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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 5000km 대장정5: 팔도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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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7-04 ㅣ No.126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 (5) 팔도구본당


박해에도 지지 않은 신앙 열정, 연변 전역으로!

 

 

- 팔도구본당 위치도.

 

 

팔도구(八道溝, 빠또꺼우)는 '간도 신앙의 못자리'에 비유된다. 숱한 사제와 수도자 성소 발굴, 교우촌에서 비롯되는 끈끈한 결속력, 문화혁명을 이겨낸 단단한 믿음은 팔도구공동체를 간도교회 주추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래서 팔도구 신자들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간도 신자 가운데 80%는 팔도구 출신"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이번 호는 '간도의 로마'로 꼽히는 팔도구본당을 살핀다.

 

 

수난과 박해, 마침내 꽃으로 핀 팔도구공동체

 

"윤 동무, 있소?"

 

1967~68년 어느 날 새벽. 당시 팔도구본당 주임이던 류위팅(劉裕庭, 중국인 사제) 신부가 윤영복(우르바노, 72)씨 집을 찾아왔다. 류 신부의 갑작스런 방문에 윤씨는 놀라서 방문을 열었다.

 

"아니, 신부님! 이런 어둑새벽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래도 심상찮아요. 용정 제2고급중학교 홍위병들이 우리 성당을 허물려고 한대요."

 

"예?"

 

깜짝 놀란 윤씨가 옷을 갈아입고 성당에 달려가니, 류 신부는 벌써 감실에 모신 성체를 영하고 있었다. 이에 윤씨는 류 신부에게서 제대 성석과 성광, 라틴어 미사경본 등을 챙겨 집으로 돌아와 10여 차례 비닐에 싸 뒷산에 묻었다. 성물을 묻자마자 용정에서 조선족 홍위병들이 달려와 망치와 도끼로 성당을 허물고 박해의 광풍이 불었다. 그 와중에 성당 지붕에 올라갔던 홍위병 1명이 떨어져 죽고 몇몇은 부상을 당했다. 팔도구본당 초대 주임 최문식(1881~1952, 서울대목구) 신부와 전 공동체가 1917년 정성 들여 짓고 후일 개축한 성당은 이처럼 집단적 광기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졌다.

 

1937년 10월 해성학교 운동회에서 성 베네딕도회 수사들이 악단을 이뤄 합주하며 아이들 관심을 끌고 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 내내 10여 년간 류 신부는 고깔모자를 쓴 채 온동네를 다니며 조롱을 당하고, 분뇨통을 담은 똥지게를 지고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밤엔 회계일도 봤다. 신자들 또한 성경과 성가책을 빼앗기고 수난을 당했다. 그럼에도 팔도구 공동체의 신앙과 열심까지 꺾지는 못했다.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쇠처럼, 그 엄혹한 박해에도 팔도구에선 집집마다 기도소리가 흘러나왔다.

 

1979년 중국에 개혁ㆍ개방이 이뤄지면서 공동체는 신앙을 되찾았고, 1992년 7월 19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의 지원으로 옛 성당 부지 위쪽 언덕에 성당을 재건축해 봉헌했다. 이 때 윤씨는 27년 전에 묻었던 성석과 성광, 라틴어 미사경본을 찾아내 봉헌 때 성당에 봉안했다. 공동체는 또 2003년 8월 5일 '팔도구 교우촌 건설 100주년 기념축제'를 거행하기도 했다.

 

 

끈끈한 공동체 결속력, '간도의 로마' 일궈내

 

이처럼 굳건한 신앙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1903년 용정공소에서 분가, 조양하(朝陽河, 초양허)에 자리잡은 조선이주민 10여 가구가 뿌린 복음이 그 씨앗이다. 당시 김계일 등은 이주하자마자 수남(水南)촌에 공소집을 마련해 신자 2100여 명의 공동체로 컸다. 조선대목구장 뮈텔(G. Mutel) 주교는 이에 1910년 9월 26일 최 신부를 파견, 간도 세 번째 본당으로 '조양하(훗날 팔도구)본당'을 설정하고 간도 북쪽 지역 사목을 맡긴다. '간도의 로마'로 불리는 팔도구본당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영광과 수난은 함께 뒤따랐다. 1917년 기존 공소터에 공사비 1000위안을 들여 벽돌로 '성모성심'성당을 신축하고 이듬해 1월 4년제 사립 조양학교(훗날 해성학교)와 조양정녀학교를 설립, 교육에도 힘을 쏟았지만, 최 신부와 신자 10여 명, 외교인 30여 명이 1919년 7월 마적들에게 납치돼 205일간 수난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성당에 총 400정이 있다는 헛소문 탓이었다.

