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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세속의 권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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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141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세속의 권력 앞에서

 

 

동서방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그 어느 한 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주장들에서, 칼케돈 공의회는 중도를 걸었다. 인성을 강조하던 네스토리우스주의도 신성만을 역설하던 단성설도 이단이라는 심판을 받았다. 그래도 교리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단성설을 주장하던 자들이 득세를 하여 많은 주교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들의 저항을 잠재우려고 절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페르시아(사산 왕조)의 위협이 점증하는 가운데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여서, 제국 내부의 교리 논쟁에 따른 혼란을 막아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제노 황제는 482년에 이른바 ‘헤노티콘’이라는 일치령(Act of Union)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교황이나 공의회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 충실한 정통파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정통파를 화해시키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가 만들어낸 ‘일치 정식’이었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양측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모든 교회 지도자가 교회 문제에 대한 황제의 공공연한 명령을 비난하였다. 교황 펠릭스 3세는 2년 뒤 아카키우스를 파문하고 동방교회와 교류를 끊어버렸다. 동서방 교회가 분열되고 만것이다.

 

황제 유스티누스 1세가 519년에 교황의 아카키우스 파문을 인정하여 겉으로는 교회 일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더욱 깊어갔다.

 

 

제국의 재건을 위하여

 

제국의 재건자로 나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년)는 단성설을 반대하는 서방교회를 다독이려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황사절 비질리오를 교황좌에 앉혔다. 그러나 비질리오 교황도 칼케돈 공의회의 신조를 따랐다.

 

동서방 교회의 화해를 모색한다는 구실로 황제는 543년에 단성설에 호의를 보이는 칙령을 발표하여 이른바 ‘삼장서’(三章書)를 단죄하였다. 곧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 에데사의 이바스의 저술들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쳐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아직도 세력을 펼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장서의 단죄에 반대한 비질리오 교황은 심한 압박을 받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연금되었다. 교황은 나중에 이 삼장서 단죄에 동의하였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는 명백히 유지하였다.

 

서방에서는 황제의 조치에 불만이 끓어올랐다. 교회의 권위가 세속의 권력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고 만 것이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이미 심판하신 사람들, 곧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황제가 단죄한다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리스 신학의 미묘한 교리 논쟁에 어두운 서방교회에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 일치를 위하여

 

우여곡절 끝에 교황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문제를 해결하자고 황제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그리스 주교들은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551년에 삼장서를 단죄하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였다. 목숨까지 위협받던 교황은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던 에우페미아 성당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전말이 서방에도 알려질 즈음, 에우티키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가 되어, 동서방 교회의 화해를 모색하며, 삼장서에 대한 이전의 조치들을 취소하고 교황의 주재로 공의회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황제도 동의하였다.

 

교황은 서방 주교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나 시칠리아에서 공의회를 열자고 하였으나, 결국엔 황제의 뜻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교황은 참석을 거부하였다. 거의 동방에서 온 150명의 주교들이 553년 5월 5일부터 6월 2일까지 여덟 차례 회의를 열어 삼장서를 단죄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강요 아래서 서방교회의 중재로 마지못해 공의회의 삼장서 단죄를 인정하였다. 칼케돈 공의회 신조의 권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교리 규정은 아니라는 이유로, 이 공의회의 결정을 추인한 것이다.

 

교황의 추인으로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세계 공의회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서방교회에서 이 공의회의 결정에 대한 저항은 무려 700년경까지 이어졌다. 황제가 그렇게 바랐던, 단성설을 주장하던 사람들과도 화해를 하지 못하였다.

 

[경향잡지, 2007년 7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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