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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 5000km 대장정11: 연길대수도원, 연길하시 · 상시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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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9-16 ㅣ No.134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 (11) 연길대수도원, 연길하시 · 상시본당


험난한 세월 이겨내고 신앙공동체 재건한 연길의 힘

 

 

연길하시 · 상시본당 위치도.

 

 

국자가(局子街, 쥐쯔지에)에 들어섰다. 현 연길(延吉, 옌지)시 중심가이자 옛 이름인 국자가는 높게 솟아오른 빌딩 숲 사이로 8차선 도로가 훤히 뚫려 번창하는 연길의 오늘을 압축한다. 그 한복판에 '연길교구의 심장' 성 베네딕도회 연길 성 십자가 대수도원이 자리했었다. 이젠 호텔로, 주택밀집지로 변모한 시가지에서 수도원의 옛 숨결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연길대수도원과 연길하시(延吉下市, 옌지씨아쓰) · 연길상시(延吉上市, 옌지썅쓰) 본당을 찾는다.

 

 

1979년 중국 개혁개방 직후 재건된 연길본당

 

연길본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한 후 최기순(수산나, 83)씨를 만났다. '간도 12사도' 중 한 사람인 지유현(타대오)의 셋째 며느리다.

 

지유현은 간도교회 첫 공소 대교동(大敎洞, 따쵸우둥)공소 회장이자 용정 삼애학교 설립 주역이며 간도교회 첫 본당 용정하시(龍井下市, 룽징씨아쓰)본당 회장을 지냈다. 그의 며느리인 최 할머니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오고 있었다. 1979년 중국이 개혁ㆍ개방되자 이듬해 연길에서 조선인 신자 5명과 공동체를 꾸렸고, 1995년까지 16년간 회장직을 맡아 연길본당 재건에 앞장섰다.

 

공동체 재건에는 물론 눈물과 기도가 뒤따랐다. 1983년 수도원과 두 성당을 되돌려달라고 주정부 청사 복도에서 농성하던 얘기, 어렵게 정부에서 제공받은 현 부지에 보상금 57만 위안을 들여 성당을 신축한 사연 등 결코 녹록지만은 않았을 연길교회사 일면을 전해준다.

 

-  지난 5월 연길본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연길본당 조선인 신자들. 연길본당에선 주일 오전 미사 두 대를 중국인 미사와 조선인 미사로 나눠 봉헌하고 있다.

 

 

"1943년에 시집을 오니 시가는 고통스럽게 살고 있더군요. 1930년대 초 일제에 쫓겨 연해주로 피신했던 시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시가 5남매 중 나그네(남편)를 포함해 두 아들은 집에서 놀고 있었어요. 시어머니 삯바느질로 연명했지요. 남은 것이라곤 시아버지가 간도 선교 40주년이던 1936년에 연길교구에서 받은 12사도 기념메달과 회중시계가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으로 그 엄혹한 세월을 살아냈습니다. 이제 그 신앙 만큼은 대대로 물려줘야지요."

 

이처럼 열심한 신앙이 씨앗이 돼 재건된 연길본당(주임 염창원 신부)은 올해로 공동체 재건 28주년을 맞고 있다. 1986년 연길시 태평가 태안골목 6의11 연변대 의대 근처 2314㎡(700평) 부지에 건축연면적 661㎡(200평) 규모로 재건된 연길성당은 이제 신자 수 500여 명 공동체로 자라났다.

 

 

'연길교구의 본산' 연길대수도원과 연길하시본당

 

연길본당 신자들과 함께 연길대수도원과 연길하시주교좌본당 터를 찾아나섰다. 간도교회의 뜨거운 피가 맥동하던 현장은 연길시 인민로 183호 덕명(德銘, 더밍)호텔과 그 인근 구역이다.

 

연길 성 십자가 대수도원(왼쪽)과 연길하시성당 전경. 전형적 독일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수도원으로, 이 안에 주교관과 교구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연길하시성당은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제지로 종탑을 크게 올리지 못하고 지붕과 같은 높이로 지어졌다.

