘성사’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결혼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교회는 남녀를 낳아서 기르고 가르쳐 영신을 이롭게 하고 죽은 후에 천당에 올라가 천주를 찬양하게 하는 데 혼인성사의 첫 번째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이어서 “부부가 서로 돌보고 돕는 뜻이 있음”을 두 번째 목적으로 제시해 주었다. 이처럼 결혼의 목적이 자녀의 출산과 교육 그리고 부부의 사랑으로 집약되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처럼 결혼의 목적에는 ‘가문의 계승’과 같은 조선 지배층의 전통적 가치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또한 혼인성사의 주체가 남편과 여편임을 말하면서, 가족의 중심축을 전통적인 부자관계에서 부부관계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결혼한 다음 장부는 안해를 “너그러이 용서하며 화평하고, 사랑하며 충성되며, 돌아보아 기르며, 착한 표양으로 대접할지니라.”고 말했다.

 

한편 박해시대인 1864년 서울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던 “성찰기략”이 있다. 고해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양심성찰을 유도하던 이 책에서는 부부들의 삶과 관련된 여러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곧 천주십계 중 제4계에 대한 성찰에서 부부는 서로 미워하거나 불목했던 일, 집안의 괴로움을 서로 참지 아니하고 분한 마음을 품는 일, 부부가 서로 원망하거나 욕한 일, 부부가 서로 뜻을 맞추기로 힘쓰지 않는 일 등을 함께 성찰하도록 했다. 그리고 안해에게는 가장의 바른 명을 듣지 아니한 일, 가장의 옳지 않은 명을 들은 일, 가장을 없이 여기거나 그 과실을 전파시킨 일 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성찰기략” 중 천주십계의 제6계와 제9계에 대한 조항에서는 먼저 “남녀노소와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러 조항에서 남녀가 사음에 빠지는 것을 극히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첩 얻기를 원한 일, 남을 권해서 첩을 얻게 한 일, 남의 안해나 장부를 원한 일 등에 관한 성찰을 촉구하였다.

 

 

남은 말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엄격히 금지하고, 결혼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진행되는 강제 결혼은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신자들 사이의 결혼을 강조하며, “차라리 죽을지언정 외교인과 혼배하지 말아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리고 교회는 결혼한 상대자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결혼의 ‘불가해소성’도 일깨워주었다. 교회는 이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특별교육을 했다. 베르뇌 주교는 “요긴한 경문과 삼본문답을 배우지 아니한 자에게는 혼배를 금한다.”고 하였다.

 

원칙적으로 혼인성사는 사제가 주례를 서야 했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특수사정으로 사제를 30일 이상 만나지 못했거나, 사제가 있는 곳이 결혼할 신부가 거주하는 데에서 20리 이상 떨어져 있을 경우에는 공소 회장이 혼배를 주관하도록 했다. 물론 회장은 사제가 공소를 방문할 때에 혼배에 관한 사항을 별도로 보고하고 혼배한 부부들이 사제의 보례를 받게 했다.

 

이와 같은 조항을 살펴보면, 혼인과 관련된 부부간의 쌍무적 의무와 그 불가해소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자들은 결혼이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신성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갔다. 천주교 신자들은 새로운 결혼관을 통해서 남존여비 관념을 청산해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가치를 결혼을 통해서 실천해 갔고, 사회에서 이 새로운 가르침을 증언하였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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