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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서품식 - 영원한 삶을 향한 기쁨과 현세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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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13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서품식

 

영원한 삶을 향한 기쁨과 현세의 순교

 

 

조선인 성직자의 서품식

 

박해시대 우리나라 교회에도 주교와 신부 등 성직자가 있었고, 이들은 우리 선조들의 믿음살이를 북돋아주었다. 그들은 오늘의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서품식을 통해서 신부가 되고 주교에 취임했다. 박해의 회오리 속에서도 교황청에서는 조선교구를 위해 봉사할 주교를 임명하고 서품했다. 조선의 주교들은 조선 신학생들을 교육했고 사제로 서품했다.

 

1845년 8월 17일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에 올벼가 익어가던 농촌마을 진쟈항(金家巷)의 성당에서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서품식이 열렸다. 김대건은 불과 4개월 전 현석문 등 11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조그마한 돛배 ‘라파엘 호’를 타고 제물포 항을 떠나서 황해를 비껴 질러 샹하이의 입구인 우쏭(吳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미 부제품에 올라있던 김대건은 난바다의 태풍을 뚫고 중국에 온그 배의 선장이었고, 조선교구의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맞으러 오는 길이었다.

 

김대건이 살았던 당시 중국의 진쟈항은 대도시 샹하이(上海)에서 30여 리쯤 떨어진 한적한 농촌이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샹하이 개발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떠오른 푸동 지구의 일부가 되어 지난날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곳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김씨 마을’이라는 뜻에서 진쟈항이란 땅이름이 생겨났다.

 

진쟈항에 살던 샹하이의 김씨들은 중국에 천주교가 다시 전래된 17세기 초엽에 천주교에 입교했고, 진쟈항은 일종의 교우촌으로 변모해 갔다. 이후 이 마을 출신 김씨들은 서씨(徐氏), 주씨(周氏), 육씨(陸氏) 등과 함께 샹하이 천주교회를 이끈 천주교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김씨 마을’에서 거행된 김대건의 서품식에는 먼저 난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함께 넘은 11명의 조선인들도 참여했으리라 짐작된다. 진쟈항의 신자들도 모여와서 잔치 분위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인 신부 1명과 서양인 신부 4명도 이 서품식에 참석하여 성품성사를 집전하던 페레올 주교에 이어서 성품 받는 김대건을 안수했다.

 

김대건은 성품 받은 다음 한 주일이 지난 8월 24일, 샹하이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던 헹탕(橫塘)의 소신학교에서 첫미사를 봉헌했다. 아마도 이 첫미사에는 중국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어린 소신학교 학생들이 함께 참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첫미사에는 앞으로 1주일 후 샹하이를 떠나 새 신부와 주교를 모시고 고국을 향해 거친 황해를 건너갈 조선의 어설픈 사공 11명도 자리를 함께했을 것이다. 이 서품식과 첫미사는 박해받는 조선교회의 신자들이 경험했던 첫 서품식이었으며, 감격스런 잔치였음에 틀림없다.

 

김대건에 이어서 우리 교회사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의 서품식은 1849년 부활대축일 다음 주일 샹하이에서 거행되었다. 그에게 안수한 이는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였다. 사제 서품은 이들의 개인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김대건도 최양업도 자신의 수품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스승인 리브와 신부, 르그레주와 신부에게 수품에 관한 자신들의 감상을 말했을 듯하다. 그러나 스승선교사들이 남긴 자료에서도 김대건이나 최양업이 수품 전후에 전했을 마음가짐에 대한 글을 찾을 수 없다. 그들 앞에는 죽음을 무릅쓴 선교와 처절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아마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가장 큰 결심만을 스승에게 전했을 것이다.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

 

조선교구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맡아 선교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제1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서 박해시대 때에 여섯 분의 주교를 배출했다. 이들 가운데 세 명은 순교했고, 나머지 세 명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주교 서품에 임하여 자신의 결심을 담은 글을 남겼고, 그들의 서품식과 주교 취임에 관한 자료들도 전해진다. 한 예를 들면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조선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회답의 편지를 보냈다. 페레올 주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결심을 쓰고 있다.

 

“그 많은 순교자의 피가 헛되게 흐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피는 우리 늙은 유럽을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이 젊은 땅에서도 새로운 신자들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 우리는 가서 비통에 빠진 이 백성을 위로해 주고, 헤아릴 수 없이 큰 박해의 피해를 우리 힘이 미치는 데까지 회복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빽빽한 숲 속으로 들어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며, 그들과 같이 땅굴 속에 숨어 들어가 거룩한 제사를 드리겠고, 그들과 고뇌의 빵을 나누어 먹겠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품에 유럽 형제들이 보내준 자선의 희사와, 특히 천주의 인자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신의 축복을 쏟아놓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피가 그들의 구원에 필요하다면 천주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망나니의 도끼 밑에 머리를 숙이러 가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주교 수품이 순교와 직결되리라 생각하며 이 비장한 편지를 교황께 보냈다. 한편 다블뤼 신부는 베르뇌 주교에게 교구장 계승권을 가진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의 주교 서품식은 조선 땅에서 열린 첫 서품식이었다. 이 서품식의 광경을 다블뤼 주교는 그의 동료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다.

 

“서품식 날은(1857년)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로 정해졌습니다. 이 전례에 메스트르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모였습니다. 전례는 주교 댁에서 밤중에 서울의 회장들과 몇 명 안 되는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장소도 그렇고 비밀도 지켜야 했으므로 화려하게는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거의 카타콤에서 하던 식이었습니다.

 

우리 신자 모두의 원을 채워주지 못해서 우리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들 생전에 한 번밖에 없을 이런 종류의 전례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슬퍼하고 있습니다. … 사실 그렇게도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밑거름이 된 이땅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 순교자들의 땅인 조선이 그리스도교국이 되리라고 의심치 않으며, 이 점은 내가 겪고 있는 낙담 속에서 나를 위로해 줍니다.”

 

 

남은 말

 

박해시대 서품식은 영원한 삶을 향한 기쁨과 현세의 순교라는 각오가 겹쳐 진행되던 특이한 행사였다. 조선의 교구장을 서품하면서 새 주교에게 안수하고 서품기도를 바치던 동료 주교들도 이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새 신부를 서품하던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등도 자신이 서품한 사제가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죽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초라한 서품식에서 자신이 서품한 이들이 잘 죽을 수 있기를 기도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서품은 기쁘고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교회의 초석을 놓는 일이었다. 새 수품자들은 복음을 전하고자 인고에 찬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마 오늘날의 수품자들에게도 박해시대의 그 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어, 새 사제들은 그 선조들의 후예답게 살겠다는 결심을 다질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의 서품식도 축하할 만한 소중한 잔치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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