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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교황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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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143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교황의 두 얼굴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년) 이전부터 단성설에 따른 교회분열을 치유하려는 온갖 노력은 다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단성설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된 뒤에는 인성만이 존재한다는 유설로까지 변형되어 기승을 부렸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단성설 이단자들을 제국 교회와 화해시키려는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제국의 강화를 염원하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지만 세르기우스의 모호한 타협책은 참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단성설의 경향을 그리스도의 행위와 의지로 전환시켰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행동 원리[單活說]와 하나의 의지[單意說]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타협

 

세르기우스는 교회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표현들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교황 호노리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스 신학과 이 문제의 논점을 잘 알지 못한 교황은 세르기우스에게 보내는 개인 서한에서 ‘하나의 의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논쟁을 일으키는 표현들을 사용하지 말자고 동조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과오에 힘을 얻은 세르기우스는 단의설을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낸 중재 안을 제시하여, 세베루스파 등 일부 온건한 이단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를 제국법으로 공포하였다. 호노리오 교황도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도 죽은 뒤였다. 황제 콘스탄스 2세는 648년에 다시 칙령을 내려 이단자를 포함한 모든 이의 평화공존을 주창하였으나, 실제로는 전통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 등 칼케돈 공의회의 정통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 특히 서방교회에서는 단의설을 배척하고 이단을 재생시키는 이 제국법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정통 교리를 지키는 순교

 

마르티노 1세가 649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교황사절로서 단의설을 주장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의 해임을 모색하기도 했다. 황도의 사정을 잘 알던 그는 선출되자마자 황제의 추인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교황으로 즉위하여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지방의 주교 105명이 모인 이 공의회는 단의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 공의회는 세계 공의회는 아니었지만 그 규정들은 교황의 권위를 통하여 신앙규범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공의회는 칼케돈 신경을 되풀이하며,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의지와 활동에 대한 신앙 진술을 덧붙였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오류를 단죄하는 20개 규정을 공포하였다.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이 공의회가 열리고 있을 때 대리인을 보내 자신의 주장을 반영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653년에 마르티노 1세 교황을 반역자로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데려다 놓고 온갖 모욕과 고문을 하였으나, 교황은 끝까지 정통 교리를 지켰다. 교황은 북해 크림 반도에 있는 케르손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우리는 해마다 4월 13일에 그를 순교 성인으로 기념한다. 그리스 성무일도는 성인을 그르칠 수 없는 신앙의 스승이라고 찬미한다. 콘스탄스 2세는 폭정 끝에 자기 시종장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의지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4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제국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황제는 교황 아가토의 동의를 얻어 680년 11월 7일부터 681년 9월 16일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여섯 번째 세계 공의회를 열었다.

 

교황은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그리스도에게 두 의지와 두 행위가 있다는 참 교리를 설명하였다. 이 서한과 로마 시노드의 서한이 공의회에서 낭독되었다. 마지막 회기에서 단의설을 단죄하는 신앙고백문을 승인하였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본성적 원의 또는 의지와 두 가지 타고난 행위가 나뉘지도 바뀌지도 갈리지도 섞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다.

 

… 우리는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동일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뉘지도 바뀌지도 갈리지도 섞이지도 아니 하는 두 가지 본성적 행위, 곧 신적 행위와 인간적 행위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선포한다.

 

…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 후에도 성삼위의 한 분으로서 우리의 참 하느님이심을 믿으며, 그분의 두 본성이 그분의 한 위격 안에서 빛을 발한다고 말하는 바이다.”

 

 

호노리오 문제

 

이듬해에 교황 레오 2세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에게 서한을 보내, 단의설을 주장하는 이단자들과 교황 호노리오 1세에 대한 제3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

 

“우리는 거룩하고 위대한 보편 공의회(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거룩한 사도좌를 중심으로 모인 보편 공의회(680년, 로마 시노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우리와 일치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단적 교리를 조장하게 된 전임자 호노리오 교황의 경솔함도 비판하였다. “호노리오는 사도전승의 가르침으로 사도 교회를 정화하기보다 죄에 물들지 않은 교회가 불경한 배반으로 훼손되도록 허용하였다.”

 

호노리오 문제는 교황의 무류성과 관련하여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개인 서한을 교좌 선언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경향잡지, 2007년 8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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