 

 

물론 옛 수도원과 성당의 자취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진학소학 맞은편 연길대수도원과 연길하시본당, 연길교구청 겸 주교관, 연길 성 십자가수녀원(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전신) 등 교회 건축물 9채는 다 사라졌다. 현 인민로에 있던 주교좌성당은 허물어진 지 오래고, 해방 뒤 군이 주둔했던 수도원과 주교관은 호텔이 됐으며, 수녀원은 층집(연동로 22호)으로 재개발됐다.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 수도자들이 일구던 텃밭은 주택단지와 상가가 점령했다. 1922년부터 25년간 연길교구 복음화의 요람이 된 현장은 아련한 향수만을 전해줄 뿐이다.

 

연길대수도원과 연길하시본당을 거론하면서, 초대 연길지목구장 브레허(T. Breher, 1889~1950) 주교를 빼놓을 수 없다. 1922년 12월 연길본당(1932년 이후 연길하시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브레허 주교는 조선인들에겐 잊을 수 없는 선교사였다. 베를린대 출신 중국학 박사로,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샨스크리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등 9개 국 언어에 능통했던 학자 주교였던 그는 흩어진 조선인 신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이뤄낸 '간도의 영원한 목자'였다.

 

특히 1928년 초대 연길지목구장에 착좌한 그는 1932년 연길대수도원과 교구청, 연길하시주교좌성당을 신축했고, 1931년 11월 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의 도움으로 진료소와 시약소를 개설했다. 간도 전역에서 9개 해성학교를 통해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연길대수도원이 있던 자리엔 현재 덕명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호텔 오른쪽 대로와 인도에 연길하시성당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25년간 연길지목구(대목구도 포함)를 개척한 브레허 주교는 1946년 5월 만주를 장악한 중국군에 연길하시성당과 수도원, 부속건물을 몰수당하며 연길교구와 운명을 같이한다. 남평(南坪, 난핑)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지병인 심장병과 당뇨병이 악화돼 폐렴 증세까지 보인 그는 1948년 이듬해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추방돼 1950년 초 모국 독일로 돌아가 그해 11월 하느님 품에 안긴다.

 

 

연길 조선인들의 마음의 고향 연길상시본당

 

1932년 연길상시본당 설정 역시 브레허 주교의 결단에 의해서였다. 당시 조선인 밀집지역이던 연길 상시에 조선인을 위한 본당과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한 브레허 주교는 그해 퀴겔겐(C. Kuegelgen) 신부를 초대 주임에 임명, 연길에 두 번째 본당을 설립한다.

 

퀴겔겐 신부는 1933년 성당과 해성학교를 설립하고, 연길 성 십자가수녀회 분원을 마련해 본당 발전의 기초를 놓는다. 그 결과 1936년 신자 수가 997명(5개 공소 신자 포함)에 이르렀다. 1939년 부임한 아펠만(A. Appelmann) 신부도 전임 신부가 벌인 사업을 이어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고, 소년회와 데레사회, 체칠리아 처녀회 등 각종 단체를 구성하고 활성화했다. 하지만 이 본당 역시 1946년 중국측에 성당을 비롯한 교회재산을 몰수당하고 폐쇄된다.

 

연길상시본당은 현재 신흥소학이 자리한 연길시 신흥가 933호다. 부지만 1만3270㎡(4014평)에 학생 수 1220명, 교사 120명에 이르는 신흥소학은 학교측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개교했다고 돼있지만, 사실은 연길상시본당과 해성학교가 모태다. 현재 학교 운동장 맞은편 건물이 성당과 해성학교 건물이 맞닿아 있던 자리이고, 왼쪽 학교 건물이 사제관이 있던 자리다.

 

신정숙(소화 데레사, 78) 할머니는 "개혁 · 개방 이후 연길상시성당을 되돌려달라고 주정부 청사를 발이 닳도록 다녔는데, 결국 학교가 들어서 있어 반환을 받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평화신문, 2008년 9월 7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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