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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 5000km 대장정9: 무단쟝, 자무쓰, 푸진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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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8-23 ㅣ No.131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 (9) 무단쟝, 자무쓰, 푸진본당

 

90년 전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누빈 그곳으로

 

 

무단쟝ㆍ자무쓰ㆍ푸진본당 위치 지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순교복자 79위 시복을 한 해 앞둔 1924년 홍콩대표부에서 발간한 「한국 가톨릭(Le Cathelicisme en COREE)」에 실린 한국천주교회 관할 지도에 의란선교지 본당 위치를 그려넣었다.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가는 길은 멀다. 무단쟝(木丹江)에서 침대열차편으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지는 평원 '베이따황(北大荒)'을 가로질렀다. 밤새 딱딱한 3층 침대칸 잉워(硬臥)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다보니 베이따황의 해돋이를 감동적으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1920년대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누빈 선교지로 향하는 마음은 설레었다. 이번 호에선 의란(依蘭, 이란)선교지에 설립된 무단쟝 조선인ㆍ중국인 본당과 자무쓰(佳木斯)본당, 푸진(富錦)본당 등을 돌아본다.

 

 

발해의 옛 터전 무단쟝 통고의 어머니 본당, 사도 바오로본당

 

왕청(汪淸, 왕칭)현을 지나 라오숭링(老松嶺) 정상에 오르자 헤이룽장성 이정표가 나타났다.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숨결이 살아 있는 닝안(寧安)시가 눈 앞이다. 겨레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고토를 그냥 지나치려니 아쉽다. 게다가 닝안은 1844년 2월 김대건 신부가 '경원개시(慶源開市)'를 통해 선교사 입국 통로를 개척하고자 경유한 현장이어서 더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다.

 

그런데 닝안을 지나쳐 무단쟝시에 들어서자 '조선족 집중상업무역구'가 나타나 위로를 준다. 헤이룽장성에서 우리말로 표기된 상점을 보며 지나치니 반갑기만 하다. 무단쟝시 인구 260여 만 명 가운데 조선이주민은 13만 명으로, 그 중 1만3000여 명이 조선민족거리에 몰려 산다. 그 서장안가 구조로 248호에 1998년 9월 봉헌한 무단쟝 성 김대건본당(주임 조창쥔 신부, 趙長軍)이 있다. 지금은 조선족 150여 명과 중국인이 함께하는 공동체지만,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엔 조선인 본당과 중국인 본당이 각각 분리돼 있었다.

 

조선이주민 공동체였던 무단쟝 통고의 어머니본당은 현 무단쟝본당과 2㎞ 가량 떨어진 서안구 조선족거리2구 113호에 있었다. 팔도구(八道溝, 빠또꺼우) 출신인 조춘화(요셉, 59) 무단쟝본당 회장의 안내로 찾아간 옛 성당 터전은 층집(아파트)으로 뒤덮여있고, 그 사이 오토바이와 자전거 주차시설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그 뒷쪽은 해성학교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중국이 개혁ㆍ개방되면서 이명근(토마스) 전 무단쟝시 천주교 상무위원 등 해성학교 동문들이 시 인민정부 측에 군 방산(防産)시설로 쓰던 성당과 학교 건물 2500㎡(성당 600㎡)를 돌려줄 것을 탄원했지만, 시 당국은 1991년 성당과 부속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터에 층집을 지었다.

 

1935년 12월에 건립한 조선이주민 공동체 보금자리인 옛 무단쟝 통고의 어머니성당. 사진 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래 이 성당은 1935년 12월 세워져 1951년 연길대수도원 출신 최영호 수사신부가 연길로 되돌아가기까지 16년간 지역 선교 첨병이 됐다. 한때는 신자 수가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활력이 넘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교세가 400여 명에 그치고 있다. 조선 공동체의 활력은 중국인들도 인정을 하는 터다.

 

반면 중국인 공동체였던 무단쟝 사도 바오로성당은 현재 무단쟝시 동장안가 동일조로 이슬람교 사원 청진사(淸眞寺) 옆 동안시장 인근 7층짜리 주상복합건물 터(1800㎡)와 그 앞 도로에 있었다. 1938년에 신축된 734㎡ 규모 중국인성당은 1948년 9월에 폐쇄됐으며,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 때까지 잔존하다 파괴돼 현재는 무단쟝본당에 통합돼 있다.