 

지난 5월 8일 오후 평일미사를 봉헌한 뒤 성당을 나와 손을 흔들어 주는 연길본당 팔도구공소 공동체 할머니들 얼굴 표정이 무척 해맑다.

 

 

이후 퀴겔겐(K. Kugelgen)ㆍ슈미트(C. Schmid)ㆍ에크하르트(A. Eckhardt)ㆍ차이라이스(V. Zeileis)ㆍ트라볼트(A. Trabold) 신부 등은 간도 최초 성체거동(1924년), 대령동(大嶺洞, 따링둥, 훗날 차조구)본당 분할(1926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전교ㆍ교육ㆍ의료 사업(1936) 등을 통해 지역의 등불이 된다. 하지만 1945년 9월 해방 직후 성당에 난입한 소련군에 의해 첼러(E. Zellner) 수사가 피살되고, 1946년 7월 중국 인민해방군 8군에 에그너(R. Egner) 신부와 수도자들이 체포돼 1952년 8월 추방되면서 본당은 폐쇄된다.

 

 

연변 전역으로 뻗어나간 팔도구 공동체

 

순교의 믿음은 연변 전역으로 뻗어나간 팔도구 공동체의 버팀목이다. 연길(延吉, 옌지)서 북서쪽으로 23㎞ 떨어진 용정시 조양천진 팔도구에 들어선 것은 5월 늦은 오후였다. 그런데도 이날 오후 4시 평일미사에 40여 명이나 참례했다. 이런 열심이 현재 중국 내 조선족 사제 8명 중 윤덕헌(안도ㆍ돈화본당 주임)ㆍ조광택(용정ㆍ화룡본당 주임)ㆍ리광필(연길본당 왕청공소 보좌)ㆍ권혁화(성 베네딕도회 수사, 길림교구 코첸[口前]본당 주임) 신부 등 4명을 배출한 저력이 되었다. 조선족 수녀 또한 개혁ㆍ개방 이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조금선(베네딕타)ㆍ권옥산(프란체스카, 이상 연길분원) 수녀와 길림성가회 윤덕향(마리아) 수녀 등 3명을 배출했다.

 

성당에서 나와 언덕에 오르니 팔도구공소(현재 연길본당 관할) 묘역이다. 묘역에는 첼러 수사와 공산 치하 용정에서 인고의 삶을 살다 2001년 선종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감정옥(안나) 수녀 등 수도자들 묘소가 들어서 있다.

 

현 안도본당 주임 윤덕헌 신부의 부친인 윤영복씨가 문화혁명 때 땅에 파묻었다가 1992년에 27년 여만에 발굴한 성광과 라틴어 미사경본.

 

 

잠시 고인들을 기리며 화살기도를 바치고, 옛 성당터에 세워진 초가 양로원에 들렀다. 이정순(안나, 81) 할머니 등 4명이 노후를 보내는 보금자리다. 양로원에서 만난 김성숙(엘리사벳, 71) 할머니는 "왕(에그너) 신부님께서는 늘 어깨에 거는 서양식 앞치마를 두르시고 낡은 성당 구석구석을 고치며 노동하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을 기억한다"고 회고하고 "이젠 아주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로원을 나와 전 함흥교구장 서리 겸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이동호(플라치도, 1935~2006,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아빠스의 생가를 지나 내려오는 길에 서울 성 분도병원(2001년 폐쇄)과 용정시 인민정부가 1996년에 세운 '팔도진위생원'에 잠시 들렀다. 옛 의료사도직의 전통을 잇는 이 진료소는 건립 당시 의료진이 20여 명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2명밖에 없다고 한다.

 

해성학교 또한 옛 모습이 아니다. 1989년 옛 학교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탓에 신축건물만 덩그라니 서 있고, 옛 수녀원 및 진료소 터가 유적지로 남았을 뿐이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서 돌아본 팔도구는 선홍빛 노을에 잠겨 있다.

 

[평화신문, 2008년 7월 6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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