 

중국인공동체(회장 두밍더, 都明德)는 그래서 서안구 임해로에 600㎡ 규모 성당을 신축 중이지만, 설계가 잘못돼 거의 다 지어놓고도 언제 성당을 봉헌할지 요원한 상태다.

 

 

성 베네딕도회가 개척한 자무쓰, 푸진본당

 

현재의 자무쓰성당. 오른쪽 뒷편 400m 지점에 옛 자무쓰성당 터가 층집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현 헤이룽장성 동부 의란선교지가 성 베네딕도회 관할에 놓여있던 시기는 1921년 이후 16년간이다. 1920년 8월 원산대목구 설정 이후 이듬해 3월 연길ㆍ의란선교지 관할권이 베이만츄(北滿州)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넘어오자 원산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주교는 기존 관할구역보다 3배나 큰 연길과 북만주 지역에 선교 역량을 집중한다. 1922년에는 푸진(富錦)시에 푸진본당을, 1927년 자무쓰(佳木斯)시에 자무쓰본당을 각각 설립한다. 푸진시에는 슈바인베르크(M. Schweinberg) 주임신부와 렌츠(P. Lenz) 보좌신부를 파견했고, 자무쓰시에는 렌츠 주임신부와 바이드너(R. Weidner) 보좌신부를 보냈다. 하지만 두 본당은 1935년 티롤의 카푸친회로 관할권이 넘어가 베네딕도회가 연길로 철수하며 원산대목구와 인연이 일찌감치 끊겼다.

 

그래도 교회사의 옛 터전을 살피고자 열차편으로 무단쟝에서 자무쓰를 향해 떠났다. 밤새 7시간 40분을 달려 새벽녘에 도착한 자무쓰시는 인구 48만 명 규모의 중소도시였다. 역전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천주교당으로 향했다. 무단쟝본당 전례담당 봉사자 손호(요셉, 44)씨와 함께 찾아간 현 자무쓰성당(주임 장쪼우후 신부, 張照富)은 자무쓰시 영안가 남단에 있다.

 

1998년 시로부터 520㎡ 규모 부지를 제공받아 지었다는 성당은 산뜻해 보였다. 옛 성당은 현 성당 뒷쪽 400m 아동식품공장 터에 있는데, 새 성당을 지을 때까지는 성당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동식품공장 건물 곁에 층집들이 세워져 옛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푸진시립박물관이 들어설 푸진성당 터전. 성당 곁에서 한 인부가 벽돌건물을 해머로 부수고 있고, 멀리 바라다보이는 푸진성당은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다시 자무쓰역으로 돌아가 버스를 타고 5시간 넘게 평원을 달려 푸진시에 도착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시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최북단 도시 푸진시에는 현재 신자 10여 명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다행히도 2400㎡ 규모 성당 건물이 푸진시 남2도가 서쪽 제3중학교 서쪽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1938년 1월에 세웠다는 성당은 1940년대 말 폐쇄돼 시 공산당사로 쓰다가 화학공장으로 쓰였다. 성당 종탑은 반쯤 파괴됐고 그 곁에 공장용 굴뚝이 세워져있다. 기와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고, 성당 창문도 벽돌로 꼭꼭 메워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카푸친회 수도자들이 살던 성당 옆 숙소는 이미 철거됐고, 옛 우물도 메워진 채 방치돼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준다.

 

올해 여든여덟 살의 류신무(劉彦武, 요셉) 전 푸진본당 총회장은 "푸진본당은 한동안 민가를 성당으로 쓰다가 1930년대 말 카푸친회가 상하이(上海)에서 성당 건립기금을 모금해 새 성당을 지었는데 중국 최북단성당이어서 자부심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조만간 푸진시립박물관으로 조성될 성당과 그 터를 바라보자니 취재진이 푸진성당을 찾은 마지막 방문객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평화신문, 2008년 8월 24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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